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기만적 강화협상과 ‘가짜’ 시리즈

구름위 2013. 6. 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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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 후궁으로 보내라”

 

 

행주산성의 전승 기념비. 행주산성은 한강 하류에 위치하여 서울과 강화도, 그리고 서해로 연결되는 전략 거점이었다. 1593년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 싸움에서는 관군과 승군뿐 아니라 민간의 부녀자들까지 참여하여 사력을 다해 일본군과 맞섰다. 조선군은 행주대첩을 계기로 서울을 수복하려는 작전을 추진했지만 명군의 거부에 밀려 무산되고 말았다.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전재

 

이여송이 벽제에서 패한 직후인 1593년 2월12일,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이끄는 약 1만의 조선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애초 명군과 연합하여 서울을 수복하러 나섰던 권율은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3만에 이르는 일본군은 아침 일찍부터 줄기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권율과 장졸들은 거의 12시간에 걸쳐 아홉 차례나 이어진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권율 스스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독전했던데다 높고 험준한 지형을 적절히 활용한 결과였다. 일본군은 결국 시신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운 뒤 물러갔다. 조선군은 나머지 시신에서 130여 급의 수급을 획득했다.


권율(1537~1599) 장군의 초상. 전라도관찰사 권율은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 육군을 대표하는 장수로 떠올랐다. 그는 강화협상이 본격화되자 전라도로 귀환했으나 이후 도원수로서 정유재란 시기까지 각 지역의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전재


권율의 승전 소식에 머쓱해진 이여송

 

이후 권율은 군사를 이끌고 파주 쪽으로 진영을 옮겼는데 일본군은 그에게 섣불리 싸움을 걸지 않았다. 행주의 패전을 계기로 조선 육군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권율의 승전 소식에 명군 지휘부는 복잡한 반응을 보였다. 사대수(査大受)는 권율의 승첩을 찬양하며 ‘조선에 진짜 장군이 있다’고 했다. 반면 머쓱해진 이여송은 자신이 벽제전투에서 패전한 뒤 곧바로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었던 무렵 조선은 서울 도성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방책 마련에 부심했다. 당시 조선군은 서울 주변의 각처에서 도성을 넘보고 있었다. 권율을 비롯하여 고언백(高彦伯)과 이시언(李時言) 등이 파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차단하고 의병장 박유인(朴惟仁) 등은 창릉(昌陵) 부근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기수사 이빈(李), 충청수사 정걸(丁傑) 등은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와 한강 주변을 드나들며 일본군을 교란하는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이렇게 서울 주변에서 유격전 등을 통해 교란 작전을 펼치자 도성의 일본군은 ‘멀리 나아가 땔나무를 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조선군 지휘부는 더 나아가 서울 남방의 일본군 진영을 타격할 계획을 구상했다. 류성룡은 명군 장수 왕필적(王必迪)에게 남병 병력을 뽑아 강화도로부터 한강 남쪽으로 몰래 들어가 각지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하자고 제안했다. 조선군과 명군을 파주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주의를 끌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한강 수로를 활용하여 서울 남쪽의 일본군을 공략하자는 양동작전이었다. 왕필적은 탁견이라고 칭찬하면서 적극 동조했다.

 

하지만 제독 이여송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는 남병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북병 장수인 그의 남병에 대한 불신과 시기심은 여전히 컸다. 작전은 결국 폐기되었다. 명군의 도움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던 상황에서 조선군만으로 섣불리 공격에 나서는 것은 무리였다. 또 평양전투 승리 이후, 이여송이 조선군의 군령, 작전권까지 틀어쥔 상황에서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1593년 3월과 4월, 심유경은 용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협상을 벌여 일본군의 철수를 이끌어낸다. 명일 양측은 잠정적으로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철수해 남쪽으로 물러나고 포로로 잡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송환하기로 약속했다. 명군 또한 일부 병력을 철수시키고 강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4월20일, 일본군이 물러가자 제독 이여송은 서울 도성으로 들어왔다. 도성의 상황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백성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살아남은 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귀신 안색을 하고 있었으며 사람과 말의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곳곳에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는 형편이었다.

 

도성에 입성한 이여송은 뒷북을 쳤다.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겠다며 자신의 아우 이여백(李如栢)에게 1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먼저 출발시켰다. 하지만 이여백은 명군이 한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발이 아프다고 하면서 도로 돌아왔다. 일본군을 추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조선에 보여주기 위한 면피성 행동이었다.

 

요동에 머물고 있던 경략 송응창의 행동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심유경으로부터 강화협상의 진척 사항을 보고받은 뒤 명군과 조선군 모두에 교전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린다. 조선군은 서울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송응창은 또한 조선이 명으로 파견하는 사신들을 중간에서 차단했다. 혹시라도 강화협상에 비판적인 조선의 입장이 북경의 조정에 전달되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협상 대표 목이 달아날 어마어마한 사안

 

송응창은 일본군이 남쪽으로 철수할 때 심유경뿐 아니라 자신의 부하인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동행시켰다. 송응창은 사용재와 서일관을 명 황제가 파견한 칙사로 가장했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가짜 칙사를 보내 일본 측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 오기만 하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라는 안이하고 낙관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조처였다.

