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그 후

구름위 2013. 6. 20. 16:47
728x90

 

선조의 의주 파천이 나라를 구했다고?

 

 

순신역전(舜臣力戰)의 모습. 광해군대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실린 이순신의 순국 장면. 이순신은 순천의 고니시 군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시마즈 함대를 요격하다가 장렬히 순국한다. 그림에 묘사된 이순신의 표정을 보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1598년 6월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이 임박하면서 조선에 있던 수만의 침략군을 철수시키는 문제가 긴급한 현안이 되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히데요시가 보인 태도는 오만하고 뻔뻔했다. 측근이자 비서였던 세이쇼 쇼타이(西笑承兄)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조선 측이 사죄의 뜻을 전해온다면 용서하겠다”고 떠벌렸다.

 

같은 해 8월 히데요시가 죽자 권력의 핵심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오대로(五大老)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 지휘관들에게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은 직접 알리지 않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쌀과 호피 등 각종 특산물을 일본에 헌상할 것’ 등 황당한 조건을 조선에 전하라고 지시했다.


명군의 사로병진책이 실패한 까닭


이 무렵 조선 조정과 명군 지휘부 또한 여러 경로를 통해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인지했다. 명군 지휘부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병부상서로서 명군을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던 군문 형개(邢玠)는 ‘일본군을 모두 섬멸하겠다’며 이른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제시했다. 마귀(麻貴), 동일원(董一元), 유정(劉綎) 등 세 명의 제독에게 육군을 이끌고 각각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왜성을 공략하도록 하고 도독 진린(陳璘)을 시켜 수군으로써 남해 일대의 일본군을 협공하도록 하는 방책이었다. 8월18일 마귀, 동일원, 유정 등은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출발했다. 선조는 숭례문 밖까지 나아가 그들의 무운과 승전을 기원했다. 선조가 위로하자 마귀는 장담했다. “천조(天朝)가 귀국을 구원하는 이상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직분입니다.”

 

명군 지휘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일본군을 공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598년 10월, 동일원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지키고 있던 사천성을 공격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고 만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성을 제압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율, 이순신, 유정, 진린 등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은 9월 중순부터 육군과 수군으로 순천 일대를 공략했지만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사천과 순천의 왜성이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는데다 일본군의 저항이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했던 또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명군 지휘부의 소극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특히 유정은 고니시의 화의(和議) 제안에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순천 공략을 위해 전주를 떠날 때부터 이미 “군사의 휴식이 필요하다”며 결전을 회피했다. 적을 급습해야 할 상황에서도 포차, 운제(공격용 사다리) 등을 만들면서 시간을 허비하여 일본군에게 숨을 돌릴 여유를 주었다. 유정은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수군까지 지휘하려고 시도하여 진린과 마찰을 빚었다. 이순신이 순천 앞바다로 출동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려 할 때마다 그를 저지하는 등 궁극에는 조선군의 발목을 잡았다. 급기야 1598년 10월3일, 유정은 애초 진린과 수륙 합동으로 순천성을 공략하기로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공격에 나섰던 조선과 명의 수군만 막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유정과 진린의 견제, 이순신의 스트레스


수군 도독 진린 또한 애초에는 일본군과의 싸움에 몹시 소극적이었다. 그는 이순신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일 때 관망하거나 원양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순신이 획득한 일본군의 수급을 빼앗거나 이순신이 올리는 장계의 내용까지 조작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이순신은 진린의 견제와 압력, 그리고 무리한 요구 때문에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를 토로한 바 있다. 진린 등 명군 지휘부의 횡포 때문에 원균의 패전 이후 겨우 수습해 놓은 수군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유정, 진린 등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1598년 11월, 이순신은 순천 왜성에 있던 고니시 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광양만의 장도(獐島) 부근에 함대를 배치하여 고니시 군을 견제하는 한편, 사천 방면에서 시마즈의 병력이 구원하러 올 경우를 대비하여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에게 하동과 남해도 사이의 노량(露梁) 수로를 지키도록 했다.

