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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전투 <4> 조선군 최후의 날

구름위 2013. 7. 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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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전투 <4> 조선군 최후의 날


1619년 3월4일 오전 와르카시 숲 일대에서 유정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가 처절하게 학살당하고 있을 때 조선군은 그보다 후방에서 여전히 행군 중이었다. 새벽부터 기동을 시작한 명군과는 달리 조선군은 진시(오전 8시)에서야 행군을 시작했다. 명군이 훨씬 앞에 가고, 그 뒤를 조선군 좌영, 중영, 우영이 뒤따르는 행군대형이었다.

원수 강홍립은 이 때부터 이미 만주족의 복병을 우려했다. 길은 평지인데, 평지 옆으로 산과 계곡이 이어져서 적들이 매복 공격을 하기에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은 기병 위주로 전투를 수행했지만 철저하게 평지 위주로 전투하는 대부분의 유목민족과 달리 산악전투에 아주 능숙했다. 말을 타고도 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자유롭게 기동하고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과감하게 하마(下馬) 공격도 주저하지 않아, 만주족 기병에게 산은 기동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산과 평야가 연결된 지역은 매복 공격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조선측 기록에서 부차(富車), 중국측 자료에 부찰(富察)로도 나오는 이 후챠 들판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졸본, 현재의 중국의 환인현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201번 성급 도로가 통과하는 좌우의 좁은 평야지대를 의미한다. 그 길이는 10~15km 내외, 폭은 좁으면 1km, 넓으면 2km 정도였다. 옆으로 뻗어가는 계곡과 합류하는 지점이라고해도 최대 4km의 폭일 뿐이어서 산 사이에 좁고 긴 평지가 있는 정도였다. 우리나라 노원-의정부나 포천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회랑지형(Corridor)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지도에서 노란색 점선으로 표시된 곳이 후챠 들판이다. 북쪽과 남쪽의 산악지형이 횡격실로 분할한 공간 사이로 폭 1~4km의 좁은 평지가 이어진다. 일종의 회랑(Corridor) 지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곳에서 조선군과 만주족 후금의 기병이 격돌했다.<출처 구글맵+직접 그림>



■ 조선군이 포진한 곳의 지형
전투 경과를 분석하기에 앞서 일단 지형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일부 연구자들이 현장 답사 후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할만큼 현장 지형 확인이 진전된 상황은 아니다. 아쉽기하지만 일단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길이가 대략 10~15km의 회랑형 지형을 전제한 다음 각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하나의 가상적인 지형을 재구성해보자.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따르면 최초 강홍립은 좌영에게 높은 봉우리(고봉)에 진을 치라고 명령했지만, 평지에 진을 쳤다. 이 높은 봉우리는 뒤이은 설명에서 높은 언덕(高阜)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능선이 이어지는 산이 아니라 일종의 독립고지내지 말그대로 언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록>에서는 좌영장 김응하가 우영장에게 강변 위(岸上)로 이동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좌영 앞의 언덕 혹은 봉우리는 강변(부사하의 옆)에 위치한 언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 1000보(1200m) 후방에 중영과 원수/부원수 표하군이 언덕(阜) 위에 진을 쳤다. 이 언덕은 길 왼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므로 당시 조선군이 야지가 아니라 길을 따라 행군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의 현재 도로는 모두 부사하 강변의 북동쪽에 있으므로 당시 조선군도 강변의 북동쪽을 따라 행군하고 있었을 가능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

이 언덕에 실제로 올라가 본 명나라 참전자 출신 귀화인 강세작은 이 곳의 지형에 대해 산 위(山上)라고 표현하고 있다. 언덕이라고는하지만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지형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만주족 측의 사료인 <구만주당>은 조선군 원수가 위치했던 진영이 "솔호 봉우리(solho hadai)에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결국 고려봉(高麗峰)이라는 뜻이다. 만주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이 많으므로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일 수도 있고, 이 때 조선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훗날 고려봉이라는 지명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원수/부원수 표하군과 중영이 포진한 곳은 지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주변 지역과 뚜렷히 구별되는 지형이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황청개국방략>은 조선군 원수가 포진했던 곳의 지명이 고랍고애(固拉固崖)라고 기록하고 있다. 애(崖)는 언덕 중에서도 다소 급경사를 가진 지형이거나 벼랑, 낭떠러지 같은 느낌의 단어다. 중영이 포진한 곳이 어느 정도 높이가 있으면서도, 경사도가 상당한 곳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중영 바로 앞에는 또다른 높은 언덕(高阜)이 있었다. 이 언덕에서 중영이 위치한 곳을 감제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중영이 위치한 언덕과 거의 비슷한 높이의 언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영 진영 앞의 언덕 때문에 좌영이 위치한 곳을 관측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 중영 진영 앞의 언덕은 중영과 좌영 사이가 아니라 다른 각도에 위치했을 것이다. 우영은 단순히 뒤가 아니라 남변(南邊)이라고 했으므로 행군 경로상 직후방이라기보다는 방향으로 따져 중영의 남쪽에 진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우영 역시 평지가 아니라 언덕(阜)이었다


 
조선측 기록으로 재구성해 본 후챠전투 가상 상황도. 실제의 세밀한 지형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료를 토대로 가상적으로 재구성한 배치도다. 예를 들어 중영 앞의 언덕은 실제로는 도로 건너편이 아니라 7시 방향 등 좌영 방향의 시야를 막지 않는 또다른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다. <출처 직접 그림>



■ 조선군과 만주족의 전투 참가 병력
조선군과 만주족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이미 분석해 봤지만,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만 다시 한번 간략히 살펴보자. 후챠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숫자는 원래 압록강을 건넜던 1만3000명에서 수백명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날 행군 시작에 앞서 원수 강홍립은 종사관 이정남에게 후방에서 따라오고 있을 아군 군량미 수송부대를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전 날인 3일에는 별장 유태첨에게 기병 300명을 주면서 같은 임무를 부여했지만 후방에서 작전 중인 만주족 기병들과 마주쳤을 뿐, 아군 보급부대를 찾는데는 실패했었다. 4일에도 300명을 주었다면 그 병력만큼은 후챠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셈이 되는 것이다.

수족과 같은 종사관에게 보급부대를 찾으라는 임무를 다시 맡긴 것은 그만큼 식량 부족 문제가 절박했다는 의미다. 이에 앞서 2월27일 임시 숙영지에서도 운반하기 힘든 무거운 무기와 장비를 남겨두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일부 경비 병력을 잔류시킨 상태였다. 당시 숙영지를 만들기 위해 투입된 병력은 보병 600명이었는데 이중 최소 100명 이상은 숙영지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보급부대 수색병력과 후방 숙영지 경비병력 등 최소 400명 정도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다.

김응하가 지휘한 좌영은 3480명, 이일원이 지휘한 우영은 3370명이었는데 이들이 바로 후챠전투에서 적과 격돌한 주력이다. 원수 표하군은 원래 740명이었지만 이들중 상당수가 보급부대를 찾기 위해 후방에서 수색중이었으므로 원수 표하군은 단독작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부원수의 표하군 1810명과 중영 3350명이 전투지역 후방 고랍고애 언덕에 주둔한 상태였으니 전투에 직접 참가한 좌우영 병력은 6850명, 고랍고애에서 전투를 지켜 본 중영과 기타 표하군 병력은 5000여 명 수준이 된다.

