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사르후전투 <1> 참전 조선군 편제와 병종, 휴대 무기

구름위 2013. 7. 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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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만주에서 벌어진 사르후전투(薩爾滸之戰)는 한족 명나라에서 만주족 신흥국가로 파워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전투이자, 명나라 멸망의 문을 열어제친 결정적 전투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인 영향을 깊게 남긴 운명적이고 역사적인 이 대결전에 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도 참전했다.

과거 교과서나 개론서 수준의 역사서에서는 조선군 원수 강홍립이 당시 국왕인 광해군의 사전 밀약을 받아 만주족에게 항복했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 전투경과와 항복과정이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사르후전투, 좀 더 정확하게는 사르후전역의 마지막을 장식한 후챠 전투가 바로 조선군과 만주족 후금군의 대결이었다. 이 전투는 이처럼 거대한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는 상징적 전투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에서 국가 단위의 정규군 조총병과 기병이 정면 대결한 몇 안되는 희귀한 전례라는 점에서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미 몇년 전에 이 게시판을 통해 사르후전투의 최후 전투 과정을 목격한 이민환의 <책중일록> 내용을 소개한 일이 있다. 물론 이 사료의 존재 자체와 그 주요 내용은 내가 이곳에서 소개하기 이전에도 국내 학계에서 학위 논문 형태로 이미 소개된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민환의 <책중일록>뿐 아니라 관련 한/중 양측 사료를 모두 동원해 이 최후 전투의 상세 내용을 극한의 수준까지 살펴보려 한다.

 

 그림1. <만주실록>의 사르후전투 그림. 조선군이 아니라 후금 vs 명군의 전투 장면을 기록한 것 중 하나다. 오른쪽이 명군, 왼쪽이 만주족 후금의 기병 모습이다.


■ 조선군 참전 병력수는 1만3000명, 기병 5000명은 전투 불참
다른 전근대 전투와 마찬가지로 사르후전투 참전 조선군 병력 수에 대해서도 몇가지 상이한 기록이 전해온다. 이 때문인지 현대 이후 쓰여진 글에서도 사르후전투를 설명하면서 적게는 1만명부터 많게는 2만명이라고 설명하는 등 약간의 혼란이 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르후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은 정확하게 1만3000명이다. 다만 후방 군수지원과 정찰임무를 맡았던 기병부대 5000명까지 포함할 경우 1만8000명으로 계산할 수는 있으나 실제 전투 장소인 부차에 있던 병력이 아니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르후전투 참전 조선군이 2만명이라고 기록한 대표적인 사료 중 하나는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이다. 월사 이정구(1564~1635)는 경신조천록 1619년 3월초4일자에 "김장군응하(좌영장 김응하를 지칭)와 2만 군관이 전사한 날"이라고 썼다. 조선 후기의 문집류 중에서도 참전 조선군 병력이 2만명이라고 기록한 경우가 흔히 있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참전 조선군 병력은 1만3000명이 맞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태백산사고본>(이하 인용하는 광해군일기는 모두 중초본 태백산사고본 기준) 1619년 2월21일자를 보면 이날 압록강을 건넌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이 1만3000명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전투가 끝난지 몇달 후인 <광해군일기> 1619년 7월8일자에서도 "강홍립을 따라 강을 건넌 정예병이 1만3000명"이라고 재확인하고 있다.

원수 강홍립 휘하에서 문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이민환(1573~1649)도 그가 직접 쓴 <책중일록>에서 "3영(중영,좌영,우영을 지칭)의 군사 총수는 1만100여 명이고, 두 원수(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의 병력은 2900여 명"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특히 이민환의 <책중일록>을 보면 도원수와 부원수 직할병력과 중영,좌영,우영의 병력수를 세부적으로 기록한 대목도 있어서 참전 병력이 약 1만3000여 명이 맞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책중일록>을 보면 우선 중영장 문희성이 지휘한 중영이 3350명, 좌영장 김응하가 지휘한 좌영이 3480명, 우영장 이일원이 지휘한 우영이 33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합해 보면 도합 1만200명이다. 원수 표하군(직할대)은 따로 수치가 없으나 표하군에 속한 부대를 모두 합쳐보면 740명, 부원수 표하군은 1810명이 된다. 이를 모두 합하면 1만2750명으로 1만3000명과 거의 근접한 수치가 나온다.

