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 시대의 골프

구름위 2012. 10. 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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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전에 한국여성 구옥희가 일본에서 프로리그의 챔피언이 되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좀 별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에게 골프는 서구의 스포츠이며,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특별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박세리가 1998년 세계 골프계를 제패하고, 그녀의 뒤를 이어 한국의 골퍼들이 차례로 상위랭커로 진입하면서 골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며, 이제는 한국인의 건강과 레저를 위한 스포츠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아직도 한국인들이 골프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조차도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한국인 골프 챔피언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다. 골프는 한민족의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골프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모 백과사전에는 로마시대에 골프와 유사한 파가니카라는 게임이 있었으며, 이것이 로마군에 의해 유럽에 보급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골프와 유사한 게임들은 유럽 각국에서 성행했지만 특히 15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골프는 대단한 인기를 끌어 1457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는 골프 금지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골프의 종주국을 스코틀랜드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골프는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즐기던 게임이었다. 제임스 2세가 골프금지령을 내릴 무렵,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국왕이 지나치게 골프에 빠져 국정을 게을리 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조선(1392-1910)의 2대왕인 정종의 실록에 따르면, 정종 1년(1400) 5월 1일에 신하들이 왕에게 타구(打毬)놀이를 삼갈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타구놀이는 오늘날의 골프놀이와 비슷하다. 당시에는 이를 격방(擊棒), 또는 막대기[棒]을 가지고 하는 놀이라는 뜻으로 봉희(棒戱)라고 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 4대왕인 세종의 실록에는 오늘날의 골프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격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패를 갈라 가지고 승부를 다툰다. 공을 치는 채의 모양은 숟가락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한데,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으며(나무 위에 물소가죽을 입혔음) 두꺼운 대나무를 합쳐 자루를 만들었다. 공은 크기가 계란만한 데, 나무나 마노로 만들었다. 땅을 대접만큼 파서 그것을 와아(窩兒: 구멍)이라고 부르는데, 혹은 전각 너머나 혹은 평지에다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치는 사람은 무릎을 꿇거나 선 채로 공을 치면 공이 뛰어 넘기도 하고, 빗겨 오르기도 하고, 또 빙그르 돌기도 하면서 각각 그 구멍이 있는 장소의 형편을 따라 간다. 공이 구멍에 들어가기만 하면 점수를 얻으나 그 규정은 아주 복잡하다."(세종실록 세종 3년 11월 25일조)

 

머리가 숟가락처럼 생긴 막대기는 골프채를 말한다. 구멍을 전각 너머, 혹은 평지에 설치하고, 공이 빗겨 오르기도 하고, 빙그르 돌기도 하면서 구멍을 향해 날아가며,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한다는 것은 홀의 위치와 코스의 난이도가 다양하고, 따라서 다양한 샷과 퍼트의 방법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당연히 채의 종류도 다양했다.

 

"채의 가죽이 얇으면 구(毬)가 높이 솟고 가죽이 두터우면 구가 높이 솟지 않는다. 또 곤봉(袞棒)이란 것이 있다. 이것으로 치면 구가 구르고 위로 솟지 않는데, 채의 두께와 크기에 따라 명칭이 각기 다르다."(세조실록, 세조 1년 9월 8일조)

 

그러면 당시 골프는 어떻게 한국에서 유행하게 되었는가? 기록에 의하면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13세기와 14세기에 이미 골프를 즐기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옛 왕조인 고려(918-1392)와 몽고족이 세운 중국의 원나라(1271-1368)는 한때 전쟁도 했지만 강화를 맺은 사돈국가였다. 당시 고려의 왕자와 고관의 자제 중에는 원나라에서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도 많았으며, 두 나라간에는 정치,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스포츠분야에 있어서도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은 골프의 당당한 종주국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어쨌거나 15세기에도 조선에서 골프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재미난 것은 이 골프를 즐긴 장소이다. 한국에는 산이 많은 데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그린 같은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국왕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궁 밖으로 자주 출타할 수가 없었다. 게임이나 유흥을 위해 출타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될 소리였다. 그래서 왕들은 궁 안에서 이 스포츠를 즐겨야 했다.