만주족 병력은 암바 바일러 다이샨과 홍타치 바일러의 참전은 분명하다. 여기에 앞서 유정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아민 바일러와 다르한히야도 조선군과의 전투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체 병력은 3만명에 조금 못미치는 2만8000여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동쪽에서 진격해 오는 명군과의 격전을 치른 후 헤투알라성 남쪽으로 긴급하게 전환배치된 병력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책중일록>에 따른 전투 경과
이날 조선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민환의 <책중일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민환은 원수의 종사관으로 당일 전투를 실제로 목격한 인물이다. 전투 직후에는 명군에게 포로로 잡혀 포로 생활을 하면서 만주족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목격한 후 1620년 귀국했다. 다시 말해 후챠전투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목격자 중의 한 명이다. 이 때문에 와르카시-아부달리 안덕-후차전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일본 학계는 물론이고, 명청교체기를 연구하는 중국학계에서도 <책중일록>의 사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한다. 중국학계에서도 랴오닝대학에서 청초사료총간을 펴내면서 <책중일록>을 제8권으로 출간할 일이 있을 정도다. 국내학계는 말할 것도 없다.

진시(아침 8시 전후)에 행군을 시작했다. 명나라 장수가 앞장서고 아군 좌영, 중영, 우영이 차례로 전진했다. 길이 평탄하고, 산과 계곡이 이어져 매복이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원수 강홍립이) 각 영의 병사들에게 명령하기를 거마작(對기병 방어용 장애물)을 들고가게 했다.

수십 리를 가서 부차(富車)에 도착하니, 오랑캐의 성(奴城)에서 60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포 소리가 세 번 연속으로 이어졌다. 원수가 말을 달려 길 왼쪽의 높은 언덕으로 올랐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연기와 먼지가 하늘에 가득 찼다. 적의 징조가 분명하므로 좌영에게 즉시 명령을 내려 앞쪽의 높은 봉우리(高峰)에 진 치게 하고, 중영은 원수 (강홍립) 올라갔던 언덕(埠)에 진 치게 하며, 우영은 남쪽(南邊)의 한 언덕(阜)에 진 치게 했다.

중영과 우영은 즉시 진을 쳤으나, 좌영은 평평한 들판(平原)에 진을 쳤다. 원수 (강홍립)이 별장 박난영에게 명령을 내려 좌영에게 높은 언덕(高阜)으로 진을 옮기라고 전했다. 그 때 적이 이미 진 앞에 다가와 형세가 이동하기 어려웠다. 그 때 근처에 100여가의 (오랑캐) 부락이 있는데 명나라 군대가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진 위를 뒤덮었다.

중영 앞에도 높은 언덕이 있어, 진중을 감시할 수 있었으므로, 원수가 (부원수 표하군 소속의) 별장 황덕창에게 명령을 내려 그 병력(별무사와 신출신)과 중영 당보 1사로 하여금, 그 봉우리를 거점삼아 주둔하게 했다. 적병이 그 봉우리에 다가오기 이전에 황덕창이 스스로 물러나 달려와 진영 안으로 왔다. 몰래 요사스러운 말로 군사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원수가 노하여 군율로서 멈추게 하려 했는데 이 때 갑자기 (명나라의) 진 상공, 우 수비, 교 유격이 홀로 말을 타고 도착했다. 전하기를 명나라 군대가 모두 죽었고, (명나라 유정) 제독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제 (명나라 유정) 제독이 명령을 내려 전진로를 정탐하게 했더니 오늘 새벽에 보고하기를 가합령 밖에는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장수가 급히 말을 달려 수십 리를 앞서가며 부대를 나눠 부락을 약탈하는데 대오를 갖추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귀영가가 3만여 명의 기병을 지휘해 서쪽 길로부터 밤에 급히 달려왔다. 새벽에 가합령을 통과해 산의 계곡에 은밀하게 매복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앞뒤를 충돌하고 차단했다. 명나라의 여러 진들이 미처 조치를 취하지도 못하고 거의 죽었다.

(명나라의) 우 수비, 진 상공 두 사람은 말을 달려 가버렸는데, 교 유격이 말하기를 "나는 귀국 군대의 감군이니 갈수도 없다"고 하니, 원수가 활과 화살과 도검을 주고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연기와 먼지 사이로 바라보니 적 기병이 대대적으로 도착해 양 날개(양익)를 벌리며 먼 곳에서 포위하고 둘러싸고 있었다. 좌영의 군관 조득렴이 달려와 급하게 보고했다. 원수 (강홍립이) 그 고독하고 위태로움을 염려하여 즉시 우영으로 하여금 구원하게하고, 급하게 전진을 독촉했다.

좌영과 함께 진을 합쳐(연진) 막 열을 완성(성렬)하려는 순간, 적 기병이 일제히 돌격해 그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방 쏜후 다시 장전하기도 전에 적이 이미 진중으로 들어왔다. 원수 (강홍립에게) 말하기를 “병력을 합쳐 힘써 싸우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으나 순식간에 두 영이 모두 뒤집어 졌다.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 우영천총 김효경과 오직, 좌영 천총 김좌룡이 모두 적에게 죽었다. 좌영천총 신충업만 탈출해 달려 나왔다.

중영으로부터 거리가 불과 1000보 정도였음에도 너무나 순식간이라 구원할 틈이 없었다. 석양 아래 쏘는 화살이 비와 같고, 철마들이 오고가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좌영장 김응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했다. 우영장 순천군수 이일원은 진중에서 탈출해 중영으로 달려 왔다. 원수가 즉각 명령을 내려 남쪽 구석을 지켜 공을 세움으로써 죄를 씻도록 했다. 적 기병들이 달려와 중영을 포위 압박하는 자들이 산과 들판에 가득했으니 무려 3만 명이나 되었다.

원수 문종사관 이민환, <책중일록>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따라 전투 상황을 재구성하면 그 핵심은 이렇게 된다. 우선 만주족 기병과 갑자기 조우전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좌영은 지휘부의 의도와 다르게 평지에 진을 쳤음을 알 수 있다. 좌영에게 전방의 언덕으로 이동하라고 재차 지시를 했을 때는 이미 만주족 기병이 출현했고, 이 때문에 보병으로서는 불리한 평지에서 전투를 치르게 된 것이다.