그렇다면 2만명이란 숫자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또한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해답이 있다. 이민환에 따르면 위에서 예시한 병력과 별개로 연영장(連營將) 이찬이 지휘하는 마군 5000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대는 조선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연결되는 교통로상에 10개의 거점을 설치해 후방 보급로를 보호하고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이 병력을 합치면 1만8000여명이 된다. 여기에 명나라 두송 진영으로 보낸 평양포수 400명 등 강홍립이 지휘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병력들도 사료상에 일부 나타나고 있어 이들 모두를 합치면 2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영장 휘하의 기병부대 5000명과 두송 진영으로 보내진 평양포수 400명은 원수 강홍립 지휘하에 직접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은 아니다.



■ 1영-3부-9사-27초 방식의 조선후기형 편제
당시 조선군은 원수 표하군, 부원수 표하군, 중영, 좌영, 우영, 연영 등 표하군 2개 부대에 4개 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영(營)이라는 편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입한 명나라식 편제다. 조선 후기 군제에서 영(營)의 병력 규모는 일정하지 않으나 현대 군제와 비교해서 대략 연대내지 여단급에 상당하는 규모의 부대였다. 조선 후기형 병법에서 작전적 수준에서 어느 정도 독립작전이 가능한 기본 단위가 바로 영(營)이었다.

이미 설명했듯이 <책중일록>에 따르면 사르후전투에 참가한 영은 바로 중영,좌영,우영 등 3개였는데 각 영의 병력규모는 대략 3300~3400명이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연영은 5000명이었다. 즉 중영장 문희성이 지휘한 중영이 3350명, 좌영장 김응하가 지휘한 좌영이 3480명, 우영장 이일원이 지휘한 우영이 3370명, 연영장 이찬이 지휘한 연영이 5000명이었다.

조선후기형 편제는 기본적으로 영(營)-부(部)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를 기본 뼈대로 한다. 조선 후기형 부대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훈련도감을 물론이고 지방군의 중핵이자 예비군인 속오군도 기본적으로 이 편제를 따랐다. 하지만 임진왜란대에 도입한 초기형 속오군 편제에는 부 단위가 없었다. 유성룡(1542~1607)이 지은 <진관관병편오책>을 보면 1대는 대장 외 11명으로 구성되어 분대급이고, 3대가 1기(36+1)이므로 1기는 소대급이었다. 다시 3기가 1초(111+1)이므로 1초는 중대급이었다. 여기까지는 3각 편제인데 그 보다 상위제대는 5각 편제여서 5초가 1사(560+1), 5사가 1영(2805+1)이 된다. 즉 사가 대대급, 영이 연대급이 된다.

