전쟁...../임진왜란

의병의 봉기

구름위 2013. 6. 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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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잡혀가자…“일본군의 심장을 구워먹었다”


대구 망우당 공원에 있는 곽재우의 상.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서진을 차단하여 궁극에는 전라도를 지켜내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신출귀몰한 작전을 통해 연승을 거둠으로써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퍼져 있던 일본군에 대한 공포심을 불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충의당 제공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신(帥臣)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데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전부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들이 유생들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를 떨쳐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했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일어나게 된 전말을 기록한 <국조보감>의 내용이다. 국가의 입장, 재조(在朝) 관인의 입장에서 의병의 봉기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의병 덕분에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하면서도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다’고 하여 의병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역할을 평가절하하려는 속내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이광·윤선각·김수 6만 대군의 용인 패전


개전 직후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선조와 조정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내몰리면서 조선 조야의 사기는 저하되고 백성들의 위기감은 높아졌다. 특히 1592년 6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이끌던 6만 가까운 대군이 용인에서 패전했던 것은 조선 관군의 실상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광은 애초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려다 금강 부근에서 선조 일행이 이미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 귀환했다. 지역 민심은 들끓었다. “관찰사가 싸우지도 않고 돌아올 수 있느냐?”는 비난과 질책이 이어졌다. 심기가 불편해진 이광은 다시 북상했다. 그리고 그 대열에 윤선각의 충청도 병력과 경상도에서 이동해 온 김수의 병력이 합류했다.

 

이광의 부대는 병력은 많았지만 질서와 기율이 없었다. 행군 장면을 두고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응하지 않아서 양을 몰고 목장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용인에 이르러 선봉 백광언 등이 “다수의 오합지졸로 싸우면 위험하니 부대를 쪼개 진을 나누자”고 건의했으나 이광은 듣지 않았다. 병법을 알지 못했던 문관의 한계였다. 일본군은 매복하여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광의 병력은 소소한 승리를 거두자 오만해졌다. 6월6일 아침, 이광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병사들에게 아침 식사를 명했다. 취사를 위해 연기가 피어오르자 일본군 기마대가 돌격해 왔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수만의 대군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적에 대한 기본적인 경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비롯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과 전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과의 싸움이 빚은 결과였다. 어마어마한 군세에 기대를 걸고 이광 군의 진영 근처로 모여들었던 경기도와 충청도 피난민들도 조선군이 패주하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기대가 다시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광 군의 경우에서 보이듯 관군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체념의 분위기가 번져갔다. 그에 맞물려 전국 곳곳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전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던데다 지역의 수령들마저 대거 도주했던 경상좌도에서는 부일배(附日輩)들이 속출했다. “김해와 동래 등지의 백성들은 모두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들을 더럽히는 것이 왜적보다 심하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부하들 공포심 없애려는 곽재우의 연출

대표적인 의병장 고경명의 사당. 1592년 5월 담양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은 수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근왕하기 위해 행재소로 향하던 중 금산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여 장렬하게 순절했다. 광주 광산구 소재.(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문집 (農圃集).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는 회령 지역의 반민(叛民) 국경인 등을 처단하고 길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함경도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1999)에서 전재.


주목되는 것은 김해 지역 주민들 가운데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을 도모하는 자들도 있었던 점이다. 평소 보따리 속에 일본인의 옷과 신발을 싸 갖고 다니다가 위기 상황이 닥치면 일본인 모습으로 변장하는 자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현실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지방관의 장정 동원과 물자 징발에 시달리던 전라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순창과 옥과에서는 수령의 징발 명령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옥사를 파괴하는 난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의 상황은 특히 심각했다. 지역 주민들이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난동을 일으켜 수령이나 지휘관들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함경병사 한극함이 경원 백성들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다. 함흥의 생원 진대유(陳大猷)는 자신들의 딸을 일본군에게 바친 뒤 밀정이 되어 저항을 꾀하는 조선인들을 신고하여 처단하도록 했다.

