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심하 전투 (3)

구름위 2012. 10. 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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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명군이 기습당한 사실이 인지한 강홍립은 각 진영의 대오를 정돈했다.

자신은 중영을 이끌고 행군로의 좌측 언덕으로 올라가고, 좌영은 그보다 앞서 있던 또 다른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 우영은 남쪽의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 좌영은 벌판에 머물다가

강홍립의 명령으로 진을 옮기는 사이에 후금의 기마대의 기습을 받았다.

강홍립은 우영 소속의 병력을 보내 좌영을 구원케 했다. 조선군의 감시관인 명나라 장교 두명이

명군 진영갔다가 돌아오면서 명군의 전멸 소식을 알렸다. 좌우 두 진영에서 전투태세를 갖출 무렵 조선군 진영으로 역풍이 불면서 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명군의 상황이 조선군에게도 재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그 틈에 후금군의 기마대가 들이닥쳤다. 조선군의 포수들이 총을 일제히 뽐아 내어 후금군 병사들이 쓰러졌다. 갑자기 기습공격을 당한 입장이라 기마대의 전진을 막는 장애물들을 설치하지

않아 적군의 기마대들은 사상자가 생겼어도 빠른 속도로 조선군 진영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바람에 조선군의 특기인 조총수들의 사격이 소용없게 되었고, 순식간에 좌우영 병력들은

거의 함몰되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후금의 철기들을 맞이한 조선 보병들의 저항은 있으나

마나였다.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 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등 지휘관들뿐 만아니라 수천 명의

조선군들이 전사했다. 우영장 이일원은 겨우 몸을 빼서 중영으로 도망쳐왔다.

이렇게 조선군의 두영이 무너졌지만, 어째든 이유인지 후금군은 나머지 중영의 조선군을

공격하지 않했다.

도망 못 가게 포위만 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항복을 하고만다.

그러나 항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견해가 있었다.

[광해군 일기]나 그 당시 출전한 장수 이민환의 저서[ 책중일록]에는 내용이 약간은

틀리지만, 후금이 먼저 역관을 찾고 강화를 맺자고 요청을 해오자, 조선군은 어쩔수 없이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강홍립의 조선군이 먼저 항복을 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째거나 조선군이 패전하고, 그 결과 후금과 항복 논의를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3.4일 밤 항복 논의가 오고가는 과정에서 조선군 진영에서는 적의 포위망을 뚫어보자는

제의가 나왔다. 하지만, 포위를 뚫을 조선군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후금군의 기마대가 추격할 것이고 그러면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조선군 수뇌부들은

무시해 버렸다.

결국 이날 밤 조선군 부사령관 김경서는 화의를 논하면서 후금장수와 같은 방에서 잤다.

예상 밖으로 후금 지휘부들은 조선 장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며 적대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것을 본 조선군은 결국 항복의 결심을 굳혔고 그 다음날 조선군은

정식으로 항복했다.

이때,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백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백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백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

역사학계는 조선군이 후금군과 전투를 벌인 심하전투를 포함하여 당시 조선, 명의 연합군과

후금군이 벌였던 전투 전체를 보통 살리호 전투라고 부른다. 역사학계에서는 보통 이 전투를 명청교체의 분수령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3월 5일 강홍립과 김경서는 후금의 호위속에 흥경노성으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알현했다.

조선군 장수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졸들을 후금군은 분류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윤기나는 사람들은 먼저 뽑아서 이들을 후금군은 모두 죽여버렸다.

양반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을 후금군이 죽여 버린 이유은 유교적인 지식을 쌓은 이들 때문에 나중에 말썽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그런 것같다.

또 건장한 사람들을 뽑아 이들을 자신의 병력으로 충원했고, 나머지는 농작에 종사시킬 요량으로 농장으로 보냈다. 한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그들에게 조선군 포로 수천명은 적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 후금군에 조선군 포로들이 편입했다는 사실은 1624년 모문룡이 이끄는 가도의 명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함경도 지역의 국경까지 진군하여 그 근처에서 후금의 포로를 잡아 심문한

결과 심하전투에서 항복한 조선군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내 밝혀졌다.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걸치면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청국으로 끌려갔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조선인 장정들이 청국의 병력에 편입되 조선인 팔기가 창설된다.

청의 사료에 기록된 조선인 팔기의 명단 인원만해도 3000명이라는 것만 봐도 대단한 수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조선의 조총을 만드는 기술과 조총을 쏘는 인력들이 여진에 흡수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억류된 조선군중에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간 사람은 겨우 1400명 밖에 안되었다.

대부분은 탈영으로 조선땅에 밟은 사람들이고, 중간급 장수들 일부만 송환 형식으로

조선에 돌아갔고, 10명 정도의 상위급 장수들과 장졸들은 그대로 억류되었다.

대략 10% 조선인만 조선 땅에 들어오니 조선에 미칠 파장은 굉장히 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역사학계에서는 심하전투에 출전했던 조선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주로 조선군이

애초부터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 그에 관련된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를 했는지의 사실에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의 사망숫자가 최고 9000명에 가까웠고,대략 5000명이 살아남은 것을

추측한 결과 , 애초부터 미리 항복을 할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어째든 이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이 전투로 인해 명나라, 후금, 조선이 겪을 파장이 더 중요한 것이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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