그렇다면 사르후전투 참전 조선군은 어떤 편제였을까. 아쉽게도 <책중일록>에는 영 아래 예하부대가 어떤 방식으로 편제되어 있었는지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표하군 2개 부대도 표하군을 구성하는 병종들을 포수,수영패,별무사 등으로 구분해 놓았을 뿐 직접적인 편제 단위에 대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책중일록>에는 당시 편제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남아있다. <책중일록>을 보면 전투 당일 "원수가 별장 황덕창에게 그의 병력과 중영 당보1사를 지휘해서 그 봉우리를 거점삼아 주둔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원문 元帥令別將黃德彰,領其軍及中營搪報一司,屯據其峯.)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사르후전투 참전 조선군에 사(司)라는 편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아래 편제 단위인 초(哨)는 기록상 확인할 수 없느나, 초의 지휘관인 초관이라는 명칭이 <속잡록>에 나온다. 1619년 3월3일자 전투에 등장하는 "초관 전 만호 김계영"이 바로 그 대목이다. 이상의 자료를 조합하면 사-초라는 편제의 기본 줄기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아래 기-대-오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사르후전투와 관련된 조선측 기록에서 부(部) 편제가 명시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임진왜란 종료 후 1614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부총도>에는 이미 영-부-사-초-기-대-오식의 조선 후기형 편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1619년 사르후전투 당시 조선군에도 부의 존재 가능성은 충분히 가정해 볼 수 있다. <진부총도>는 임진왜란 종전 직후의 경상도 속오군 편제를 보여주는 자료다. 1614년에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부총도 방식의 편제가 경상도 뿐만 아니라 전체 조선 지방군의 일반적 편제를 보여주는 사료라고 가정할 수 있다면, 사르후전투는 그 이후인 1619년에 벌어진 전투이므로 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료를 보면 지역에 따라 편제의 차이가 어느 정도 식별된다. 결국 경상도 지역의 편제를 보여주는 <진부총도>만을 근거로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병력이 혼성된 사르후전투 당시 조선군 편제에도 부가 존재했다고 가정해서, 영-부-사-초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단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각 영이 3300~3400명 규모라는 점을 기초로 추론해 보면 5각 편제로 대략 1영-5사-25초 방식으로 편제되었거나 3각 편제로 대략 1영-3부-9사-27초로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가지 편제 추정안 중에서 부가 존재하는 영-부-사-초 방식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번째 근거는 <책중일록>에 보이는 당보1사라는 표현이다. 당보는 조선후기형 병법에서 척후내지 정찰임무를 맡은 부대를 뜻한다. 만약 1영-5사 방식이었다면 영(營) 전체 병력중 20%가 당보 임무를 맡았다는 뜻이되는데 이건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1영-3부-9사 방식이었다면 1/9이 정찰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므로 합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이다.

두번째 근거는 주요 부대 지휘관들의 면면이다. 사르후전투와 관련된 조선 후기 문헌을 종합해보면 좌영과 우영에는 각 3명의 천총(千摠)이 확인된다. 좌영천총 김좌룡은 <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에서, 좌영천총 신충업은 <충렬록>초간본과 <책중일록>에서, 좌영천총 황정은 <속잡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속잡록>에는 '좌영천총 이유'도 등장하지만 그의 본직이 영유현령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영유현령 이유길에서 길자가 오탈자가 난 것이 분명하고, 이유길은 좌영 중군이므로 좌영의 천총은 3명이 된다. 우영천총 이계종은 <속잡록>에서, 우영천총 김요경과 오직은 <책중일록>에서 확인가능하다. 좌영천총과 마찬가지로 우영천총 역시 3명인 것이다. 이처럼 영장 이하 단위의 지휘관인 천총이 각 영마다 3명식 있었다면 1영-5사보다는 1영-3부-9사 편제라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 사르후전투 조선군 편제의 특징
조선 전기형(특히 중종 이후 제승방략식) 전투편성과 임진왜란 이후 후기형 전투편성은 기본 뼈대가 다르다. 조선전기형 전투편성은 평시 직제 혹은 편제와 별개로 주요 단위부대장으로 위장-부장-통장을 정하고 여기에 추가해 특정임무를 수행하는 소규모 독립부대의 지휘관인 돌격장, 유군장, 척후장, 한후장, 계원장 등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추가해 중앙에서 별도의 지휘관을 추가로 파견하거나 작전적 차원에서 독립작전이 필요할 경우 방어사, 조방장을 추가로 임명하기도 했다.

돌격장은 말그대로 선봉에서 과감하게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지휘관이고, 유군장은 진형에 상대적으로 덜 구애받으면서 변칙적인 작전을 구사하는 부대를 지휘했다. 척후장은 말그대로 정찰부대를 지휘하는 것이고, 한후장은 후방에 잔류하는 예비대의 지휘관으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병사들을 통제하는 것도 한후장의 임무였다. 계원장은 최초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으나 주력부대의 뒤를 따르면서 긴급지원이 필요할 경우 즉시 투입이 가능한 일종의 기동예비대를 지휘하는 장수였다.

