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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명군에 합류한 조선군

구름위 2012. 10. 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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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간 다음에 광해군은 또 다른 부대 2만명을 후금과 접해 있는 국경에 배치시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조선군의 보급을 책임지는 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압록강에 배치하여 만주에서 전투를 치르는

조선 원정군의 보급을 담당한다.

광해군이 만반의 준비를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조선 원정군은 만주로 들어가 명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요청으로 조선군이 가져온 말 1000필은 명군에 인계했다.

명나라는 이 원정을 위해 역전의 명장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총사령관 양호, 좌익 북로군 이여백, 우익남로군 사령관 유정이 그들이었다. 양호는 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면서 울산전투를 지휘했고,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 마림, 유정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이다.

이때 참가한 명나라의 병력은 대략 7만 전후했고, 조선과 북관에서 온 병력 25000명까지 합치면 10만 정도 된다.

명군은 47만이니, 20만 이니 허풍을 떨어지만, 실제 병력이 이 정도이니 기가 막혔다.

당시 후금은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대략 5-6만의 병력을 운영하면 결전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비군 보다 공격자 수가 3배 이상이 되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명나라는자체 병력이 모지라니 조선과 해서여진의 객병들을 끌어다가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명나라 병졸들의 자질 또한 열악했다. 여진기병들은 단체 생활과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정예병들이었다. 이들에 비해 명나라 기병은 그냥 말탄 보병으로 불렸다. 이미 무순 전투에서 경험한

관계로 말탄 보병이 철기의 여진군과 싸우면 개박살되는 것이 상식이 된지 오래다.

명군은 원정을 하기 위해서 각지에서 어중이 떠중이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병졸들은

훈련마저 제대로 시키지 않아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강홍립이 광해군에 올린 장계에서는 당시 조선군이 합류한 유정의 군대에서는 대포가 하나도 없는 것로 되어 있다.

유일한 우세무기인 화력마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명군이 조선군만 믿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와 광해군은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당시 유정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의 유일한 화력이 바로 조선군의 조총수 5000명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군 지휘부가 가장 탐냈던 병력이 바로 조선의 조총수들이었다. 기병이 대부분인

명군이 후금의 철기 기병들과 정면에서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명군에서는

후금의 돌파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화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조선군 조총수들은 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미 요동에서 구원병 요청을 처음 했을때에도 처음 했던 요구가 조총수 7000명을 확보하여

대비하라는 것이었고, 원정군이 강을 건너기 전부터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조총수부터

빨리 들여보내라고 성화였다. 조선 원정군은 우익 남로군 유정 휘하에 편입되지만,

좌익중로군 사령관 두송은 조선 조총수들을 데려갈려고 안달이었다. 결국 조총수 일부가

두송의 부대에 배치되어 최전방에 섰다고 전한다.

원정을 주도할 명군이 수천의 조선 조총수에게 화력을 기대했다는 것은 명군의 한계이며

전쟁에서 패할 처지였다.

명군은 화력이외에도 착용하고 있는 장비에서도 문제점을 노출되었는데, 훗날

여진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 지휘관들의 전사장면이 이것을 증명해주었다.

두송과 반종안은 각각 머리와 등에 적의 화살이 무수히 박혔다는 사실은 명나라 대신

서광계를 경악했다. 지휘관들의 투구와 갑옷이 형편 없다는 점에 충격을 받고, 그 아래의

장졸들의 무장 수준도 ' 더 말을 해 무엇이겠는가!' 라고 한탄했다.

그 뿐만 아니라 각 군의 장수들간의 인화가 이뤄지지 않아 명군은 싸움하기 전부터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당시 명군의 전략을 알아보자.

양호는 두송과 마림 휘하의 북로군과 중로군을 서북의 방향으로부터 누르하치의

수도인 흥경노성을 향해 전진시키고, 이여백은 심양으로부터 흥경노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으며, 유정에게는 조선군을 이끌고 남동의 압록강 방향으로 적을 치도록

했다.

삼면으로 동시에 후금을 협공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이런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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