 

함경도는 여진족의 거주 지역과 가까운데다 일찍부터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곳이다. 또 과거 등을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전국의 범죄자들이 귀양 오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본군이 함경도에 진입하게 되자 토착민들은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급기야 회령에서는 귀양살이하던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는 충격적인 사건마저 일어났다. 함경도의 지역 정서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두 왕자와 그를 수행하던 관속들이 지역민들에게 자행했던 민폐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는 백성들이 속출하고 왕자들까지 사로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지는 일이 벌어지면서 조정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을 막아내는 것 못지않게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전란의 극복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연이은 패전과 불온한 민심 때문에 고민하던 조정의 입장에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은 분명 한 줄기 ‘복음’이었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이는 경상도 의령의 유생 곽재우였다. 그는 일본군이 침략한 직후인 1592년 4월24일, 사재를 털고 집안의 가동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곽재우는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구사하면서 정암진(鼎巖津) 전투를 비롯한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은 쉽사리 경상우도로 들어오지 못했고, 궁극에는 전라도의 안전까지도 상당 기간 확보되었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활약을 통해 ‘일본군은 무적’이라는 선입견과 패배의식이 깨졌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곽재우가 일본군의 심장을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견 엽기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내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필시 곽재우의 의도된 행동으로 여겨진다. 초전에 경상좌도 지역이 철저히 유린되고 “일본군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우도의 각 고을들 또한 줄줄이 무너질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곽재우는 일본군의 심장을 구워 먹는 행동을 통해 ‘일본군도 조선인과 똑같은 오장육부를 가진 존재’이고 ‘칼이나 화살을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의병장이 경상감사의 목을 치겠다고?


곽재우의 거병 이후 경상도에서는 정인홍, 김면, 박성 등 조식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권응수 등이 줄줄이 의병을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전라도의 고경명과 유팽로, 김천일 등도 봉기했고 충청도의 조헌, 경기도의 우성전, 황해도의 이정암 등도 잇따라 들고일어났다. 민심이 가장 흉흉했던 함경도에서도 정문부가 거병함으로써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직후, 왕자들을 일본군에게 넘긴 국경인 등을 처단하는 한편 부일의 정도가 경미한 자들을 풀어주어 지역의 민심을 수습했다.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의병들의 저항을 받는 바람에 일본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전체적인 작전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연이은 패전과 파천, 그리고 적대적인 민심 때문에 고민하던 선조와 조정은 의병들의 활약에 고무되었다. “의병 덕분에 망해 가던 나라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상찬 속에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에게는 벼슬이 내려졌다.

 

막다른 위기 국면에서 나타난 활약을 통해 의병과 의병장들에 대한 조정의 평가는 높아졌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의병장들과 관군 지휘관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은 전란 초반 적과의 싸움을 회피하고 도주했던 지방관들의 비겁함을 성토했다. 특히 곽재우는, 전란 직후 도주했던 경상감사 김수를 직접 처단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거병 직후 의병들에게 보낸 통문에서 김수를 통박했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큰 반역자이다. 옛 법도에 따르면 누구든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 왜적을 맞아들이고 서울까지 내줘 임금에게 피난 가게 했으니 그를 어찌 감사라 하겠는가? … 그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그 공적은 풍신수길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클 것이다.”

 

김수, 아니 재조 관인들이 보면 곽재우의 격문 내용은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경상감사는 종2품의 고관이다. 그런데 일개 유생 신분에 불과한 곽재우가 그를 처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곽재우만큼 과격하지는 않지만 고경명과 조헌의 입장도 비슷했다. 고경명은 각 고을에 돌린 통문에서 우물쭈물하는 지방관들을 ‘나라를 완전히 저버린 자’들이라고 성토했다. 또 순찰사 이광에게도 각성하라고 촉구했다. 조헌도 거병을 촉구하는 격문에서, 달아나 버린 관인들을 준열하게 질타했다. “왜적을 치는 데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망친 지방관들과 같은 자이므로 전쟁이 끝난 뒤 중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갈등은 재야 의병장과 재조 관인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스스로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들이 보기에 김수 같은 인물은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재조 관인들이 보기에 곽재우 등의 행위는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재야’의 도전을 방치하는 것은 결국 국왕 선조의 권위를 갉아먹는 행위였다. 선조는 곧 의병 손봐주기에 나선다. 의병장들에게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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