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사르후전투 <2> 누르하치의 도박과 조선군의 행군 지연

구름위 2013. 7. 15. 13:24
728x90

 

사르후전투 <2> 누르하치의 도박과 조선군의 행군 지연

1619년 2월19일 조선군 좌영장 김응하 휘하의 좌영이 압록강을 도하했다. 도원수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21일, 조선군 중영이 도하한 시점은 22일이었다. 우영을 포함한 전체 조선군이 도하를 마친 시점은 그 다음 날인 2월23일이었다. 원수 문종사관 이민환은 이 날을 기준으로 실제 도하를 해서 만주에 진입한 병력의 총수가 3영 소속 병력 1만100명, 도원수와 부원수 표하군 소속 병력이 2900명이라고 명시했다.

이 때까지 명군 주력과 조선군은 합류하지 않았지만 조선군을 통제할 임무를 부여받은 명나라 유격 교일기는 이미 2월22일 조선군 지휘부와 접촉을 해왔다. 우익남로군의 전체 지휘관이었던 명나라 제독 유정과 강홍립이 직접 만난 것은 2월26일이었다. 이날 조명연합군 지휘부 사이의 첫 만남부터 도원수 강홍립은 "조선군의 식량 보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이동을 늦추어 달라"고 명나라 측에 요청한다.

하지만 4개 방면으로 나눠 진격하는 명군이 만주족 후금의 도성에 3월1일로 집결하기로 사전에 정해진 마당에 행군을 늦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연히 유정은 "군율이 지엄하다"며 조선측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음날인 2월27일에도 조선군은 식량 보급이 되지 않는다며 행군을 지연시키려했지만, 명나라 측의 반응은 한층 격해졌다. 특히 우 수비는 "조선군이 후방에 쳐지면 (유정) 제독이 나를 벨 것"이라며 “조선군은 군량이 없다고 하나, 실은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다"라고 칼을 빼들고는 행군을 독촉했다.

이에 앞서 2월25일에 눈이 내렸을 정도이므로 기상 상황도 좋지 않았다. 동사자도 있었을 정도였다. 길도 험했다.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남부지역으로 진입하는 길은 요동이나 만주 중북부의 평야지역과 전혀 달라 함경도나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나 다름 없는 곳이다. 조선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서 이런 험준한 지형을 돌파해야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후챠 들판에서의 전투 전에 이미 조선군은 정상적인 컨디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군은 창성에서 집결한 후 묘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팔렬박, 앵아구, 엄수령, 양마전을 거쳐 2월28일 우모령을 통과한다. 이때까지의 행군경로는 당시 전투 참전자인 이민환이 <책중일록>에 기록을 꼼꼼히 남기고 있다. 하지만 고지도나 고지리서에 안나오는 만주족 거주지의 소소한 지명들이어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의 왕종안은 태평초를 양마전으로 보고 있으나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수 같은 국내의 선행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면 상전자를 양마전으로 보는 중국 현지의 견해를 소개해 놓았으나 이 역시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측의 <명청결전>에서 판단하는 지명도 조금식 차이가 있다. 배동갈령에 대해서는 현재 환인과 관전의 경계에 있는 감천령(砍川嶺)이라는데 대해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조선군은 2월28일 우모령에 도달했는데, 지금 이 곳 부근에 남아있는 우모대산이 바로 우모령이라는 점부터는 비교적 분명하다.

