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술고래' 세조와 술시합 벌이다 죽은 신하들 여럿

구름위 2013. 6.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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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복이었던 신숙주·구치관에 장난 질문해서 罰酒 먹이기도 취중 실언할 땐 파직·사형도

 

세조(世祖)는 쿠데타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질들이 참으로 많은 임금이었다. 게다가 그는 친형제들과 임금 자리에 있던 조카(단종)까지 죽였기 때문에 적어도 사필(史筆)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역사적 평가를 일단 유보해 두고 인간 세조를 들여다보면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스케일이 컸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호걸이었다. 아버지 세종처럼 은밀한 방식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불교를 숭배했다. 아마 조선 국왕 중에서 이처럼 내놓고 불교를 신봉했던 인물은 태조와 세조 두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세조 하면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는 대단한 애주가(愛酒家)였다. 스스로도 호음지벽(好飮之癖)이 있다고 밝힐 정도였다. 문제는 애주나 호주(好酒)보다는 호주(豪酒)하는데 있었다. 너무 많이 마셨다. 횟수도 너무 잦았고 한번에 마시는 양도 너무 많았다.

"공신(功臣)들이 과음(過飮)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으니, 이계전(李季甸) 윤암(尹巖)같은 이가 그러하였다. 또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계양군(桂陽君) 이증(李 曾) 중추원 영사 홍달손(洪達孫) 등은 비록 죽지는 않았더라도 또한 이미 병들어 파리해졌으니, 이것은 크게 옳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한결같이 금(禁)하여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신숙주로서는 마음 속으로 뜨악했을 것이다. '아니, 온 조정을 술판으로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데 저런 말씀을 하시나?' 일단 신숙주는 금주(禁酒)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공신들의 경우 과음(過飮)은 금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신숙주가 영의정이 되고 구치관이 우의정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공신들 중에서도 세조가 특히 아꼈던 인물이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었다. 세조는 늘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중국 한나라의 책략가)이고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당나라의 명신)"이라 평했고, 문신(文臣)이면서도 군사에 밝아 여진토벌에 공을 세운 구치관에 대해서는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라고 극찬했다.

세조는 영의정 신숙주와 우의정 구치관 두 정승을 내전으로 불렀다.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술자리를 베풀고서 "내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경(卿)들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말한 다음 '신정승!'하고 부른다. 이에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나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했구려"하며 신숙주에게 큰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물론 '구정승!'했을 때도 구치관이 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큰 잔의 벌주를 마셔야 했다. 세조 자신은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종일 벌주를 마시다가 몹시 취해서 파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유쾌한 자리였다. 술자리가 잦았기 때문에 사고도 많았다. 정인지는 여러 차례 만취하여 세조에게 '너(爾)'라고 불렀다가 파직당하는 등의 곤욕을 치렀다. 세조7년 성균관 대사성 서강(徐岡)은 세조와 불교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벌주를 연거푸 받아 마시고 만취해 불경스러운 말을 했다가 결국 사형을 당했다. 세조12년에는 공신 양정이 술김에 퇴위(退位)를 건의했다가 참형을 당해야 했다.

사실 세조에게 술자리는 단순한 유흥(遊興)이 아니라 통치행위였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자리를 열었다. 그러나 세조8년12월 세조가 역시 술자리에서 세자에게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술을 마시고자 하면 너와 여러 장상(將相)들하고만 마셨다. 결코 궁첩(宮妾)들과 마시지 않은 것은 네가 본 바 이다."

분명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호색(好色)은 아니었다. 실제로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 외에 근빈 박씨라는 딱 한 명의 후궁만 두었다. 호주(好酒)형 호걸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술자리'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재위기간이 세조보다 5년이나 더 길었던 태종 때 '167건'인 데 반해 세조 때는 '467건'이다. 물론 '술자리'만 검색했기 때문에 반드시 태종이나 세조가 열어준 술자리는 아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다. 32년 재위했던 세종 때도 91건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