강홍립은 막상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좌영의 구원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고 우영을 전진배치한다. 우영은 처음 위치했던 언덕 위에 포진했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겠지만 좌영을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했고, 그 결과는 두 부대의 동시 전멸이었다. 결정적인 전투 순간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좌우영 병사들 중 절반 정도가 화약무기를 운용하는 포수였고, 포수들의 주력무기는 대부분 조총이었지만, 조총의 느린 장전 속도 때문에 1차 사격 이후 재장전을 시도조차 못한 상황에서 기병의 돌격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책중일록>의 전투 경과를 시간순으로 재배열하면 아래와 같다. 일단 <책중일록>을 기초로 같은 단계에서 다른 설명을하는 사료가 있을 경우 원문자에 추가해서 -1,-2 순서로 재배열을 하겠다. 이처럼 시간 순서로 분해해 볼 경우 각 사료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진위까지도 보다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 ① 적 매복 우려, 대기병용 거마목 사용 준비
  • ② 부차(후챠) 도착. 대포 소리에 원수 길 왼쪽의 언덕에 올라 전방 주시
  • ③ 돌풍 발생. 연기와 먼지 퍼짐. 적 징조로 판단
  • ④ 적 징조로 판단하고 3영에게 진영을 형성하도록 지시
  • ⑤ 중영과 우영은 언덕 위에 포진. 좌영은 평지에 포진
  • ⑥ 좌영에게 언덕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으나 만주족 기병 출현
  • ⑦ 만주족 부락의 화재 연기가 아군 진영 상공으로 확산
  • ⑧ 별장 황덕창 중영 앞의 또다른 언덕에 포진했다 후퇴
  • ⑨ 명나라 유격 교일기 조선군 원수 진영 안으로 후퇴
  • ⑩ 만주족 기병 대병력 원거리에 양익 포위 기동 시작
  • ⑪ 좌영 구원 요청, 후방의 우영 좌영 구원하기 위해 기동
  • ⑫ 좌우영 연진 완성 순간, 만주족 기병 돌격 시작
  • ⑬ 좌우영 1차 사격후 전멸. 적 병력은 3만.



■ 원수 강홍립 밀계에 따른 전투 경과
이것으로 전투의 흐름은 파악 가능하지만, 다른 사료를 통해 교차 검증을 해보자. 우선 전체 작전을 지휘했던 강홍립이 만주족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조정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일) 진시(아침 8시 전후)에 (명나라) 교 유격장, 강 부총관, 조 참장이 앞서 가고 도독 (유정)이 그 다음에, 장 도사가 그 다음에 따라갔다. 아군 좌영이 그 뒤를 이어가고, 중영, 우영도 연속해서 출발했다. 그 길을 보니 평탄하고 산과 계곡이 이어져 반드시 오랑캐 병사의 매복이 있으리라여겨, 3영이 각자 거마작을 들고 전진하도록 했다. 겨우 20리에 가서 부차(富車)의 땅에 이르렀는데, "적이 왔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좌영은 즉각 길 위에 영을 늘어서고, 신(강홍립)과 중영은 산에 올라(등산) 진영을 설치했다. (좌영과 중영의) 상호 거리는 1000보 정도였다. 오랑캐 기병(胡騎) 500여기가 충돌해 오자, 좌영에서 잇달아 대포를 쏘니(連放大砲), 적은 잠시 물러났다. (명나라 유정) 도독 표하의 상공과 교 유격장이 홀로 말을 달려 도착해 왔는데, "당군(명군을 지칭)이 모두 전멸했고 (유정) 도독 또한 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랑캐 기병이 연속해서 나오는데 약 수만여 기가 일제히 충돌하니, 몇번 사격(방포)한 후에 오랑캐가 이미 진중에 들어왔다. 좌우를 서로 죽이니 갑작스럽게 양영(좌영과 우영)이 모두 전멸했다. 좌영장 선천군수 김응하, 천총 영유현령 이유, 우영천총 운산군수 이계종 모두 피살당했다. 우영장 순천군수 이일원은 몸을 빼내 중영으로 달려 왔다. 이내 오랑캐 기병이 달려와 중영을 포위하고 압박했다.

원수 강홍립 4월4일자 밀계, <속잡록>


전투 이후 약 한 달 뒤에 조선 조정에 전해진 이 보고는 이민환의 <책중일록>과 대조해서 두 곳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단 한 차례의 공격만으로 전투가 끝난 것으로 보고한 이민환과 달리 강홍립은 만주족 기병 500명이 동원된 1차 공격과 수만 명 이상이 동원된 2차 공격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차이점은 이민환은 한번 사격후 재장전하기 이전에 만주족 기병이 돌격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강홍립은 두 차례의 전투 모두 연속사격을 의미하는 연방(連放)이나, 방포수차(放砲數次)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사실 이 대목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수천명의 포수가 동시 일제 사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개별 포수가 1차 사격만한다해도 전체 진영에는 연방, 방포수차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본질적인 차이점은 전면 공격 이전에 소규모 공격이 한차례 더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사건의 시간 순서나 전체적인 흐름은 이민환의 증언과 강홍립의 보고가 일치하고 있다.


  • ① 적 매복 우려, 대기병용 거마목 사용 준비
  • ②-1 부차(후챠) 도착. 적 출현 보고.
  • ③ -
  • ④ -
  • ⑤ 중영과 좌영은 언덕 위에 포진. 좌영은 평지에 포진
  • ⑥-1 만주족 기병 500명 공격.
  • ⑥-2 좌영 연속 사격 (연방대포)
  • ⑦-
  • ⑧-
  • ⑨ 명나라 유격 교일기 조선군 원수 진영 안으로 후퇴
  • ⑩ 만주족 기병 수만 출현
  • ⑪-
  • ⑫-1 양영(우영이 좌영방향으로 이동했음을 의미)
  • ⑬-1 좌우영 수차 사격(방포수차)후 전멸



■ 광해군일기 1619년 3월12일자에 따른 전투 경과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갑자기 (적과)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평안감사 박엽의 장계 <광해군일기> 1619년 3월12일자


일단 실록도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일기>에는 3월12일자로 평안감사 박엽의 보고가 실려 있다. <광해군일기>에는 평안감사의 장계가 단 1건만 수록되어 있어 평안감사의 장계가 3건이 기록된 <속잡록>에 비해 전반적으로 기록 내용이 부실하다. 조선 후기의 경우 이런 성격의 사건이라면 실록보다는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의 사료적 가치가 더 높다. 하지만 1619년 분의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비변사등록>도 남아있지 않다. <속잡록>과 <충렬록> 등과 비교해 보면 <광해군일기>에 수록된 장계가 과연 3월12일 기준의 보고가 맞는지 의문도 든다. 당연히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장계의 수록 경위 등에 대한 좀 더 냉정한 사료 비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실록을 검토하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보고 경위에 대한 문제는 후속하는 연재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일단 내용부터 살펴보자.

우선 <광해군일기>는 후챠 들판에서 교일기가 패배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른 기록과 차이가 크다. 유정의 전투 장소도 명시하지 않았으나 전체 문맥상 후챠들판에서 교전이 벌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설명해 놓았다. 하지만 <구만주당> 등 만주족 측 사료는 물론이고, 조선측의 다른 사료와 비교해 볼 때 이 같은 설명은 오류가 명백하다.

명군과 관련된 기록을 제외해 놓고 본다고해도 <광해군일기>는 <책중일록>과 비교해서 역시 두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첫째는 만주족 기병의 돌격이 2차례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해 놓은 점이고, 둘째는 만주족 기병의 2차 돌격 이전에 돌풍이 불어 화약이 날아갈 정도의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졌다고 명시한 점도 눈에 띈다.