조선 후기의 전투편성은 주요단위 부대장으로 천총-파총-초관을 둬서 각각 부-사-초급 부대를 지휘하게 했다. 제승방략식으로 돌격장, 유격장, 척후장, 한후장, 계원장 등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지휘관을 별도로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조선 전기형 전투편성에서 후기형 전투편성으로 교체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인지 사전 파병 논의 과정에서 조선 후기형 편제를 기초로 조선 전기형 전투편성을 복합적으로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광해군일기> 1618년6월28자를 보면 광해군은 광해군은 "굳세고 생각이 깊은 당상 무신을 엄선해 선봉으로 정하고, 한후장(捍後將)과 척후장(斥候將) 역시 당상·당하 무신을 엄선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하고 있다. 물론 실제 1619년 3월의 실전에서 한후장이나 척후장 같은 직책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명나라 척계광류의 편제를 이미 적용한 마당에 새삼 조선 전기 방식의 제승방략식 전투편성을 섞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민환 <책중일록>이 실린 <자암집> 표점본. 조선군 편제를 설명한 대목인데 中軍前 다음에 o표시가 나오는 등 구두점에 오류가 있다. 이 책의 인명표기는 전투편성상의 직책, 원 직책, 이름 순으로 되어 있으므로 '중군 전 첨사 오신남'이 분명하다.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나오는 세부 전투편성에는 이밖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조선 후기에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해외원정 사례라는 점에서 후기형 전투편성의 유일한 사례로 꼼꼼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원수(혹은 도원수) 표하군(직할부대)과 별도로 부원수의 표하군을 별도 편성한 점도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다. 원수 표하군과 부원수 표하군에 중영,좌영,우영과 마찬가지로 중군(中軍)직책을 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물론 원수 표하군에 중영 중군과 별도로 중군 직제를 두는 것은 <대열의주> 같은 조선 후기형 대열 규정에도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부원수에 별도의 표하군을 두고 중군을 둔 것은 유사시 부원수 표하군들도 별도의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의도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원수와 부원수 표하군에 별장(別將)을 다수 편성한 것도 흥미롭다. 별장은 조선 전기에서부터 이미 존재하던 직제인데, 이름만 유사할 뿐 사실상 전혀 전혀 별개 개념의 별장이 다수 존재한다. 소규모 국경요새 내지 주요 방수처 혹은 성과을 책임지는 별장도 있고, 둔전을 관리하는 별장도 있다. 혹은 조선후기형 편제에서 기병 부대 지휘관을 별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르후전투 당시 별장들은 표하군의 특수한 편성을 감안해 특정 병종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별장이라고 부른 경우도 있고, 청용별장 등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별장을 편성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래도 조선 후기형 편제에서는 돌격장, 유군장, 계원장 등 특정 임무를 맡은 지휘관 직제를 두지 않았으므로 필요할 때 유연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원수와 부원수의 표하군에 다수의 별장을 편제해 둔 것으로 보인다. <속잡록>을 조선군이 행군 도중에 원수 표하군 청용별장인 숙천부사 이인경이 보졸 600명을 지휘해 노영(임시 주둔지)을 설치했던 사례나 역시 원수 표하군 소속인 별장 유대첨이 3월1일 아군 식량수송부대를 찾기 위해 아군 병력 300명과 절강병 400명과 함께 출동한 사례 등은 별장의 운용 방식을 잘 보여준다.

원수와 부원수 표하군에 향도장을 별도로 임명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향도장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군에게 길 안내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르후전투 때는 명군의 요청에 의해 조선군이 출전한 상황임에도 향도장을 편성한 것이다. 원수 표하군의 향도장과 부원수 표하군의 향도장이 지휘하는 부대가 모두 토병이란 점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육군의 토병은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 국경지역에 근무하던 특종 병종으로 기본적으로 교대근무방식을 적용한 다른 병종과 달리 교대가 없는 장번 혹은 장번에 가까운 방식의 근무를 했던 병사들이다.