 조선군의 행군경로와 일정
  • 2월19일 조선군 좌영 창성 묘동에서 압록강 도하
  • 2월21일 조선군 도원수 묘동에서 압록강 도하. 팔렬박(哵咧泊:창성에서 25리) 도착
  • 2월22일 조선군 중영 묘동에서 압로강 도하. 명나라 유격 교일기 조선군과 합류
  • 2월23일 조선군 전체 도하 완료
  • 2월24일 조선군 앵아구(鶯兒溝:팔렬박에서 30여리)에서 숙영
  • 2월25일 조선군 엄수령(渰水嶺) 통과, 양마전(亮馬佃:앵아구에서 50여리)에서 숙영
  • 2월26일 조선군 진자두(榛子頭:양마전 20여리)에서 명군 남로군 주력과 합류
  • 2월27일 조선군 배동갈령(拜東葛嶺) 10리 전(진자두에서 50리)에서 진영 설치
  • 2월28일 조선군 우모령(牛毛嶺) 통과, 해질녘 우모채(牛毛寨:배동갈령에서 80리) 도착
  • 2월29일 조선군 식량 보급 문제로 행군 중지
  • 3월1일 조선군 마가채(馬家寨:우모채 40리)에 도착. 이날 후방에서 최초의 식량 보급
  • 3월2일 12시(오시) 전후 심하(深河) 도착. 만주족 기병 500명과 교전. 해질녘 진영 설치
  • 3월3일 조선군 행군 중지
  • 3월4일 조선군 8시(진시)에 행군 시작, 수십리 행군 후 후챠(富車) 들판에 도달


     
    조선군의 행군경로. 청색 표시가 조선군의 출발지점인 창성. 적색이 조선군과 만주족의 전투가 벌어진 후챠. 노란색이 후금의 수도인 헤투알라다. 압록강 도하지점은 알 수 있으나 그 때부터 우모령 통과(점선) 이전의 조선군 행군경로는 논쟁이 진행 중이어서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우모령을 넘지 않고 현재의 환인현 방면으로 직진해서 다시 서북방향으로 행군하는 코스를 선택했다면 평지로만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산을 넘는 것이 전체 행군거리를 줄여 시간 단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유정 제독은 그 행군로를 선택했다. 우모령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으로 아직 눈이 남아있는 2월말에 보병 대병력이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었지만 명군은 행군을 강행한 것이다.



     
    지도 오른쪽이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위치했던 졸본이자 현재 중국의 환인현이다. 명군과 조선군은 1619년 2월말 환인을 경유하는 평지대신 우모령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돌파해 후챠 들판으로 행군한다. 지도에서 첫번째 화살표가 끝나는 지점까지가 우모령 일대다. 두번째 화살표가 끝나는 지점이 3월3일 전투가 벌어진 심하이고, 세번째 화살표가 표시된 지점이 3월4일 전투가 벌어진 후챠 들판이다.



    도원수 강홍립은 2월29일 "식량이 도착하지 않아 행군하기가 어렵다"며 다시 한번 행군 연기를 명나라 유정 제독에게 요청한다. 유정은 "군대에서 약속한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다"면서도 "원수의 얼굴을 봐서 하루만 머무르겠다"고 조선군 측의 요청을 수락한다.

    3월1일 처음으로 조선군의 보급품이 도착한다. 배급을 줄이면서 휴대한 식량만으로도 버티던 조선군에게는 그나마 희소식이었지만 보급량은 겨우 수십여 석에 불과할 정도여서 식량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대의 기록을 보면 1만명이 20일 버티는데는 2000석의 식량이 필요했다. 사르후전투 당시 조선군은 1만3000여명이었으므로 매일 130석의 식량이 필요했다. 하지만 열흘여 만에 처음으로 도착한 보급품은 겨우 수십 여 석에 불과해 단 하루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다.

    여기다가 더욱 문제는 정찰과 후속 군수부대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은 조선군 연영 소속 5000명의 기병의 위치가 계속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민환은 "연영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며 계속 불만을 토로했다. 1만 여명을 훌쩍 넘는 보병에 최소 1000명 이상의 기병이 포함된 강홍립의 본대와 달리 연영장 이찬이 지휘하는 병력 5000명은 모두 기병이어서 상대적으로 기동에 유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1일까지도 연영장 휘하 기병들은 원수 강홍립이 지휘하는 주력부대의 행군 경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문종사관 이민환은 "삼군의 일이 정말 한심하고, 흰 머리가 난 늙은 서생(본인)은 결국 모래 사장에서 백골이 될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안감을 토로한다.


