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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비극적인 삶을 산 강홍립

구름위 2012. 10. 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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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리호 전투로 인해 가장 많은 인생의 변화를 겪은 사람은 강홍립이다.

그가 항복한 뒤로 조선 조야에서는 그의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논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정묘호란까지 그의 가족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놓고보면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애초부터 관망하라고 했던 광해군의 지시가 있었던데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마당에 수천의 조선인들을 그냥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이나 인조에게 올려보냈다. 그가 보낸

정보중에는 심하전투 이후로 광해군이 대명 , 대후금 외교정책에 활용되었다.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이후, 1627년 강홍립은 후금군의 길마잡이로 조선에 들어왔다.

당시 길마잡이로 들어온 사람은 강홍립 외에도 이괄의 난때 죽은 반란군 장수 한명련의

아들 한윤등이 있었다. 강홍립은 조선의 피해를 줄이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에 들어왔지만,

한윤등 이괄의 난때 도망쳐 온 사람들은 조선에 대한 복수심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괄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무장출신이기때문에 조선의 군사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있었다. 조선에 대한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선봉에 서서 전투를 벌였다. 강홍립은 변발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직접 자청해서

변발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활동하면 후금인 행세를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강홍립은 조선과 후금과의 강화 협상을 위해서 직접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임금은 의외로 그를 감싸 주었다.

강홍립은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을 그 곳에서 만났다. 결국 그의 노력이 얼마나 후금과

조선과의 강화협상에 영향력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강화협상은 맺고 만다.

강화를 맺은 후에도 후금군은 철수하면서도 황해도 지역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약탈하자, 강홍립은 후금군 총사령관 아민에게 중지해달라는 부탁을 하는등 전쟁 내내 후금군의 살육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강홍립의 노력은 후에 매국노로 매도되는가 하면서 철저히 잊혀졌다. 뒷날의 후담이지만, 그는 정묘호란 이후 아들을 대신 후금에 보내고 자신은 조선에 남아지만, 이미 쓸모 가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서인들은 그를 매국노로 몰아세우며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조선을 위해서 활동을 했던 강홍립은 요켠대 심하전투로 인해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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