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연산군에 충성맹세, 하루아침에 반정공신 책봉

구름위 2013. 6. 2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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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① 폐위 이후

 

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 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것이 영원히 반복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료의 편파성이다. 죽은 자 이상으로 쫓겨난 군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노산군일기』(단종실록)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가 모두 그렇다. 쫓아낸 쪽의 일방적이고 악의적인 기록만 가지고 그 시대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인 재위 3년(1497) 마치 자신에 대한 후대의 비난을 예언한 듯한 말을 남긴다.

“유왕(幽王)·여왕(여王)이란 이름이 붙으면 비록 효자나 자애로운 자손일지라도 백세(百世) 동안 능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3년 6월 5일).”

주(周) 유왕(幽王:재위 BC 781~771)은 미녀 포사(褒사)에게 빠져 주 왕실을 무력화하고 춘추시대로 접어들게 했던 용군(庸君)이며, 주 여왕(여王:재위 BC 857~842)은 폭정하다가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난 폭군이었다. 연산군이 하지 않은 일까지 역사서에 써 놓아 ‘유왕·여왕’이라고 이름 붙이면 자신이 장차 어떻게 변명하겠느냐는 뜻이다. 연산군은 재위 5년(1499) 8월에도 같은 우려를 했다. 마치『연산군일기』에 자신이 희대의 악한이자 음란한 폭군으로 그려질 것을 예견한 듯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쫓겨난 직후 시작됐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9월 2일에 쫓겨나는데 여드레 후인 9월 10일 정승 및 김감(金勘)이 중종에게 “연산군이 스스로 지은 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實錄閣)에 소장된 ‘경서문(警誓文)’을 다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건의했다.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자는 주청인데, 중종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날로 불태워졌다. 김감이 이런 주청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경서문’이 자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경서문’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한 달 전인 재위 12년(1506) 7월 29일 바쳐졌다. 그날 연산군이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거동하자 영의정 유순(柳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서문’을 바쳤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제자리가 있는 것이다(天尊地卑 乾坤定矣)”는 『역경(易經)』의 한 구절로 시작하는 ‘경서문’의 뒷부분은 “진실로 이 마음이 변한다면 천지와 귀신이 있습니다. 견마(犬馬)의 정성이 삼가고 삼감[삼감]을 이길 수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라고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연산군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의식이 끝나자 도승지 강혼(姜渾)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며 ‘경서문’을 받들고 실록각으로 가 영구히 간직하게 했다. 영의정 유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올렸지만 ‘경서문’에 백관의 이름이 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23명의 이름만 올라갔는데, 이들이 연산군이 쫓겨나는 날까지 의정부와 육조, 승정원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했던 핵심 실세였다. 한 달 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폭정의 동반자 또는 조력자·앞잡이로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먼 오지로 유배되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중종반정 때 23명 중 화를 당한 인물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그의 동생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과 좌참찬 임사홍(任士洪)만 반정 세력에 살해됐다. 나머지 스무 명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스무 명 전원이 중종을 추대한 공으로 정국(靖國) 공신에 책봉된다. ‘경서문’을 올릴 때의 이들 스무 명의 면면과 직책을 보자.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판윤 구수영(具壽永), 좌찬성 신준(申浚), 판중추(判中樞) 김감, 우찬성 정미수(鄭眉壽), 판중추 박건(朴楗), 예조판서 송질(宋질), 공조판서 권균(權鈞), 도승지 강혼, 우참찬 민효증(閔孝曾),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 좌승지 한순(韓恂), 병조판서 이손(李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우승지 김준손(金俊孫), 좌부승지 윤장(尹璋),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 동부승지 이우(李우)’.

연산군이 폭군으로 쫓겨났다면 무사할 수 없는 직책들이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연산군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에 분노해 반정을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별명이 ‘지당(至當) 정승’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연산군의 말에는 무조건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만 반복하던 인물들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가지고 무오사화를 일으켜 연산군 폭정의 단초를 열었던 유자광은 반정 정권의 제거 1순위에 올라야 했으나 거꾸로 정국 1등공신에 책봉됐다. 도승지 강혼은 『연산군일기』 12년 7월 5일조에 “연산군이 승정원에 시를 내리면 강혼 등이 극구 찬양하므로 연산군 역시 그 말을 믿어 총애가 더욱 융성해졌다”고 적고 있고, 우부승지 조계형은 반정 당일 수챗구멍으로 도망갔다가 공신에 책봉되자 창성군(昌城君)이란 군호(君號) 대신 수구군(水口君)으로 불릴 정도였다. 좌승지 한순은 여동생이 신수영의 부인인 것을 믿고 조관(朝官)의 머리를 잡아끌 정도로 세도를 부리고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건물을 지을 때 독책(督責)이 성화 같았다는 인물이었다. 유순정을 제외하면 정변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반정 당일 밤 말을 갈아탄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폐출된 지 20여 일 되는 중종 1년(1506) 9월 24일. 빈청(賓廳)으로 대신들이 모였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朴元宗)과 유순정·유자광·구수영을 비롯해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합동으로 연산군의 아들 문제를 주청하기 위해서였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 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오래 둬서는 안 되니 일찍 처단하소서.”

세자와 창녕 대군은 왕비 신씨(愼氏) 소생이었고, 양평군과 이돈수는 후궁 조씨 소생이었다. 세자 이황이 열 살이었으니 나머지는 더 어렸는데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청이었다. 중종은 조카들을 죽이라는 주청에 “이황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고 일단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고, 대신들은 다시 재촉했다.

“전하께서 이황 등에 대한 일을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중종일기』 1년 9월 24일)”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면’이라는 말은, 혹 이 아이들 중 누가 왕위에 올라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살려면 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종은 “이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며 네 형제를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그렇게 네 형제는 9월 24일 당일로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열 살짜리 큰형 아래 갓난아기를 갓 벗어났을 세 동생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약사발을 마셔야 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의 『연산군일기』는 사약을 내릴 것을 주장한 구수영에 대해 “구수영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세종의 아들)의 사위인데, 그 아들이 또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 들어 간사한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미녀를 사방에서 구해 바치자 왕이 혹하여 구수영을 팔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들 구문경(具文璟)이 연산군의 맏사위였으므로 세자는 며느리의 친동기였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서 “나라에 도가 있으면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도(道)를 논할 것도 없이 어제까지 임금으로 모셨던 연산군을 배신하고 그 흔적 지우기에 나섰던 것이다. 도대체 연산군 재위 12년의 진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