 

1593년 5월 이여송이 서울을 떠나 충주를 거쳐 문경까지 남하했다. 심유경은 이여송이 대군을 이끌고 전진한 것 때문에 일본 측이 반발할까봐 노심초사했다. 결국 화의가 깨질 것을 염려한 명군 지휘부는 오유충(吳惟忠)과 유정(劉綎) 등이 거느리는 일부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병력은 도로 북상시켰다.

 

경상도 지역으로 물러난 일본군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철수는커녕 성을 새로 쌓고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경상도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미 1593년 2월 초부터 부산, 동래, 서평(西平), 다대포(多大浦) 등지에서 축성을 위한 기초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는 여전히 부산 앞바다의 아차도(阿次島)로 군량이 운반되어 적치되었다. 또 일본군이 조선 민간인들에게서 소와 말을 구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측 또한 말로는 철수를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만적인 자세로 강화협상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용재와 서일관 등은 1593년 5월15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의 안내를 받아 나고야에 도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 사람이 일본에 도착하기 직전 부하들에게 강화협상과 관련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려면 명측이 대략 네 가지의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명나라의 황녀(皇女)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 것, 둘째 조선 팔도 가운데 네 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셋째 일본군이 물러날 경우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넷째 중단되었던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재개할 것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 ‘가짜 칙사’인 사용재나 서일관 등이 함부로 가부를 언급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일본 측이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자 사용재 등은 일단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고 응수했다.

 

‘황녀를 천황에게 하가(下嫁)시킨다’는 것은 명 황제에게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안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명측 협상 대표는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었다. 또 팔도 가운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일본에 떼어준다면 조선에 무엇이 남는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침략을 자행하여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군이 철수했다고 볼모를 보내라는 요구였다. 히데요시가 제시한 조건들이 사실대로 알려질 경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다소라도 있는 것은 무역을 재개하라는 조건 정도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초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자 심복. 조선 침략에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히데요시의 명령을 전달하고 전황을 챙기는 노릇을 담당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주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맞서다가 최후를 맞았다. <도설(圖說) 도쿠가와 이에야스> (1999·도쿄 가와데쇼보신샤)에서 전재

 

진주성에 비극의 먹구름이 몰려오다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거의 없었다. 양측이 서로에게 제시한 조건이 워낙 현격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명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책봉만 해 주면 대국(大國)의 은혜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오랑캐’로 치부하고 있었다. 일본은 ‘비록 평양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전체 전쟁에서는 일본군이 이겼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명의 자존심과 스스로를 ‘승전국’이라고 인식했던 일본의 자만심이 맞부딪히는 대목이었다.

 

명의 ‘가짜 칙사’들이 나고야에서 협상을 벌이고 있을 무렵, 고니시와 심유경은 명 조정에 사절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 주인공은 고니시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內藤如安)이었다. 조선과 명에서는 그를 보통 소서비(小西飛)라고 부른다. 소서비는 명 황제에게 올릴 납관표(納款表)를 소지했다. ‘납관표’란 ‘우호 관계를 다지기 위해 황제에게 공손히 충성을 맹세하는 표문’ 정도의 뜻을 지닌다. 소서비는 물론 가짜 사절이고 납관표 또한 급조된 것이었다.

 

심유경이 소서비 일행을 데리고 서울과 요동을 거쳐 북경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1593년 7월, 선조는 “조선은 결국 심유경 때문에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한탄하면서 신료들에게 대책을 지시했다. 조선 조정은 송응창과 이여송 등에게 “소서비 등이 조선군과 명군의 실상을 정탐할 우려가 크다”며 그들의 북상을 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송응창은 소서비 일행을 만났을 때, 히데요시가 직접 쓴 항복문서를 가져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심유경은 소서비를 요양(遼陽)에 남겨둔 채 다시 경상도로 돌아와 고니시를 만난다. 두 사람은 협의 끝에 명에 보내는 히데요시 명의의 항복편지를 위조했다. ‘가짜 사절’에 ‘가짜 표문’, 그리고 ‘가짜 편지’에 이르기까지 기만적인 협상은 거침이 없었다.

 

한편 히데요시는 명의 ‘칙사’들에게 강화를 위한 조건들을 제시한 것과는 별도로 부하들에게 조선에 대한 공격을 다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 관민들을 남김없이 섬멸하고 전라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명군 지휘부가 협상에 정신이 팔려 결전을 포기하고, 조선 조정 또한 명군 지휘부의 강압에 떠밀려 우왕좌왕하는 사이 진주성을 향해 비극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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