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선조의 의주 파천

구름위 2013. 6. 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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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불붙인 건 일본군이 아니었다


1593년 9월 선조가 내린 한글 교서이다. 일본군에게 잡혀간 조선 백성들에게 탈출하여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일본군에게 잡힌 것이 백성들의 본의가 아닌 이상 모두 용서하여 편히 살게 하겠다는 것, 일본군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 오거나 다른 포로들을 데리고 나올 경우 벼슬을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국립진주박물관>(2010)에서 전재


“전하께서는 사직이 폐허가 된 것을 통감하시어 즉시 스스로를 탓하는 전교를 내리시고 통렬하게 자책하셔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여러 궁가(宮家)의 침탈행위, 조정이 깨끗하지 못했던 것, 일본에 대한 실책, 상과 벌의 시행이 적합하지 못했던 것, 이단을 숭상하여 믿은 것, 언로가 두절된 것, 아첨하는 궁인과 신하들이 많았던 것, 내탕(內帑·왕의 개인 금고)이 가득 찼던 것,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가혹했던 것 등 갖가지 죄과를 열거하여 문장을 강개하게 써서 중외에 선포하시고 김공량의 머리를 베어 내건다면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백성들은 상처를 싸매고 전쟁터로 나갈 것이고 병사들은 진격만 하고 후퇴하지 않을 것이요, 백번을 패한다 해도 오히려 백번 싸울 것을 생각할 것이니 어찌 나라가 무너질 염려가 있겠습니까?”


1592년 5월 평양에 머물던 선조에게 한음도정(漢陰都正) 이현(李俔)이 아뢰었던 간언의 내용이다.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된 직후 서울을 버리고 파천해야만 했던 까닭을 선조의 실책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당장 목을 쳐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김공량은 당시 선조가 총애했던 후궁 인빈 김씨의 오라비였다. ‘총애하는 측근의 비리를 단속하지 못하고, 비판에 귀를 막은 채 가혹한 부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전쟁이 초래되었다는 것이 이현의 분석이다. 그가 제시한 구국의 방책 또한 명료하다. 실정(失政)을 자인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민심을 얻을 것이고, 백성들은 즐거이 일본군과 싸울 것이니 나라가 망할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후궁의 차남’을 왕세자로 지명하고 파천길에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직후 선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대신들은 위급한 상황을 넘기려면 평양으로 나아가 명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발이 터져나왔다. 일부 신료들은 서울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파천하기로 결정했다.

 

선조는 이어 광해군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그는 후궁 공빈 김씨의 몸에서 난 둘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열심히 학문을 닦는다’고 책립(冊立) 이유를 설명했지만 분명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인 그를 왕세자로 삼은 것은 훗날의 논란과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천을 앞두고 종사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서 이것저것 세세히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선조는 또한 맏아들 임해군은 함경도로, 여섯째 아들 순화군은 강원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왕자들을 각 도로 내려보내 근왕병을 모아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조처 또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결국에는 실책이 되고 만다. 함께 함경도로 들어갔던 두 왕자는 이런저런 민폐를 자행했고, 회령 지역 주민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지는 수모를 겪게 된다.

 

선조의 필적.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서울을 떠나 평안도 의주까지 파천해야 했다. 그는 피난길에서 갖은 간난신고를 겪었다. 추격해 오는 일본군의 위협과 피난도중에 목도한 싸늘한 민심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는 결국 의주로 파천하면서 시간을 벌고 명군을 요청함으로써 종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규장각 소장 <선묘어필>에서

 

4월30일 새벽 선조는 인정전을 나와 서행길에 올랐다. 파천이 결정되자 민심도 곧바로 흩어졌다. 대궐 안의 이서배와 나인들이 사라지더니 왕을 경호해야 하는 위사들도 달아났다. 선조를 수행하는 종친과 문무관의 수는 100명도 되지 않았다. 평양에서 선조에게 쓴소리를 쏟아냈던 이현의 회고에 따르면, 선조가 궁궐을 나설 무렵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궁궐 주변에 모여 있던 장수들은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이 전쟁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라고 했고,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일본군)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조가 도성을 나온 직후 궁궐에 불이 붙었다. 난민들의 소행이었다. 그들은 먼저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두 곳 모두 노비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내탕에도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다. 역대 왕들의 실록은 물론 승정원일기가 타버렸고, 고려사를 편찬하고 남겨두었던 초고까지 다 사라졌다. 허망한 순간이었다.