 

이순신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자 고니시는 유정과 진린은 물론, 이순신에게 잇따라 사자를 보내 뇌물을 제의하면서 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진린이 동요하는 자세를 보이자 이순신은 “원수를 도망가게 할 수는 없다. 이 적은 명나라의 원수이기도 한데 대인은 어찌 그들과 화친을 도모하느냐?”며 반발했다. 진린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11월14일, ‘남해에 머물고 있는 사위를 만나야 한다’며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구한 고니시의 간계에 넘어가 일본군 선박 한 척이 빠져나가도록 허용했다. 고니시는 결국 시마즈에게 퇴로가 막힌 상황을 설명하고 구원병 파견을 요청할 수 있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이순신은 시마즈의 구원 선단이 오기 전에 길목으로 미리 나아가 요격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진린은 이순신의 계획에 다시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진린의 명령을 무시하고 출전을 감행하겠다며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린 결단이었다. 진린은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의 채근을 받아들였고 조명연합군은 11월18일 노량으로 이동한다. 이순신 함대는 관음포(觀音浦)에, 진린 함대는 죽도(竹島) 부근에 진을 치고 일본군 구원 선단의 길목을 차단했다.

 

11월19일 노량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 함선 약 200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길목을 선점한데다 화력에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또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을 비롯한 명군 장졸들이 적극적으로 분전함으로써 모처럼 연합군의 위력이 발휘되었던 측면도 컸다. 하지만 전투가 대승으로 마무리될 무렵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고 만다.

고니시라는 ‘원수’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시마즈라는 또다른 ‘원수’의 협공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국’ 장수 진린의 견제 때문에 고뇌해야 했던 영웅의 분투가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순천의 고니시 군은 부산 방면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윽고 일본군은 1598년 12월 조선에서 모두 철수했다. 명군은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2년 가까이 더 머물다가 1600년 9월 조선에서 철수한다.

 

1601년(선조 34) 3월,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활약했던 문무 신료들의 행적을 살펴 논공행상의 기준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선조의 지시를 받은 신료들은 왜란 시기의 공적을 심사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녹훈도감(錄勳都鑑)을 설치했다. 녹훈도감에서는 포상해야 할 대상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을 선정했다. 호종공신이란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하는 동안 수행하거나 명에 사절로 가서 명군을 요청하는 데 공을 세운 신료들을 가리킨다. 선무공신이란 주로 무장들로서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운 인물들을 가리킨다. 청난공신이란 1596년 충청도에서 발생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신료들을 가리킨다. 요컨대 ‘왕을 수행하고 명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반란을 진압한 신료’들이 포상의 대상으로 선정되었던 셈이다.


논공행상을 통한 ‘전쟁의 기억’ 만들기


녹훈도감은 1년 가까운 논의 끝에 모두 110명의 공신을 선정했다. 호종공신이 86명, 선무공신이 18명, 청난공신이 6명이었다. 특히 호종공신 가운데는 내시 24명을 포함하여 중인 이하의 인물이 3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전체 공신 가운데 호종공신의 수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조의 의중이 절대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세 종류의 공신 가운데 시종일관 호종공신들의 공로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포상하고자 했다. 그는 실제로 명에 가서 원병 파견을 요청했던 정곤수(鄭崑壽)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항복(李恒福)을 으뜸의 공을 세운 원훈(元勳)으로 인정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무장들(선무공신)의 공로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다. 같은 해 3월13일, 선조는 녹훈도감의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적 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 우두머리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에서의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빛날 뿐이다. 만약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호종했던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도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천조에 호소했기 때문에 적을 토벌하여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의 발언 속에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다. 특히 ‘명군 덕분에 왜적을 평정했다’는 말의 의미는 중차대하다. 전란 극복의 모든 공로를 명군 덕분으로 돌릴 경우 이순신 같은 ‘영웅’의 공로는 상대적으로 왜소해진다. 더욱이 선조는 ‘이순신의 승리가 다소 빛날 뿐이다’라고 하면서 그나마 원균, 권율과 병렬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전란을 치르면서 선조의 위신이 실추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왜란 초반 선조가 ‘그저’ 파천하면서 이반된 민심을 목도하고 전율하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이순신과 곽재우가 영웅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이순신 같은 무장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선조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명군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곽재우 같은 인물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 ‘내가 의주까지 갔기 때문에 명군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담론을 창출해낸다. 선조는 이제 ‘그저 파천만 했던 무능한 군주’에서 ‘명군을 불러온 구국의 군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무엇을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공식적인 기억’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곽재우는 의병을 해산하고 숨어 버렸고, 죽은 이순신은 말이 없었다.

'전쟁..... > 임진왜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종 사료로 보는 칠천량해전  (0) 2013.07.19
전쟁 이후의 조선과 동아시아   (0) 2013.06.20
강화 결렬과 정유재란 발발   (0) 2013.06.20
명과 일본 상인들   (0) 2013.06.20
명군의 패악질과 민폐  (0) 2013.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