<속잡록>에 실린 강홍립의 밀계에서도 만주족 기병의 공격이 두 차례 있었다고 명시했으므로, <광해군일기>의 2차 돌격설은 일단 큰 틀에서는 사실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강홍립 밀계에서는 1차 돌격은 500명 기병의 공격, 2차 돌격은 수만 명 기병의 공격으로 병력 규모를 구분한데 비해 <광해군일기>에 실린 평안감사 박엽의 장계는 1차 돌격 때의 병력 규모에 대해 명시하지 않은 점이 차이점이다. 다만 문맥상 그 앞구절에서 대병(大兵)이란 표현을 써서 이미 이 때부터 대규모 공격이 있었던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1차 공격은 대규모 전면 공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만주당> 등 만주족측 사료를 보면 주된 공격은 단 1차례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 만주족 측의 사료는 "공격이 1차례만 있었다"는 이민환의 <책중일록>이나 "1차 공격은 소규모 공격이었다"는 강홍립 밀계와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만측 사료를 종합해 보면 공격이 두 차례 있었지만, 1차 공격은 소규모 공격이고 2차 공격이 주공격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둘째 만주족 기병의 2차 돌격 이전에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 있었다는 <광해군일기>의 기록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로 보인다. 이처럼 돌격 순간에 불었던 돌풍에 대한 언급은 <구만주당>에서 직접적으로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 먼지, 연기 등에 대한 언급은 이민환의 <책중일록>에도 보이는데, 전투와의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에 비해 <광해군일기>에 실린 평안감사 박엽의 장계는 2차 돌격 직전 큰 바람이 불었고 그 때문에 화약이 날아갈 정도여서 사격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이민환은 좌우영 진영 안에서 전투를 근거리에 목격한 것이 아니라 1000보(1200m) 이상 떨어진 중영에서 전투를 목격했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흙먼지 속에서 만주족 기병이 돌격하고 조선군이 붕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긴했지만 "좌영 포수들이 바람 때문에 장전이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판단하기는 다소 어려운 원거리에서 전투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이민환의 목격담이 가치는 가치가 제한될 수도 있다.

다만 이 문제는 "양 사료 중 어느 것이 정확하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바람이 전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민환이 전투 이후 장창을 활용한 송나라 오린의 첩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장창을 보유하지 않은 보병의 대기병방어 능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총의 장전 속도까지 굳이 언급하면서 "극히 느리고 둔하다"고 언급하고 "한 번 쏘고 재장전하기 전에 적 기병이 돌격해 왔다"는 설명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이민환은 조총의 느린 장전 속도가 대기병 방어전에서 중요한 약점이라고 확신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민환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직 바람 탓으로 패전의 원인을 돌리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음에 틀림 없다.

동시기 세계 군사사의 흐름을 보자면 이같은 이민환의 판단은 오류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조선군 뿐만 아니라 동시기 군대라면 모두 비슷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만주족 기병이 돌격 타이밍을 선택하는데 돌풍이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총의 연속 사격 능력 제한과 조선군 살수의 장창 운용술 미흡 때문에 근본적으로 만주족 기병을 방어하기에는 내재적 한계가 있었다는 보는 것이 보다 사실과 가깝다고 보인다.


  • ①-
  • ②-1 부차(후챠) 도착. 교일기 부차에서 패배.
  • ③ -
  • ④ -
  • ⑤-1 유정 패배. 후속하던 좌영은 들판(野)에 포진
  • ⑥-1 만주족 대병력 출현.
  • ⑥-2 좌영 일제 사격 (일제방환)
  • ⑥-3 만주족 기병 중 사망자 다수. 다시 진입하다 후퇴
  • ⑦-1 돌풍(서북풍) 발생. 먼지 비산. 화약 날아감. 사격 불능
  • ⑧-
  • ⑨-
  • ⑩-
  • ⑫-
  • ⑪-
  • ⑫-
  • ⑬-만주족 일제 돌격. 좌영 전멸.




■ 만주족측 기록에 따른 전투 경과
이제 상대편인 만주족측 기록을 살펴보자. 만주족의 입장에서 쓴 사료는 <구만주당>을 포함한 <만문노당> 계열의 사료, <황청개국방략>, <흠정종실왕공공적표전>,<만주원류고>, <성경통지> 등 여러 건이 남아있지만 대부분 내용이 유사하다. 만주어로 된 사료는 기본적으로 <구만주당>으로 소급되고, 한문 자료는 기본적으로 <황청개국방략>과 큰 차이점이 없다. <만주실록>의 경우 그림 자료는 인상적이지만 전투 경과에 대한 설명 자료는 따로 논할만큼 구체적이지 않다.


이때 니칸 보병들은 가지가 있는 대나무 창을 들고, 'moi 갑옷'과 'mangga ihaci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솔호의 보병들은 'hoosan i olbo'를 입고 있었다. 니칸과 솔호의 2만 보병들은 후차 남쪽 벌판에 있었는데 포와 조총을 층층이 늘어두고 있었다. 자꾸 자꾸 쏴서 진입할 생각을 못했는데, 니칸 보병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이 니칸 보병쪽으로 불어왔다. 연기를 내며 포와 조총을 쏘던 병사들이 먼지 속에서 딛고 일어났다. 바람과 재와 먼지가 모두 니칸 사람을 향해 불어와 완전히 어두컴컴해졌다. 연기와 먼지로 어두컴컴했을 때 니칸 보병들을 베고 (활을) 쏘아 죽였다. 연기와 재와 먼지가 사라졌을 때 그들 병사를 죽이는 일도 끝났다. 그 벌판에서 순식간에 2만의 보병을 모두 죽였다. 거기서 또 보니 후기얀 메이팬의 솔호 봉우리 위에 솔호의 병사들이 하나의 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때 다시 병력을 정비해 다시 공격하러 갔다. 산 위에 주둔하고 있는 솔호의 병사들은 산 아래의 보병들이 죽는 것을 봐서, 그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

만주족 청나라의 <구만주당>의 원문 만주어/만문기록의 로마자 전사



(만주족의) 사패륵이 승세를 타고 유정 후대를 추격했다. (명나라) 양영 병사들은 창졸지간에 진을 이루지 못했다. 사패륵이 병력을 종대로 격렬하게 돌격해 양영의 만 명을 섬멸했다. (명나라의) 유정도 전사했다. 이때 명나라의 해개도와 강응건의 보병이 조선병과 합쳐 부찰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했다. 그 병사들은 낭선 장창을 들고, 등갑과 피갑을 입었으며, 조선은 지갑을 입었고, 그 투구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었는데, 화약무기를 층층이 별려 놓았다. 사패륵이 이미 유정병력을 격파한 후 주방군과 여러 패륵이 모두 도독의 군대를 추격했다. (명나라의) 강응건이 인솔하는 명나라병력과 조선병이 경쟁적으로 화약무기를 쏘는데 홀연히 큰 바람이 불어 돌이 날고 연기와 먼지가 날렸다. 적의 진영이 어두워져 아군이 기세를 타고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며 대파해 그 2만명을 섬멸했다. 응건은 도주했다. 이보다 앞서 이패륵 아민과 호이한이 앞서 행군하는 명나라 유격 교일기의 병력을 만나 패배시켰다. 일기가 남은 병사를 수습해 조선 도원수 강공렬(강홍렬)의 진영으로 도망갔다. 이 때 공렬은 고랍고 절벽에 있었는데, (만주족의) 여러 패륵들이 다시 병력을 정돈한 후 일기를 추격해 조선 진영을 공격했다.