 

난민들은 임해군의 집과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도 그냥 두지 않았다. 평소 재물을 잔뜩 긁어모았다고 소문이 난 집들이었다. 서울 사수를 명 받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이 군사를 동원하여 난민 몇몇의 목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난민들이 너무 많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왕만 배고픈 것이 아니다”


파천을 시작했던 당일 많은 비가 내렸다.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을 때 비는 더욱 심해졌다. 선조는 경기감사가 바친 비옷을 겨우 입었지만 나머지 일행은 전부 비에 젖었다. 종사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비관이 퍼지면서 수행원들은 동요했다. 선조를 따르던 관원들 가운데 다수가 도성 쪽으로 사라졌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하려는 깜냥이었다. 혜음령을 지나면서부터 궁인들이 탄 말이 진흙에 빠져 낙오하고, 통곡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선조 일행은 초경 무렵에야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했다. 도성을 나선 이후 일행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줄곧 걸었다. 동파역에서는 파주목사 허진(許晉)과 장단부사 구효연(具孝淵)이 선조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조를 수행하던 하인들이 부엌으로 난입하여 수라로 바칠 음식을 모두 먹어버렸던 것이다. 왕에게 바칠 음식이 없어지자 허진과 구효연은 처벌이 두려워 달아났다. 피난길의 피곤함과 배고픔은 선조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5월1일 동파관을 떠나기에 앞서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선조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면서 대신들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국왕이 괴로운 표정으로 절박하게 대책을 호소하자 대신들은 엎드려 눈물만 흘릴 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누군들 뾰족한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조의 지명을 받자 이항복이 나섰다. 그는 ‘의주로 갔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명나라로 들어가 호소하자’고 건의했다. 윤두수 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지세가 험하여 적이 들어오기 어려운데다 병마(兵馬)가 굳세고 날래다는 것을 들어 함경도로 가자고 촉구했다.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서쪽 평안도로 가서 궁극에는 명에 의탁할 것인가, 북쪽 함경도로 가서 천험의 요새를 이용하여 저항을 시도할 것인가?

 

류성룡은 명으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했다. ‘대가가 압록강 너머로 한 걸음만 나가도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명에 귀순하여 의탁하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했다. 류성룡은 평안도와 함경도가 아직 건재하고 호남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명에 의탁하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명으로 의탁한다는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곧바로 민심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갈수록 초라해지던 행렬은 개성 부근에 이르러 조금 모양이 갖추어졌다. 황해감사 조인득과 서흥부사 남억이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와서 호위에 가담했던 것이다. 선조는 개성에 도착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선조는 개성의 부로(父老)들을 불러모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지역의 민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로들은 ‘왕자들 집안에서 산림과 갈대밭을 독차지하고 백성들이 이용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호소했다. 왕자 집안을 비롯한 궁가들의 작폐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현장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영의정 등을 지내며 전쟁을 지휘했던 류성룡의 투구. 류성룡은 선조가 파천할 무렵 일부 신료들 사이에서 불거졌던 요동으로의 귀순론을 잠재움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동, 충효당 소장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에서 전재


두 개의 적, 일본군과 등돌린 민심


개성의 부로들은 더 이상 북쪽으로 가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선조 일행은 계속 북상했다. 일본군이 자신들을 추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선조를 더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심상치 않은 민심의 동향이었다. 황해도 평산에 머물 때 “적병 가운데 절반은 조선 사람”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신료들이 느끼는 위기의식도 절박했다. 황해감사 조인득 등은 궁궐의 이서배들과 하인들을 잘 단속해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5월7일 평양에 도착한 뒤 신료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들을 쏟아냈다. 특히 권세를 부려 민심을 잃게 만든 김공량을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평안도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세금과 공물을 면제해줄 것, 즉시 과거를 시행하여 지역 민심을 다독일 것, 전란중이지만 경연을 수시로 열어 여론을 청취할 것 등등의 대책이 제시되었다.

 

선조는 6월2일 대동관(大同館)에 거둥하여 평양의 부로들에게 유시했다. ‘더 이상 북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죽음으로써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6월10일 선조의 다짐은 공약(空約)이 되고 만다.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북상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날 선조보다 앞서 중전이 평양성을 나가 북으로 가려 하자 평양 주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중전의 시녀를 몽둥이로 쳐서 말에서 떨어뜨리고, 수행하던 호조판서 홍여순을 난타했다. 선조는 병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소요를 진압하고 다시 파천길에 오른다.

 

선조가 평양을 떠나면서 지역의 민심은 싸늘해졌다. 선조 일행이 향하는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은 소식을 듣고 전부 흩어졌다. 국왕 일행을 접대하는 과정의 괴로움, 궁료배들이 자행할지도 모르는 민폐를 우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던 것이다. 숙천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누군가 관아의 담벼락에 ‘국왕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간다’고 낙서를 해놓았던 것이다. 선조의 행방을 일본군에 알려주기 위해 고의로 그런 것이었다.

 

 

 

 

 

 

 

선조는 6월22일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까지 내몰린다. 강을 건너 명나라로 귀순할지의 여부를 놓고 다시 격렬한 논란이 빚어졌다. 선조 일행은 두 개의 적에게 쫓기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떠나버린 민심이라는 ‘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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