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심하 전투 (1)

구름위 2012. 10. 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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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유정이 이끄는 우익 남로군에 합류한 조선군은 처음 보는 만주땅이라 행군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명군에 따라 행군하기 시작했다.

공격목표인 흥경노성까지의 행군로는 만만치가 않았다.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 명군에

따라 진군했을때 숙영하면서 지나야 했던 앵아구(2월 24일) 양마전( 2.25일) 배동갈령(2.27일)

우모채 (2월 28일) 마가채( 3월 1일) 심하 ( 3.2- 3.3일) 부차 (3월 4일)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험준한 산과 강이 널려 있었다. 때로는 하늘을 가릴 만큼 나무가 들어찬 밀림을 헤쳐나가야

했다. 배동갈령에 도착한 2월 27일에는 말의 배 부분까지 물이 차오르는 강을 네번이나

건너야 했다.

날씨마저 원정군의 편이 아니였던지 워낙 추위가 심해 2월 25-26일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병사들의 옷과 군장이 모두 젖었다. 갈수록 체력소모가 심해지는데, 군량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병사들의 모습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홍립은 조선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유정에게 연락하여 행군을 늦쳐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유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군이 관망하는 자세가 보일 것이고, 느릿느릿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던지 군기를 잡을 생각으로 유정은 아예 조선군 진영에 명군 장교

두명을 파견하여 감시를 하였다.

유정은 이들에게 조선군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경우 군법으로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감시관 명나라 장교들은 조선군에 대해 의심이 심했다. 걸핏하면 칼을 빼들어 위협했고,

총사령관 강홍립조차도 그렇게 대했다.

강홍립은 힘들게 가는 조선군에게 전진하라는 말밖에 못했다.

광해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라고 당부했지만, 만주로 들어선 이후로 그렇게 쉽게는

되지 않았다.

명군의 대부분은 기병이고, 조선군은 대부분은 보병들이었다. 그러니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꼴이 되니 조선 병사들은 그들이 짐어 지고 가는 물품들을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이 군량이었다. 군량 보급도 재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휴대한 군량마저

버리니 얼마 안 지나 조선군은 체력도 고갈되는 상황에 빠졌다. 몸이 피로하니

전의도 상실했다.

2월 28일에 우모채에 도착한 조선군은 일부 진영에서 군량이 바닥나자, 명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명군은 무시했다. 하는 수 없이 조선군은 여진부락을 약탈해서 양식을 얻어

해결했다. 당시 조선군은 보급부대를 따로 두어 원정군의 보급 지원을 담당했지만,

군량을 싣고 압록강을 건널 배가 부족한데다 원정군의 전진속도가 빨라 따라 잡지 못했다.

전진하던 조선군은 3월 2일날 심하에서 후금군과 조우했다.

당시 조선군을 기습공격을 가한 후금군은 대략 기마병 600명인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수들의 사격으로 이들을 패주시켰다.

이때는 후금이 소수의 병력을 출동시켜 조선군의 전진을 늦추게 하고, 피로를 쌓게 할

목적인것 같았다.

가벼운 승리에 도취할 겨를도 없이 얼마 안 지나 조선군은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는데,

그것을 허기와의 전투라 했다. 이때도 소수의 적군이 출몰하여 진군을 막았는데,

조선군이 위협 사격과 함께 적군 기병대에 돌진을 하자, 적군도 얼마간 싸우다가

퇴각했다. 적을 패주시킨 후에 조선군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인근 부락을 약탈하여

양식을 찾아내 그것로 빻아 가루로 만들고 죽을 끓여 겨우 허기를 채웠다.

군량지원도 받지 못하고, 소유한 군량도 별로 없는 관계로 조선군은 행군 도중에 민간에서

약탈한 식량으로 의존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3월 4일 먼저 전진했던 유정군을 따라가던 조선군은 부차에 도착할 당시에 후금군 3만명의

기습을 받는다. 조심스레 나아가던 조선군이 전방에서 울리는 대포 소리를 들었을 때,

유정 휘하의 명군은 이미 기습을 받고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런 결과가 되었을까?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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