<황청개국방략>, <흠정종실왕공공적표전> <만주원류고> <성경통지>


이상의 사료를 비교해 볼 때 <황청개국방략> 계열의 사료는 <구만주당>에 비해 내용이 소략해서 굳이 따로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구만주당>을 보면 일단 이민환의 <책중일록>과 세가지 점에서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첫째는 조선군과 만주족의 대결이라고 묘사한 <책중일록>과 달리 <구만주당>은 이 전투에 명군 보병(nikan yafahan cooha)도 첨전했다는 점을 명시한 점이 다르다. 하지만 조선측 사료에 후챠 전투에 명군이 조선군과 같은 진영과 위치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와르카시 숲 일대의 전투에 참전했다 탈출한 명나라 강세작의 후챠 전투 목격담도 조선측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구만주당>쪽의 설명이 오류라는 점은 이미 설명했었다.

둘째 주공격이 있기 이전에 만주족 기병이 돌격 시도를 했으나 조선측이 자꾸 연속사격을 가했다(boo miocan emu dubei sindaci)고 기록한 것도 <책중일록>과 다르다. 이 때문에 만주족이 돌격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한 것도 차이점이다. 다만 이 기록은 <책중일록>에 나오는 이민환의 증언과 <속잡록>에 기록된 강홍립 밀계, 그리고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평안감사 박엽 장계의 차이점을 해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구만주당>을 보면 주공격보다 앞서서 1차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때 조선군이 사격을 해서 만주족이 돌파를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구만주당>은 조선군의 연속사격 때문에 아예 돌격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쪽에 가까운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는 이민환의 <책중일록>에서 아예 1차 공격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해명해 준다. 애당초 만주족의 1차 공격의 경우 조선군의 격렬한 사격 때문에 진영을 돌파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돌격이 아니고 탐색전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 같은 상황은 강홍립이 묘사한 것처럼 500명의 소규묘 기병을 동원한 1차 공격이 있었다는 설명과도 근본적으로 모순되지도 않는다. 탐색전을 벌이는 상황을 1차 공격으로 간주하는 것도 충분히 있음직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셋째 만주족 기병의 전면 돌격 상황 직전에 돌풍이 불었다고 기록한 점도 <책중일록>과 다르다. 이점은 이미 설명한 것처럼 <광해군일기>와 <구만주당>쪽의 기록처럼 돌풍이 실제로 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 이민환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에 설명했다. 이민환은 조총의 연속 사격 능력 제한과 조선군 살수의 장창 운용술 미흡 때문에 근본적으로 만주족 기병을 방어하기에는 내재적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우선했기 때문에 돌풍을 부각시키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다. 돌풍 때문에 만주족 기병이 돌격 타이밍을 포착하기는 했고, 그 때문에 좀 더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지만, 돌풍 때문에 만주족 기병의 돌격이 성공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도 이미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최종돌격이 순식간에 끝났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돌풍으로 먼지 바람이 불 때 공격을 개시한 만주족 기병은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조선군 좌우영을 전멸시켰다. 좌우영을 전멸시키는 것은 잠깐(magige andande)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 ①-
  • ②-
  • ③-
  • ④-
  • ⑤-1 후챠 벌판에 주둔한 솔호군 발견
  • ⑥-1 의이 보병 연속 사격. 만주족 공격 유보
  • ⑦-1 솔호 보병 방향으로 돌풍 발생. 솔호 보병 일어남
  • ⑧-
  • ⑨-
  • ⑩-
  • ⑪-
  • ⑫-1 돌풍에 따른 연기, 재, 먼지의 어둠 속에서 돌격.
  • ⑬-1 순식간에 솔호 보병 전멸시킴



■ 이장배 증언의 사실 여부
사르후전역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인 후챠전투에서 진정 얻어야할 교훈은 부대 단위의 조총 운용술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보병의 대기병 방어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근본적 대책(이를테면 장창병 운용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점에 대해 이민환은 조총의 발사 속도가 느리므로 성곽 전투에서나 운용할 수 있고, 야전에서는 강궁을 활용하되, 사거리가 짧거나 관통력이 약하면 소용이 없으므로 120보 이상 거리에서 갑옷의 미늘을 뚫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또 송나라 오린의 사례를 들어 장창 보병이 전방에 서고 그 후방에 강궁병과 쇠뇌병이 연속사격을 가하는 모델 등이 여진족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전술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리액션은 다소 방향이 달랐다.

좌우영의 패전 직후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은 만주족의 후금에 항복을 해버렸다. 명나라가 아직 완전히 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군 도원수가 만주족의 후금에게 항복한 것은 외교문제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제정치적 사건이었다. 당연히 조선은 항복한 강홍립대신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 순국영웅을 탄생시킬 필요가 있었다. 후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좌영에서 처절하게 전사한 김응하였다. 조선의 대응은 신속했다. 영의정까지 나서서 김응하를 찬양하는 <충렬록>을 급하게 편집, 출간했다. 국왕인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이 통과하는 길목에 김응하의 사당을 세우라"는 기민한 조치도 취했다.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탄생한 김응하 추모 열기는 광해군이 쿠테타로 밀려나고, 인조가 집권한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격렬해졌다. 인조 정권은 명분론적인 숭명외교에 좀 더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응하는 명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후챠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상징이자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국가적 추모 열기는 사료 조작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김응하 관련 사료에 대해서는 냉정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내용의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김응하의 행적을 다룬 <충렬록>을 가장 마지막에 다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충렬록>, 특히 광해군대에 편찬된 <충렬록> 초간본에는 여러 잡다한 글이 실려 있지만 사료적 가치가 높은 핵심은 <충렬록>에 실린 김장군전이다.