그러면 코스를 어디에다 설치해야 할까? 궁의 뒤쪽에는 한때 사냥터로까지 사용한 넓은 후원과 멋진 숲이 있었다. 그러나 숲과 비탈은 골프를 즐기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후원 마당은 평지이기는 하지만 코스를 다양하게 만들기에는 좁고 너무 평범하다. 넓고 평탄하면서도 다양한 변화와 난이도를 줄 수 있는 곳. 왕들은 사정전과 근정전 주위를 골프장으로 선택하여 주위를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근정전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곳으로 건물 앞에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 주변은 회랑이 둘러 있다.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로 근정전 바로 뒤에 있는데, 근정전의 북쪽 회랑이 두 건물을 구획하는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의 골프장은 홀인을 하기 위해서는 건물이나 담장을 넘어가는 샷을 쳐야 했고, 회랑 기둥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코스도 있었다. 특히 섬돌(마루로 오르는 계단) 위에 설치된 홀에 볼을 넣기 위해서는 절묘한 벙커샷을 날려야 했을 것이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홀까지의 거리는 약 45-75m이었으며, 한번에 10홀 정도의 경기를 했다고 한다. 경기의 규칙은 구를 한번 쳐서 홀에 들어가면 2점을 얻으며, 한번 쳐서 들어가지 못하고 구가 멈춘 곳에서 두 번, 세 번까지 쳐서 들어가면 1점을 얻는다. 공은 서서 치기도 하고 혹은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기술을 사용했다.

 

국왕의 골프 파트너는 주로 종친들이었지만, 재상과 젊은 관리, 경호무사들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게임에는 내기가 따랐고, 궁녀와 악공들이 응원을 했으며, 게임이 끝나면 질펀한 잔치가 벌어졌다. 세조왕의 공신이었던 한명회, 홍달손, 홍윤성은 세조가 배석하는 골프대회마다 상금을 휩쓴 이름난 골퍼들이었다.

 

실록에는 국왕이 벌인 골프시합만을 기술했으므로 골프가 왕실에서만 향유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국왕의 골프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연습을 해야 했으므로 종친과 관료들도 제각기 자신들의 저택에 골프장을 차렸으며, 골프는 민간으로도 널리 퍼져갔다. 태종실록에는 동네 아이들이 다리 위에서 골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아이들은 자기 공에 왕과 왕자들의 이름을 붙여 치고 놀다가 국왕 모독죄로 체포되었는데, 왕은 관료들을 꾸짖고 이 겁없는 아이들을 방면시켰다.

 

마당에서 치는 골프는 늘 요란한 사고를 동반했을 것이다. 전각을 넘어 날아가는 장쾌한 드라이브 샷을 보여주려면 꽤 많은 기와나 장독을 깨트려야 했다. 기둥이나 서까래를 맞고 튄 공이나 창문을 뚫고 들어간 공이 피해를 유발했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왁자지껄한 사고도 사고지만, 의식있는 신하의 눈에는 왕과 재상이 한 무리의 어린아이처럼 신을 신은 채로 마루와 계단 위로 올랐다 내렸다 하며, 창문에 구멍을 뚫어 놓고, 대문을 맞고 튄 공을 찾아 건물 주변과 배수로를 뒤지며, 근엄해야할 근정전 회랑의 기둥과 품계석을 공을 맞추는 표적이나 푯대로 사용하는 모습이 결코 보암직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16세기 이후로 골프는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다. 신하들의 반대도 반대지만 아마도 안전한 골프장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정이 골프를 쇠퇴시킨 제일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의 실록은 매우 부실한데다가 후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가능한 한 기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아이들의 놀이나 민간 스포츠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기록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타구 놀이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확신하기는 곤란하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의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20세기에 들어 골프의 대중화가 진행되고 있고, 한국의 골퍼가 세계대회를 석권하면서 한국 골프의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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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역사여행-역사 에세이...에서 퍼온 글입니다.

얼마 전부터 위에 주소창이 안떠서 링크가 안되는군요-_-;; 링크는 주소창이 복구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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