    3월2일 처음으로 만주족과의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 장소는 심하(深河)였다. 중국 학자인 왕종안은 2001년 <만족연구>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심하의 위치가 환인현 육도하(六道河)이고, 좀 더 정확하게는 이호래진(二戶來鎭) 흑와자(黑臥子) 부근이라고 보고 있다. 다시말해 육도하의 상류가 Y자형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심하라고 보고 있다. 명군과 조선군이 도섭할 수 밖에 없는 지점에 만주족 기병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수 문종사관 이민환은 적이 기병 500~6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청조개국방략> 등 청나라측 사료에서도 당시 만주족 기병이 500명이라고 기록해 비슷한 규모를 보여준다. 진을 형성(결진)한체 대기하고 있던 만주족 기병들은 명군과 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내 산으로 후퇴했다. 유정 제독은 활로 무장한 조선군 사수와 화약무기를 휴대한 조선군 포수를 독촉해 공격을 계속했다. 전투 장소에 조선군 좌영은 도착하지 못했지만, 중영과 우영이 중심이 되어 전투를 수행했다.

    만주족 기병들이 지형이 험한 곳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병력 규모의 차이가 컸음에도 전투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았다. 조선군의 문희성 중영장이 화살에 맞아 왼손에 상처를 입고, 조선인 출신으로 명나라 유정 제독의 양자였던 유길룡이 전사하는 등 전투 양상은 자못 격렬했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조선군의 활약 덕분이었다. 적 지휘관처럼 보이는 자가 만궁으로 화살을 쏘아대며 갑자기 튀어나오자 조선군 원수 표하군 소속의 경포수였던 이성룡이 탄환을 쏘아 맞추었고, 한명생이 다시 그 목을 베었다. 지휘관급이 사망하자 청군은 후퇴했고 전투는 끝났다. 하지만 전장을 완전히 이탈한 것은 아니어서 이날 밤 만주족 기병은 명나라 절영을 기습해 왔다. 명군은 격렬하게 화약무기를 사격해 만주족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3월2일 낮과 밤에 벌어진 전투 결과는 작전적 측면에서 명군과 조선군에게 사실상 패착이나 다를바 없었다. 전술적으로 명과 조선군이 승리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겨우 500명의 만주족 기병에게 명군 2만여 명과 조선군 1만3000여 명의 진격이 하루종일 저지되었다. 명군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소모하도록 강요했다는 의미다.

    조명연합군에게 더욱 큰 장애물은 조선군의 식량 보급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전투 다음날인 3월3일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은 명나라 유정 제독에게 재차 행군 연기를 요청한다. 명군 지휘부 입장에서는 작전 개시후 보름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끝없이 식량 문제를 거론하는 조선군에게 짜증이 날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유정 제독은 이날 선선히 조선측의 요청을 수락한다. 이민환은 "유정 제독이 아끼던 양자 유길룡이 전날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 행군 날짜를 늦춘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전날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을 유정 제독이 목격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이 단순히 전투에 참가하기 싫어 의도적으로 행군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고 유정 제독이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유정 제독이 조선군의 사정을 배려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행군을 하루 늦춘 강홍립은 근처 만주족 마을에 숨겨둔 식량을 수색해 죽을 끓여 병사들에게 먹였다.



     
    만주족의 입장을 보여주는 <황청개국방략>. 누르하치는 유정 제독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을 일종의 유인부대라고 생각해 이쪽에는 단지 500명의 기병만 배치했다. 이 같은 누르하치의 판단과 달리 유정 제독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은 주공 방향을 속이기 위한 양공부대라기보다는 실제 헤투알라성(흥경)을 공격할 잠재력을 보유한 주력부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의 연이은 행군 연기 요청으로 명나라군은 실제 가능했던 날짜보다 이틀이나 늦은 3월4일에야 헤투알라성의 길목인 가합령 아래에 도달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식량 문제 때문에 2월29일과 3월3일 이틀이나 우익남로군 소속의 조명연합군은 행군을 멈췄다. 여기다 3월2일 하루 전투까지 3일이나 지체되었다. 결과론적 이야기겠지만 이 3일은 사르후전투의 향방을 바꾸기에 충분한 날짜였다. 사르후전투 당시 명군은 북쪽과 서쪽에서, 그리고 조명연합군은 남쪽에게 각각 진격해 만주족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성을 공격하는 분진합격 작전을 공격의 기본 뼈대로 삼고 있었다.