"북도 토병 1명이 남방 기병보다 우월하다"거나, "토병 1명이 적 100명을 상대한다"거나 "남방 십졸이 토병 1명만 못하다"는 평판이 나올 정도로 북도 토병의 전투력은 유명했는데 그런 토병들을 향도장이 지휘한 것이다. 향도장과 향도장 휘하 평안도 토병들의 정확한 임무를 알 수 없으나 이름만으로 보자면 국외 원정 작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말그대로 길잡이(path finder)의 역할을 수행할 부대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명군과의 전투 협조과정에서 필요한 특수 임무를 소화하기 위해 별도로 편성한 부대일수도 있다.



■ 포수,사수,살수 비율은 2.00: 1.16: 0.84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 전기 군대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무기로 나눴을 때 팽패수(방패+환도), 총통수(화약무기), 창수(창), 검수(장검), 궁수(활) 등 5개 병종으로 나뉜다. 기병은 다시 활을 주로 쓰는 기사와 창을 주로 쓰는 기창으로 나뉜다. 하지만 실제 임진왜란 당시 육군의 경우 다수의 보병 궁수와 일부 창수 정도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고 기병도 기사 위주로 편성된 상태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이 명나라 척계광류의 병법을 도입하면서 화약무기를 운용하는 포수, 활을 쓰는 사수, 칼이나 창을 쓰는 살수 등 보병을 3개 병종으로 재편했다. 원래 척계광류의 병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살수의 비율이 높고 같은 살수라도 창, 칼류를 무기별로 세분화시켜 근접전에 우세한 왜구를 대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실제 편제에서는 포수의 비율이 중국 척계광류의 병법에 비해 매우 높고, 사수의 비율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반대로 조선 후기의 살수는 비율상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그나마 창, 칼류를 무기별로 세분화시켜 분대급인 대(隊) 단위에 편제하는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실제 구체적인 편성 비율이 같은 조선 후기라도 시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했다. 특히 어떤 때는 분대급인 대(隊) 단위 안에 포,사,살수를 혼성했던 것에 비해 또 어떤 때는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중대급의 초(哨) 단위까지도 단일 병종으로 편성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몇안되는 조선 후기 실전 사례인 사르후전투 조선군의 구체적인 포사살 비율과 그 편성은 매우 흥미로운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을 보면 <광해군일기>1618년 7월4일자에 포,사,살의 구체적인 비율이 나온다.

포수(砲手) 35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1000명, 황해도 500명
사수(射手) 3500명, 평안도 1500명, 전라도 5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1000명
살수(殺手) 3000명, 평안도 1000명, 전라도 1000명, 충청도 500명, 황해도 500명
<광해군일기> 1618년 7월4일자



하지만 이것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 9개월 전의 기록이기 때문에 실제 사르후전투 당시의 병종비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책중일록>을 보면 명나라측이 원래 조선에 요청했던 병력 규모는 총 4만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참전 경험이 있던 경리 양호(?~1629)는 "조선군의 병력 규모가 적다는 것을 잘 안다"며 "그냥 총수 1만명만 보내라"고 입장을 바꾼다. 이 때문에 한때 사르후전투 당시 조선군이 기본적으로 포수 내지 총수 위주로만 파병된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한적도 있다.

하지만 <책중일록>을 보면 전투발발 2개월 전인 1619년 1월 명나라측은 조선측에 "총수 5000명만 보내라(檄召我軍銃手五千名) "고 입장을 다시 변경한다. 이 같은 <책중일록>의 기록은 실록 다시 말해 <광해군일기>에서 교차 확인 가능하다. 원수 강홍립이 1619년 2월1일 조정에 다음과 같이 총수 편성 현황을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영(中營) 포수 1500명
좌영(左營) 포수 1500명
우영 (右營) 포수 2000명
계 3영 포수 5000명
<광해군일기> 1619년 2월1일자



1618년 7월과 비교해 포수 병력이 3500명에서 5000명으로 무려 1500명이나 늘어난 셈이 된다. 1619년 1월 명측이 총수 5000명을 파병하라는 요구에 맞춰 한 달 사이에 포수 1500명을 늘렸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이미 1618년에 포수 숫자 더 늘렸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건 중,좌,우영 3영의 병력 중 무려 5000명이 포수, 다시 말해 화약무기 운용병이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3영 병력이 약 1만명이므로 이들만으로 치면 표하군을 제외한 3영 소속 전체 전투병력의 50%가 포수가 되는 셈이다.