김장군전은 크게 세 대목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3월달에 조선으로 귀국한 좌영천총 신충업, 중영 포수 김충남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공통 증언이다. 하지만 사람 이름 여러 명을 나열한 끝에 나온 증언은 "(김응하가) 시작부터 끝까지 힘써서 싸웠다는 보고가 한 사람 입에서 나온 것 같았다"는 빈약한 내용 뿐이다. 초반 탈출자 내지 탈영병들이 "김응하가 시종일관 열심히 싸웠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4월2일 정응정의 증언 내용인데, 버드나무 아래에서 시종일관 열심히 싸운 조선군 장수에 대해 만주족들이 칭찬했다는 내용인데, 그 사람이 알고보니 좌영장 김응하였다는 이야기다. 셋째 증언이 바로 문제의 이장배 증언이다. 직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 군사였거나 아니면 굳이 직책을 거론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최하급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장배는 아주 장황하게 전투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3월) 초4일 (명나라) 유 제독, 교 유격이 앞서 가고, 아국의 좌영이 그 다음, 중영이 그 다음, 우영이 뒤에 있었다. 교, 유 두 부대가 크게 패해, 적병이 아군과 서로 대치했다. 아군을 지휘해 급하게 벌려 진을 완성할 때쯤 (조선 강홍립) 원수에게 급하게 고하기를 "외로운 군대로 당해낼리 없으니, 속히 우영에 함께 맞서 싸우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강홍립) 원수가 즉시 우영장 이일원이 진영을 옮겨 돕도록 했다. 막 그 군대를 벌려 세울 무렵 (좌영장 김응하) 장군이 (우영장) 일원에게 말하길 "우리 병사는 평지에 진치고 있는데, 강가 높은 곳(안상)에서 옮기지 않으면,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으나 일원이 (진을 이동하는 것에) 따르지 않았다. 중영과의 거리가 수백보였는데, (진영) 벽 위에서 보니, 홀연 적 기병 수천여 명이 좌우 양진의 사이를 가로질러 차단했다. (우영장) 이일원이 먼저 도망가니 그 군대가 붕괴했다. 적병이 유린하며 쳐 죽였다. 적 5~6만이 1리 밖에서 대치하고 있다가 정예병력을 뽑아 말을 달려 돌격(馳突)하며, 좌영을 정면 공격(直犯)했다. 아군에 일시에 (화약무기를) 쏘니 오랑캐 병사들이 퇴각했다. 이내 다시 전진해 왔는데 (사람이 없는) 빈 말들이 많았다. 이는 탄환을 맞아 죽은 오랑캐의 말이 분명했다. (명나라의) 교 유격이 패해 중영으로 돌아왔는데,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평지에서 보병이 철기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하니 귀국 군대는 싸움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 가득하고, (조총) 총약이 날려 탄환을 쏠 수 없었다. 적병이 이에 (아군의) 진중으로 뛰어들었다. (김응하) 장군은 홀로 버드나무에 의지해 활을 쏘면 반드시 (적) 갑옷의 미늘을 관통했다.

이장배 증언, <충렬록> 초간본


이상의 줄거리는 훗날 김육이 지은 <명신전>의 김응하편, 송시열이 지은 김응하 묘비에도 그대로 나타날 정도로 매우 유명한 스토리다. 다시 말해 이장배의 증언은 후챠전투 당시 좌영장 김응하의 활약과 영웅적 최후에 대한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을 뒷받침하는 원천 자료에 해당한다. 하지만 증언의 첫 대목부터 다른 사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를 보여줘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시간 순서도 다른 사료와 차이가 크다.

우선 이장배는 전투 초반부터 좌영이 우영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되어 있다. <책중일록>에서는 좌영의 구원 요청이 만주족 기병 대병력의 원거리 포위가 시작된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장배는 좌영 진영 설치 직후부터 구원 요청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초반부터 우영의 지원이 이뤄졌다고 설명한 점도 <책중일록>과 다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좌영장 김응하가 우영장 이일원에게 진영 이동을 제안했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허위가 명백하다. 어차피 동급 지휘관인 좌영장이 굳이 우영장에게 진영 이동을 제안할 필요가 없다.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단독으로 진영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응하가 평지보다 강가(부사하)의 높은 지역(岸上)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면 우영이 이동해 오기 전에 좌영 단독으로 먼저 이동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굳이 우영이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이동을 제안하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전후가 모순된 설명보다는 좌영장 김응하가 처음부터 평지에 진을 설치했고 이 때문에 원수 강홍립이 높은 언덕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명령이 도달했을 때는 만주족 기병이 도착해서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책중일록>의 설명이 훨씬 자연스럽다.

큰 틀에서 만주족의 돌격이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언급한 점은 <광해군일기>에 실린 평안감사 박엽의 장계와 유사한데, 이장배의 증언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장배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족은 먼저 좌우영 사이를 공격해 양 진영을 분리시켰고, 이 공격으로 우영이 먼저 붕괴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 증언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명나라 사람 강세작의 증언과 모순된다.

<연경재전집>에 실린 강세작의 증언을 보면 "좌우영장이 평지에 진을 쳤는데, 만주병이 좌영을 선제 공격해서 전멸시키고, 우영을 공격했다. (左右營將陳平地。滿洲兵先擊左營。一鏖而盡之。移擊右營)"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김응하가 진영 이동을 제안했다"는 증언에는 "김응하의 전술적 안목이 뛰어났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듯이 "우영이 먼저 격파 당했다"는 증언에는 "김응하가 보다 오랫동안 만주족의 공격에 버텨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밖에 만주족의 대대적인 1차 공격을 좌영이 방어했다는 증언도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이민환의 <책중일록>과 만주족의 <구만주당>, <속잡록>에 실린 강홍립의 밀계를 통해서 볼때 만주족의 1차 공격은 탐색전 수준의 제한된 공격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1차 공격 직후 만주족이 재차 공격을 해왔는데 이 때 빈 말이 보였다고 증언한 대목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많이 죽였다는 표현대신 "빈 말이 많이 보였고, 이것은 총에 맞아 죽은 오랑캐의 말일 것이다"라고 묘사한 것은 현장 목격자 특유의 생생함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갑작스런 돌풍과 그에 따른 만주족 기병의 최종돌격, 좌영의 전멸 상황에 대한 증언은 앞에서 이미 분석한 바와 같이 돌풍이 조선군 패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는 점 정도만 이해한다면 기본적으로 사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① -
  • ② -
  • ③ -
  • ④ -
  • ⑤-1 좌영 포진 완성. 우영에게 지원 요청 (⑤+⑪ 에 해당)
  • ⑤-2 우영 이동. (⑪ 에 해당)
  • ⑤-3 좌영장 우영장에게 진지 이동 제안
  • ⑤-4 우영장 이동 제안 거부
  • ⑥-1 만주족 기병 출현. 좌우영 사이로 공격.
  • ⑥-2 우영 먼저 붕괴. (⑬ 에 해당)
  • ⑥-3 만주족 5~6만 1리 밖에 포진 (⑩에 해당)
  • ⑥-4 만주족 정예기병 좌영 정면 공격
  • ⑥-5 좌영 일제 사격으로 만주족 격퇴
  • ⑦- (돌풍 ⑬으로 이동)
  • ⑧-
  • ⑨ 명나라 유격 교일기 조선군 원수 진영에서 좌군 칭찬
  • ⑩-(만주족 대병력 출현 ⑥으로 이동)
  • ⑪-(구원 요청 ⑤로 이동)
  • ⑫-1 1차 공격후 곧 2차 공격 시작
  • ⑫-2 빈 말 목격, 총에 맞은 것이 분명하다고 추정
  • ⑬-1 돌풍 발생. 연기와 먼지 비산. 총약 날아감.
  • ⑬-2 청 기병 돌격. 좌영 전멸.




    ■ 김기려 증언으로 본 만주족 기병 돌격의 또다른 면모
    마지막으로 김기려의 증언을 한번 살펴보자. 박세당의 아들이었던 박태보(1654~1689)는 한때 평안도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박태보는 평소 김응하 장군의 행적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선천은 김응하가 출정하기 이전에 선천부사로 재임하던 고을이었다. 박태보는 후챠전투의 생존자들에게 김응하의 행적을 듣고 싶어했는데 대부분은 사망한 상태였고, 그나마 살아있던 생존자 1명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늙은 상태였다. 이때 한 어부가 김기려라는 이름을 가진 참전자의 증언을 박태보에게 전해 주었다. 그 기록이 바로 박태보의 <정재집>에 실려 있다.


