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조선의 원정군 준비

구름위 2012. 10. 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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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출병을 결정하고 나서 조선군 총사령관으로 강홍립을 임명한다.

강홍립은 어전통사( 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통역관 출신의

문관을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문관이 군의 수반이 되는 조선의 전통에 따른 것지만,

속은 다르다.

광해군 생각에 원정군의 사령관은 군사적인 재능보다는 장차 마주치게 될 명군과 후금군

사이에서 유연하고 무리없이 행동할 수 있어야 할 인물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명군과

말이 통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광해군은 강홍립을 선택한 것은 탁월했고,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증명했다.

1만명의 전투병을 뽑기 위해서 조선 정부는 평안도 3500, 전라도 2500, 황해도 2000,

충청도 2000명을 징발했다. 병력을 징집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각 도에 관원들은 파견하고

뽑아 놓은 장정들은 서울로 불러 모으는 과정에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

스러워졌다.

병력만 뽑으면 뭐 하나! 군수품도 마련해야 했다.

군량으로 들어갈 쌀과 잡곡은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두어들였다. 또,

명나라가 요구한 말 1천필은 주로 제주도에서 충당했다.

원정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시기는 겨울철 이기 때문에 방한복을 준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재료인 면포를 마련하는 비용은 서울과 개성에 사는 백성들의 몫으로

돌렸다.

이렇게 요동으로 파견할 병력을 모으는 과정은 조선 팔도 전체를 난리통으로 만들었다.

1만의 병력을 모으는 것이 이렇게 힘든가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의

경제가 피폐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200년 전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왜구나 북쪽의 야인들을 토벌하러 갔을때에 파병된

병력이 거의 15000-17000명인 상태지만,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아니였고 일반 백성들도

파견한 것 조차 몰랐던 것와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조선이 원정군을 준비하는데, 왜 힘들었을까?
첫째는 임진왜란의 여파로 인해서 조선의 경제는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이 막 끝난 당시에 전결은 174만결에서 30만결로 줄어들었고, 인구도 1/3로

줄어든 상황이라서 20년이 지난 후에도 완전 회복이 안된 상황이었다. 약간의

회복만 했을 뿐이니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광해군의 궁궐 공사로 인해서다.

조선 말기에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했지만, 그 여파로 자신은 실각 당하게 될

명분을 줄 수 뿐만아니라, 조선 경제를 망쳐놓았다.

조선 말기에 대궐 공사가 이럴진대, 당시에 더 어떻게는가!

광해군은 십년간 토목공사를 자주 벌여 경복궁 이외에 불탄 궁궐을 대부분 재건했고,

또 새로운 궁궐들도 완성했거나 진행중이었다.

특히 인경궁은 경복궁의 칸 수에서 10배나 되는 대규모 공사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큰 편이었다.

이런 광해군의 궁궐 공사는 조선의 재정을 압박했고, 민중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을때, 원정군을 소집한다는 것은 더 조선의 경제를

힘들게 했고, 조정대신들은 토목공사의 중지를 건의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명나라 사신에게 들어가는 접대비도 문제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 정부에 은을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명으로 흘러들어가는 銀은 엄청 많았다.

매번 명나라 사신들이 올때마다 조선은 그들에게 많은 양의 은을 제공했다.

특히 일정한 뇌물 수준의 은이 아니라 나라 재정의 1/3 정도 되는 막대한 규모의 은이

한번 방문하는 중국 사신에게 들어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절단도 명나라 고위 관료들에게 받칠 은을 가지고 갔다고 하니

조선은 銀으로 인해서 망국론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광해군 시절에는 특히 심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조선의 경제는 망할 대로 망한 상황에 1만 정도의 원정군을

준비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몇 개월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원정군을 편성했다.

총사령관은 앞서 말한 대로 강홍립이었고, 부사령관은 김경서다.

김경서의 본래 이름은 김응서인데, 그는 임진왜란때 일본군과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용장이다. 그가 실질 원정군을 운영할 사람이다.

원정군은 전투병 1만을 포함하여 비전투병까지 합치면 대략 13000-15000 정도 된다.

삼수병 시스템으로 된 조선군은 좌영, 우영, 중영의 3영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병력은 조선군 가운데서도 정예병들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임진왜란 이후로

오랜 세월을 공들여 키운 조총수 5000명은 광해군으로써는 더더욱 아까웠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조선에 머물던 강홍립의 조선군은 결국 명나라의 채근으로 1619년

2월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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