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출병 이후의 조선의 내부 변화. 마지막편.

구름위 2012. 10. 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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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이 심하전투 이후로 외교적으로 성공을 했을 망정,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였다.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서다.

원병을 보낸 이후로, 광해군이 예상한 것과 같이 조선 사회에 심각한 사회경제적 악영향을 끼쳤다.

원정군에 동원된 장정들 중에 10%만 조선에 들어와기 때문에 그 나머지 1만명이 넘은

장정들이 죽거나 억류 당해 조선의 심각한 인력난을 겪게 했다.

그 당시 조선인구 가운데서 1만여명의 장정들이 사라져 버린 후유증은 만만치가 않했다.

특히 평안도를 비록한 서북지방의 사정은 여의치 않아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고을마다

많게는 400-500명, 적게는 100-200명에 이르렀다. 평안도의 각 고을에서는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평안도가 입은 피해는 다른 지방으로 도미노 처럼 퍼져, 평안도의 서부 방어에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병력을 뽑아 평안도로 올려보냈다.

남도 병사들이 북도에서 근무하다보면, 북도 병사들과 풍속, 언어 차이가 나 트러블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서로 다툼이 생겼고, 이 와중에 대규모 탈영, 자살 같은 문제점이 생겼다.

정묘호란 당시에 후금군이 잡은 조선군 포로중에 남도 병사들은 모두 학살했고, 북도 병사들을 후금군에 편입시킨 것도 이 지역적인 감정을 이용한 것이다.

평안도 수령에 시달리고, 북도 병사들과 다툼이 생기니 그 여파는 다시 남도 병사들에 의해서 생긴 민간인 피해로 이어진다.

이런 인력난외에도 조선에서는 심하전투 이후로 여진이 조선을 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다녀,

서북지방과 서울, 경기도 지역은 피난, 탈영, 약탈등의 조짐이 보여 혼란했다.

만주 출병과 후에 그 후금에 대한 방어대책으로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 충청도 , 도성 주변은 그 여파로 화적까지 날뛰었다.

또한 박박 긁어 모아 보낸 병력이 만주에서 죽거나 억류당했을 때, 아버지나 형제를 읽은 고아, 남편을 빼앗긴 과부 등 이산 가족이 속출하여 조선사회는 슬픔의 한 소리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궁궐 밖의 조선 사회는 만주출병 전후하여 그것에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골머리를

앓았지만, 궁궐 안에서의 정치적인 문제도 만만치가 않했다.

광해군은 심하 전투를 계기로 외교에서 목소리가 확실히 커졌다.

" 거 봐라, 나는 이미 애초부터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적들은 40년동안

군대를 길러와 아제 한창 기세가 오르는 판이다. 그런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군대를

호랑이 속으로 밀어넣었으니 전군이 패하여 항복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다."

대충 광해군이 신료들에게 퍼부은 질타는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선경지명에 대한 자신감과 신료들에 대한 냉소의 분위기가 묻어 있었다. 하여튼 광해군은 이 심하 전투 사건 이후로 외교에서 거의 주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광해군은 미묘한 변화를 이끌었다.

위기가 닥쳐오면 인재가 아쉬운 법이다.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구와 후금과의 관계등의

전반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대북파로는

한계이니, 서인과 소북파, 남인 계통의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 非대북파 인물들을 측근으로 기용하여 정치판에 새로운 변화를 꾀기 시작했다.

비대해진 대북파를 견제하는 심리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이때 , 중용된 이귀나 이서, 김류등 서인들이 1년 후 인조반정을 통해서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해왔던 서인들이므로 광해군 정부에서의 중용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킨 꼴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분위기와 함께 산림에 있는 재야 유림 세력들은 심하 전투 이후로

완전히 광해군에게 등을 돌렸다.

자신들의 세계관에 반대되는 일을 한 광해군을 그들은 임금으로 보지 않았다.

폐모 사건과 함께 광해군이 해온 외교적인 정책들이 그들을 조정으로 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었던 것이다. 인조 반정이 성공한 이후 대다수의 양반들이 지지를 벌여 온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 광해군은 심하 전투를 계기로 생긴 외부 변화와 내부 변화중에 전자는 잘 대처했지만,

내부 변화에는 실패하여 결국 몰락하고 만다.

조선군이 파병되어 싸운 심하전투는 우리에게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였다.

이 전투이후의 영향으로 조선은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투 자체만으로 광해군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 영향때문에 광해군은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것이다.

가뜩이나 광해군이 추진했던 궁궐 공사로 인해서 민심은 원망이 심했는데, 심하 전투 이후

경제, 사회적으로 더 피폐해져 인심은 완전히 광해군에게 등을 돌렸다.

재야의 양반들도 광해군이 등극 한 이래로 버려 놓은 국책 사업과 폐모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심하 전투를 계기로 광해군이 주도로 하는 외교 정책에 더욱 반감이

사 이들도 하층민과 같이 조정에 등을 돌렸다.

거기에 심하 전투로 계기로 자신의 외교 행보에 제동을 거는 대북파에 실망한

광해군은 견제하기 시작했고, 서로간의 밀착이 깨지기 시작했다.

당시 광해군은 고립된 상황이었다. 자신의 핵심 세력과 균열이 있었고, 민심과 유림도

떠난 이때에 광해군은 서인들이 이끄는 수백명의 반정군에 의해서 쉽게 무너졌다.

결국 심하 전투로 광해군의 생명이 단축된 것이다.







* 한명기의 저서 [광해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및 기타 여러 인터넷에서 찾아낸 문서를 참고로 하여 이 글을 썼습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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