    아군이 우미령(牛尾嶺)을 넘었다. 원수의 군영은 영(嶺) 위에 있고, 좌영은 영(嶺) 밑 평지에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서 보니, 명 나라의 패전한 군사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간간이 아군에 들어오니 아군이 떠들썩하여 좌영에서 명 나라 패잔병을 진중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이때 갑자기 오랑캐가 많이 밀어닥쳐 먼저 좌영을 침범하므로, 응하가 거마목을 진 앞에 둘러치고 부대를 나누어 포를 쏘게 하니, 오랑캐 기병이 길이 막혀서 뚫고 오지 못하고 여러 번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갔다 하였다.그때 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영(嶺) 위에 있으면서도 좌영에서 벌떼처럼 왕래하며 긴급함을 알려와도 망연히 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오랑캐 기병들은 패잔병의 말(敗馬)을 연이어 매어 놓고, 철기병이 말 뒤에 따라오면서 병기로 말을 몰아 내달려 거마목을 무너뜨리게 하였다. 좌영에서 포를 쏘니, 오랑캐의 선두가 넘어지자 뒤따라온 적병이 연달아 밟고 넘어오는데, 좌영에서는 군사가 적어서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패하였다.

    김기려 증언, <정재집>


    이 증언에 나오는 우미령은 이민환이 <책중일록>에 기록한 우모령이 분명한데, 원수 강홍립이 우미령 영상에 주둔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살펴본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한 오류다. 우미령을 통과한 후 언덕 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박태보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한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대목은 다른 증언에서도 나오는 것이라 별로 언급할 것이 없지만 마지막 대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즉 김기려는 만주족 기병의 최종 돌격 이전에 "오랑캐 기병들은 패잔병의 말(敗馬)을 연이어 매어 놓고, 철기병이 말 뒤에 따라오면서 병기로 말을 몰아 내달려 거마목을 무너뜨리게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조선군은 대기병용 바리케이트의 일종인 거마책 혹은 거마목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정 부분 기병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효과가 있는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기려는 이 거마책을 파괴하기 위해 만주족이 명나라 패잔병의 말을 이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가? 맞다. 이건 이장배의 증언에서 말한 "빈 말이 많이 보였고, 이것은 총에 맞아 죽은 오랑캐의 말일 것이다"라는 대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장배는 적을 많이 죽였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는데, 결국 이장배가 직접 총에 맞아 만주족 병사가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장배는 전투 현장에 빈 말이 나타날 수 없으므로 "총에 맞아 죽은 오랑캐의 말"이라고 강하게 추정했다. 그러나 김기려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실상은 애당초 그 말들은 처음부터 사람이 타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장배가 목격한 사람이 타지 않은 빈 말은 거마목을 부수기 위해 처음부터 사람을 태우지 않고 돌격시킨 빈 말이었다는 이야기다.


    • ① -
    • ② -
    • ③ -
    • ④ -
    • ⑤-1 원수 진영은 영상. 좌영은 평지에 포진.
    • ⑥-1 명나라 패잔병 출현.
    • ⑥-2 만주족 기병 좌영 공격
    • ⑥-3 조선군 좌영 부대 나눠 사격.
    • ⑥-4 만주족 돌파 시도 저지
    • ⑦-
    • ⑧-
    • ⑨-
    • ⑩-
    • ⑪-1 좌영 구원 요청, 원수는 관망.
    • ⑫-1 만주족, 빈 말을 거마작에 충돌시킴
    • ⑬-1 좌영 사격에 만주족 선두 기병 쓰러졌으나 후속 돌격.
    • ⑬-2 좌영 전멸




    ■ 최종 요약-후챠전투 조선군 패전 과정의 재구성


    조선군은 진시(아침 8시 전후)에 심하를 출발해 행군을 시작했다. 유정 제독은 가합령까지 만주족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새벽부터 행군을 시작해 이미 수십 킬로미터 전방에서 전진 중이었다. 마침 서쪽에서 대포 소리를 들었다는 보고도 있었기 때문에 유정 제독은 더욱 행군을 서둘렀다. 하지만 이날 오전 유정 제독이 이끄는 명군은 와르카시 숲과 아부다리강 산에서 암바 바일러와 홍타치 바일러가 이끄는 만주족 정예 기병에게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조선군은 명군이 전멸한 사실을 몰랐지만 지형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전 1000m가 넘는 우모령을 넘을 때에 비하면 후챠 들판의 길은 너무도 평탄했다. 하지만 길이 10~15km 폭 1~4km급의 좁고 긴 회랑지형 좌우로는 산과 계곡이 이어져 만주족 기병들이 매복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원수 강홍립은 일단 각 영의 병사들에게 명령해 거마작을 앞세우고 전진하게 했다. 여차하면 진영 앞에 거마작을 늘려세워 잠시나마 만주족 기병의 돌격을 지연시킬 심산이었다.

    수십리를 행군했을 때쯤 또다시 대포 소리가 세 번 연속으로 이어졌다. 원수 강홍립은 불안감을 느꼈다. 어제도 들렸다는 그 대포 소리가 왜 또 들린단 말인가. 앞서가는 유정 군대가 전투를 수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명군이 출현한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적들도 대포를 가지고 있을 것일까.

    강홍립은 불안감을 마음 속 깊이 감추고 말을 달려 길 왼쪽의 높은 언덕으로 올랐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연기와 먼지가 하늘에 가득 찼다. 그냥 바람이 아닌듯했다. 이건 기병 대병력이 들판을 뒤덮으며 달려 올때 일어나는 먼지바람이 아닐까.

    적의 징조라고 생각한 원수 강홍립은 즉시 좌영, 중영, 우영에게 진영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적은 기병이다. 평지에서 정면대결했다가는 아무리 조총이 많다고해도 전멸이다. 일단 자신의 직할병인 원수 표하군과 부원수 표하군, 중영은 자신이 올랐던 언덕에 포진하도록 했다.

    마침 1km쯤 앞서가던 좌영의 앞, 강의 오른쪽에 또다른 높은 언덕이 보였다. 그 언덕에는 김응하가 지휘하는 좌영이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 이일원이 지휘하는 우영은 남쪽의 언덕(阜)에 진을 치게 했다. 중영과 우영은 즉시 진을 쳤으나, 좌영이 문제였다. 무슨 생각인지 평평한 들판에 진을 쳤다.

    강홍립은 즉시 원수 표하군 소속의 별장 박난영을 불렀다. 군관을 불러서 명령을 전달할 수 있지만 좀 더 확실하게 명령을 전달할 수 있도록 별장을 부른 것이다. 원수 강홍립은 박난영에게 "좌영은 즉시 높은 언덕으로 진을 옮기라"는 명령을 좌영장 김응하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고 전방을 초조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별장 박난영은 말을 타고 1km쯤 떨어진 좌영의 진영으로 질주했지만, 아뿔사, 이미 늦었다. 좌영 앞 저 먼 곳에 만주족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좌영이 무리해서 언덕으로 이동하다가 만주족 기병 주력이 도달해 공격을 가하면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전멸할 터였다. 현 위치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불리한 싸움이 될 터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패잔병이 분명한 명나라 보병들도 피를 흘린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명군 패잔병을 받아주면 아군이 동요할 것이다. 진영 내로 패잔병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만주족 기병은 어느새 500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만주족 기병은 앞뒤로 왔다갔다하면서 좌영의 헛점을 찾는듯 보였다. 한번은 돌격을 하는듯했으나 좌영이 조총을 격렬하게 사격하자 이내 말머리를 돌려 후퇴해 버렸다. 초조했다. 과연 조선군 단독으로 버틸 수 있을까.