 

그림2. 조선측 사료인 <충렬록> 정사4간본의 조선군 그림. 활을 든 사수와 조총을 든 포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에는 나오지 않지만 문헌사료로 볼 때 사르후전투 당시 살수의 존재는 확실하다. 이 그림에서는 사수와 포수가 모두 칼을 보조무기로 휴대하고 있지만 이런 수준의 무장은 조선후기 훈련도감 등 중앙군영 소속 직업군인에서나 기대할 수 있으며 사르후전투 당시처럼 속오군과 수영패 등 지방군 위주의 병사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고비용 무장 방식이다.


사수의 경우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으나 <책중일록>을 보면 1619년 3월2일자에 "아군 포사수(我軍砲射手搏戰)"라는 표현이 나오는만큼 활을 쏘는 보병을 의미하는 보졸 사수들도 사르후전투에 참전했음이 확실하다. 사수는 원래는 포수와 동일 비율로 편성했으나 실제 파병단계에서는 포수 비율을 상향 조정한만큼, 전투 때의 실제 비율은 포수보다 줄어들었을 것이다.

살수의 정확한 병력 규모와 관련된 기록은 매우 찾기 힘들다. 다만 <속잡록>에 좌우영 살수(左右營殺手而已)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사르후전투에 살수도 참전한 것은 분명하다. 3영 1만여명 기준으로 5000여명이 포수였던만큼 포,사,살수의 비율은 대략 2:1:1 비율이 될 것이고 최초 편성당시 사수와 살수의 비율인 3.5대 3을 적용했다면 3영의 포,사,살수 비율은 2.00: 1.16: 0.84가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상의 병종 비율이 사르후전투 참전 조선군의 전체 비율은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광해군일기> 2월1일자 사료는 분명하게 중,좌,우영만 표시하고 있다. 포수 5000명은 3영 소속 포수일 뿐, 원수와 부원수 표하군에 존재할 수 있는 포수는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책중일록>을 보면 원수 표하군 소속 별장 박난영이 평양포수 200명 지휘한다고 되어 있고, 별장 신홍수는 경포수와 항왜 혼성부대 100명을 지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원수 표하군 740명 중에 대략 250명 내외가 포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원수 표하군을 보면 수영패 800명과 별무사 신출신 800명, 자원병 혹은 모병 병력 210명이 나오는데 이들중 일부도 포수일 가능성이 있지만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수영패는 평안도나 황해도의 병마절도사영에 소속된 부대를 의미하는데, 이 부대의 정확한 무기 보유 비율은 알 수 없다. 별무사 신출신도 마찬가지고 자효군이나 자모군, 토병 등도 무기별 비율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연영 외에 주력 1만3000명 중에 기병이 어느 정도 편성되어 있었는지도 흥미로운 소재다. 3영에서는 기병의 존재가 불확실하지만 원수와 부원수 표하군에는 기병 존재가 분명히 식별된다. 원수 표하군 중 별장 유태첨이 지휘하는 병력은 기병(마군) 400명이고, 별무사 신출신도 그 성격상 순수 보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수영패 중에 전마를 보유한 자가 있었다는 조선 후기 기록을 볼 때 부원수 표하군 소속의 수영패에도 상당수는 기병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모두 따져보면 병력 1만3000명 중에 최소 1000명은 기병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정찰과 보급지원 임무를 맡은 연영 소속 기병(마군) 5000명이 추가로 존재했다는 점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당시 기병 병종은 활을 주무기로 한 임진왜란형 기사 위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근접전 무기에 대해 점차 보강을 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기병인만큼 순수한 임진왜란형 기병과 달리 근접전용 무기를 동시 휴대하는 비율이 높았을 것이다.