    이에 대항해 당시 만주족은 전형적인 내선작전으로 명군을 상대해 각개격파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황청개국방략>에 따르면 후금의 칸 아이신카라 누르하치는 남쪽에서 오는 조명연합군을 일종의 유인부대로 생각했고, 요동에서 직진해 오는 명군이 실질적 주공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요동쪽의 명군을 방어하는데 8기병의 주력 전부를 투입했고, 조명연합군이 진격해오는 방면에는 단지 기병 500명만 배치했다.


    구 일본제국군 참모본부에서 편찬한 <명청결전>에서는 이 같은 만주족의 방어배치에 대해 필요한 지역에 과감하게 병력을 집중운용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만주족의 방어 배치는 과감하다 못해 지나치게 모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정 제독의 전투경험이나 병력 규모를 볼 때 그가 운용하는 부대를 단순히 주공을 오인하게 목적으로 운용한 양공부대라고는 볼 수는 없다.

    물론 강홍립은 유정 군대가 실 병력이 1만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전반적으로 실전 대응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혹평하고 있지만, <구만주당> 등의 사료를 참조할 때 유정은 조선군을 제외하고도 대략 2만 정도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아부다리강 전투에서도 홍타치 바일러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바로 진영이 붕괴되지 않고 혼전 양상으로 몰아간 것을 볼 때 유정 휘하의 전력이 유독 약했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사르후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에 대해서도 중국 명나라의 <무비지>는 "두 차례의 상(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치뤄 훈련을 제법해서 군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조명연합군은 그 자체 전력으로 충분히 헤투알라성을 강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선군이 계속 행군 연기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늦어도 3월1일 유정 제독이 이끄는 우익남로군은 심하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날 500명의 만주족과 교전을 치루었다해도 3월2일쯤에는 가합령을 돌파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3월1일 사르후산에서 두송이 이끄는 명군 좌익중로군이 만주족 주력 병력에게 전멸했고, 바로 그 날(3월2일)에는 마림과 범종안이 이끄는 명군 좌익북로군이 만주족 주력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때까지 유정 제독의 진공로에는 이렇다할 방어 병력이 없었다. 유정 제독이 행군 속도를 서둘렀다면 방어 병력이 제한된 헤투알라성을 공격하거나 혹은 최소한 헤투알라성을 비롯한 후금 중심지 일대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르후전투 전체 상황도. <출처 군편연 한국연합작전사 p319> 두송군이 격파된 시점은 3월1일, 마림군은 3월2일 격파됐다. 이여백이 이끄는 우익중로군은 두송/마림군의 패전 이후 회군했다. 유정 제독이 이끄는 우익남로군, 다시 말해 조명연합군은 이같은 상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후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행군 속도를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만주족 후금의 수도인 헤투알라성(흥경)으로 접근해 간다.


    이 같은 후방 위협이 가능했다면, 두송의 좌익중로군과 마림의 좌익북로군을 상대하던 만주족 8기 주력 중에 일부는 후방 헤투알라성으로 조기에 전환배치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두 부대에 가해지는 만주족 병력의 압력도 상당히 완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 이여백이 지휘하는 우익중로군도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투상황이 이렇게 흘러갔다해도 당시 만주족의 전투기술과 숙련도가 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최종 전투의 승리자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이 행군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면 실제 역사에서와 같은 전멸에 가까운 명군과 조명연합군의 압도적 패배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조선군의 식량 보급 문제로 유정 제독이 이끄는 부대의 행군 속도가 계속 지연되었고, 이 같은 행군속도 지연은 "4개 지역으로 분리 접근해 오는 명군과 조명연합군을 기병의 높은 기동력을 바탕으로 내선작전에 기반해 분리 격파한다"는 누르하치의 전략을 성공시키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사르후전역 최후 단계의 후챠회랑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