    조선군 진영 주변에는 먼지와 연기, 재가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었다. 명군이 근처 만주족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일까. 매캐한 연기 냄새와 함께 먼지 바람까지 휘날려 1km가 넘는 곳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먼지와 연기 사이로 적의 대병력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절로 두려움이 들었다.

    일단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해 보자. 일단 중영 앞의 높은 언덕이 문제였다. 저 곳에 만주족들이 올라온다면 표하군들과 중영이 주둔한 이 언덕의 상황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건 위험하다. 부원수 표하군 소속의 별장 황덕창을 불렀다. "저 언덕에 진을 쳐라" 표하군에 별장을 많이 두었더니 이런 상황에선 편했다. 별장들은 어느 정도 알아서 전투를 수행할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황덕창을 선택한 이유는 황덕창이 믿음직스러웠다기보다는 그가 지휘하는 별무사와 신출신이 미더웠기 때문이었다. 별무사와 신출신들은 일반 군졸들보다는 훨씬 전투를 잘할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토병이 더 많았다면 그들을 투입했겠지만 아쉽게도 너무 적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근무하는 북도 토병 1명은 한때 여진족 100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할만큼 평판이 높았다. 근무조건이 너무 열악해 도망자가 많아지면서 토병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토병은 일반 군졸보단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1개 초(중대급)도 안되는 토병으로는 큰 기대를 걸기 어려웠다.

    하지만 황덕창은 이내 다시 중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언덕에서 보니 만주족 대병력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더라는 말 따위로 군심을 어지렵혔다. 명령을 어기고 되돌아온 것만으로도 군율에 따라 처단할 죄인데, 장수로서 군졸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니 죄가 더욱 컸다.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군율의 지엄함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진영 한구석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명나라 패잔병들 중에 유격장 교일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열흘여 전 압록강을 건너 편에서 처음 만났던 위풍당당한 풍모의 교 유격은 없었다. 수심에 가득찬 한 사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쳐 온 것인지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 유격은 전하는 말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명군이 전멸했다고 했다. 유정 제독도 전사했다.

    짐작은 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명군의 패전 사실을 확인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저하됐다. 다른 명나라 장수들도 몇몇 보였지만 이내 말머리를 돌려 동남쪽으로 도주했다. 교 유격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역관이 "교 유격이 말하길 나는 조선군 감군의 역할을 맡았으니 후퇴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넌지시 전해준다. 원수 강홍립은 대답 대신 각궁과 환도 한 자루를 교 유격에게 주었다. 이왕 남으려면 같이 싸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때 좌영 저 멀리서 만주족 기병 대병력이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좌우 양쪽으로 날개를 벌린체 아군 진영을 먼 곳에서 넓게 포위하는듯했다. 병력은 족히 수만명은 넘어 보였다. 아직은 먼 곳에 있었지만 수만 기병이 내는 말발굽 소리가 좌우의 산에서 반향되면서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

    좌영에서 달려온 군관 조득렴이 구원 요청을 해왔다. 원수 강홍립은 망설였다. 좌영을 구하러 가는 부대는 결국 사지로 가는 것이다. 어차피 평지의 좌영에게 승산은 없다. 그렇다고 좌영이 주변의 높은 언덕으로 이동할 여건도 안된다. 주변에서 "그냥 좌영이 당할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을건가"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좌영을 차라리 버리는 것이 옳다. 버릴 돌을 버리는 것이 대마를 살릴 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홍립은 무인이 아니었다. 평생 문신으로 살아온 자신이 평안도 근무 경험이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이런 전쟁터에 도원수란 거창한 직함을 달고 내던져질지 상상도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는다면 우영으로 하여금 좌영을 돕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야 좌영의 패전을 구경만 했다는 원망이라도 덜 것이다.

    우영에게 즉시 현재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좌영 옆으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전하고 돌아온 별장이 말하길 우영장 이일원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라고 했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나마 버틸만한 언덕을 두고 평지로 내려가 같이 죽으라는 명령이 아니던가.

    먼지와 연기 사이로 갑자기 적 기병이 좌영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 보였다. "적이 다시 돌격한다." 중영 여기 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먼지 사이로 보니 여기 저기 빈 말이 보였다. 좌영이 의외로 침착하게 조총을 쏘는 있는 것일까. 사람 없는 빈 말이 모두 총에 맞에 죽은 만주족 병사의 말이라면 제법 잘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옆에서 누군가가 장탄식을 내뱉으며 "저건 처음 부터 사람이 타지 않은 말(馬)이다"라고 나지막히 말했다. 진영 앞에 늘어 놓은 거마책을 부수려고 말을 그 앞으로 몰아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탄 말은 저 뒤에 있고, 앞에 있는 말은 모조리 사람이 없는 빈 말 뿐이었다. 명군에게서 노획한 말일까. 말을 부딪혀 거마책을 부수려는 것이리라. 거마책이 부서지면 평지에서 기병 돌격에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좌우영의 살수들은 환도나 낭선, 단창, 삼지창 등으로 잡다하게 무장했을 뿐이라 기병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나라 일이 모두 이 모양이었다. 저런 살수들은 왜군들이나 상대할 수 있지 오랑캐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우영이 1km 앞의 좌영 옆에 도착해 연진을 꾸미기 시작했다. 두 진영이 합쳐져 진영을 막 이루려는 찰나 갑자기 서북쪽에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만주의 산과 계곡 사이에는 이따끔 거센 서북풍이 분다. 불길한 바람이다. 맞바람을 안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화살이든, 조총이든 맞바람을 안고 싸우는 쪽이 불리해진다. 안그래도 먼지와 연기, 재가 뒤범이 된 후챠들판에 모래 먼지가 크게 일어나면서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어두컴컴해졌다.

    좌영과 우영의 조총 소리가 점점 잦아드는가 싶더니 어둠 속에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돌풍은 멈췄다. 먼지가 가라앉은 것은 그보다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석양 아래 만주족 기병이 쏘는 화살이 하늘을 뒤덮는 것이 보였다. 검붉은 노을 사이로 기병들의 전진하고 후퇴하는 모습이 마치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의 모습처럼 보였다. 먼지가 사라졌을 때 좌우영에 움직이는 존재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웅성거리며 좌영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중영의 군졸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침묵했다.

    by 번동아제



     
    전투 현장일 가능성이 높은 후차 들판의 전경. 조선군 진영들이 위치한 곳은 완전한 산이라기보다는 평야지대 중간에 솟은 높은 언덕내지 낮은 동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서북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평지가 후챠들판이고 북쪽으로 연결되는 계곡들이 명군의 진격로다. 가운데 회랑지역에서 북쪽지역보다는 남쪽지역에 이민환이 묘사하는 지형에 더 부합하는 언덕내지 동산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이 곳으로 옛 길이 통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처 구글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