사르후전투 참전 포수의 주무장이 조총인지 아니면 휴대용 소형 총통계열인지도 한번 살펴보자. <광해군일기> 1618년6월10자를 보면 평안도의 조총 보유량이 2000여 정으로 되어 있다. 1618년 파병준비과정에서 평안도 포수의 병력은 1000명이었다. 평안도 전체의 조총 보유량과 견주어 보건데 적어도 이들 평안도 포수들은 대부분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당시 포수들이 100% 조총이라고 볼수는 없다. 광해군대 무기제조기록을 담은 <화기도감의궤>의 기록을 통해 광해군 대에 여전히 조총 외에 소승자총통, 삼안총, 쾌창 등 조선-중국계 휴대용 화약무기가 제작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3영 소속 조선군 포수 5000명이 100% 조총으로 무장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점은 청나라 건국기의 사정을 담은 만주어 사료인 <구만주당>의 만어 만문 자료를 로마자로 전사해보면 전투당시 조선군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boo miocan emu dubei sindaci"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봐서도 입증된다. 이 로마자 전사 부분에는 boo는 만주어로 포(砲)내지 재래식 총통, miocan은 조총을 각각 의미한다. 사르후전투의 최후 단계에서 조선군은 조총 외에 소승자총통 내지 삼안총 같은 재래식 총통도 사용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평안도를 제외한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포수들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재래식 휴대용 총통과 조총을 어느 정도 비율로 보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 전투에 직접 참전했던 이민환이 <건주문견록>에서 전투 교훈을 이야기하면서 유독 조총에 대해서만 "至於鳥銃。極是遠技。而藏放甚遲"이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당시 조선군 포수의 주무기는 조총이고, 다른 재래식 총통은 비율상 그보다 적은 부차적인 무기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림 3. <만주실록>에서 묘사하고 있는 명군 모습. 조총, 삼안총, 쾌창 등의 무기가 보인다. 비율은 다를 가능성이 있지만 화약무기의 구성 자체는 명군이나 조선군이나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당시 조선군은 분대 단위에서 포,사,살을 혼용하는 편제였을까 아니면 중대(초) 단위에서 무기별로 운용하는 방식이었을까.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책중일록>에서 별장 1명이 평양 포수 200명을 한꺼번에 지휘하는 것을 보면 별장 휘하의 병력에 사수나 살수가 혼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최소한 초 단위에서 무기별로 분할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그림 4. <충렬록> 정사4간본의 조선군 그림. 화약무기는 조총 일색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는 충렬록 3간본이나 4간본의 목판이 만들어지던 1770~90년대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고, 1619년 당시에는 조총을 주력무기로 일부 소승자총통이나 삼안총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종 요약>
◇ 사르후전투 당시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 병력은 1만3000명이고, 이와 별개로 정찰임무와 후방 병참선 경계 임무를 맡은 기병 5000명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 사르후전투 당시 조선군은 영-부-사-초식의 조선 후기형 편제에 따라 편제되어 있었고, 각 영의 구체적인 편제 방식은 1영-3부-9사-27초 방식의 3각 편제를 기초로 약간식 가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 최초에는 한후장, 척후장 등 제승방략식 전투편성에 따른 특수임무 지휘관 편성을 고려했으나, 실제 파병 때는 이 같은 편제를 적용하지 않고 표하군에 별장(別將)을 편성해 이들로 하여금 진지 건설, 연락 임무 등 특수 임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 표하군을 제외한 3영 소속 병력 1만여명 중 조총 등 화약무기를 보유한 병력은 5000명이다.
◇ 표하군을 제외한 3영 소속 병력을 기준으로 화약무기와 활, 칼과 창을 주력무기로 각각 휴대한 포수:사수:살수의 비율은 2.0:1.16:0.84였을 가능성이 높다.
◇ 연영 소속 기병 5000명 외에도 원수와 부원수 표하군에도 대략 1000명 내외의 기병이 추가로 편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군 포수의 무기는 조총 위주였을 것으로 보이나 만주족 사료인 <구만주당>의 기록으로 볼 때 일부는 재래식 총통을 휴대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후보로는 승자총통, 삼안총, 쾌창류를 고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