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완전범죄 꿈꾼 조선시대 흉악범

구름위 2013. 6. 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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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를 꿈꾸었던 김수온(金守溫) 

순조임금  29년인 1829년 11월 9일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위(申緯)는, 수적(水賊=해적)의 괴수(魁首=두목,우두머리) 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해, 그와 공모한 10인을 파주(坡州) 문산포(文山浦)에서 추적하여 일망타진하였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강화유수가 김수온 일당을 검거한 데에는, 같은 패거리였던 이명상(李命祥)의 고발이 주요하였다.


이명상은 김수온 계획한 해적질이나 도적질등에는 동조하였지만, 그의 범죄행위가 국가를 전복시킬만큼 위협적으로 발전하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고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유수는 김수온 일당들을 대질심문한 끝에 14명의 인명을 결박시킨체로 바다에 던진 추가범죄를 밝혀냈으며,  주모자가 김수온이라는 사실도 알아 내었다. 뿐만 아니라 10만냥에 해당하는 작물을 압수 확보함은 물론 돈과 물건을 건네준 작물아비까지 적발하여 범죄사실입증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서해안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해적들을 일망타진한 일대쾌거였다.

그런데 강화유수는 이러한 자신의 공로를  치켜 세우기 보다는 직접 공초한 내용이 아주 더없이 흉패(凶悖)하여 인신(人臣)으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며, 오히려 그들의 만행에 치를 떨 정도였다.
그렇다면 도데체 차마 듣기조차 거북할 정도로 흉악하다는 그들의 죄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김수온의 죄상은 워낙 잔혹하고 대담하여, 지방관청이 아닌 중앙 포청(捕廳)에 이송되어 처리되었다. 강화부로부터 범인과 공초(供招)기록등을 인계받은 포청은 조정에 그들의 범죄행각과 죄상이 자세하게 기록된 보고서를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수온은 원래 소가죽과 홍삼을 가지고 북경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장사치 였다. 그런데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재산을 거의 탕진하게 되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범죄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우선 김수온은 평소에 알고지내던 박완식(朴完植- 주먹패로 추정됨) 형제를 비롯하여 10여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난지도(蘭芝島)에 사는 뱃사람 차여진(車汝眞)으로 하여금 소가죽을 배에 싣는다고 속인 후 보령곶(保零串)에 배를 정박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봉(萬峰)이라는 곳에서 간단한 의식을 통해 의형제를 맺은 후 범죄를 공모한다.

김수온의 범행대상은 다름아닌 바로 차여진이 관리하고 있던 무곡선(貿穀船)이었다. 무곡선이란 조정의 곡물을 운반하던 배였는데, 차여진은 전라도 방면의 쌀을 구입할 대금 1만 5천냥이 있었다.


김수온은 처음부터 그 돈을 탈취할 목적으로, 차여진을 보령곶으로 유인한 것이다. 또한 평소 안면이 있었던 점을 이용하여 금수품인 소가죽을 실게 함으로써 이미 계획된 범죄의 수렁쏙으로 빠져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된 범죄였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었던 차여진은, 무관공복등을 착용한 후 종사관(從事官)과 포교(捕校)등 관직을 사칭하여 배를 검색한 김수온 일당에게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김수온은 소가죽이 금수품이라 협박하며 차여진외 14명을 작은배에 강제 구금시켰다. 그리고 1명씩 불러 낸 후 돈 30, 40량을 뜯어내고서는 차례로 포박하여 바닷물에 던져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차여진의 배를 확보한 김수온 일당이었지만, 김수온의 계획한 거대한 범죄행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김수온은 1만냥이 넘는 돈을 나누어 갖는대신, 다음범죄를 위한 자금과, 범행도구를 구입하고 최명렬(崔命烈)·서보운(徐普運) 등 궐안사람들과 연줄이 있는 인물을 섭외하는데 사용하였다.

문초한 내용에 의하면 그들의 범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들 6, 7인이 호복(胡服)을 입고 창검(槍劒)을 지참하여 남대문(南大門) 안으로 들어가서, 미전(米廛)에 불을 지르고 또 육조(六曹) 앞에 있는 가게방에 불을 지른 후에, 새문 밖[新門外]으로 나가 옷을 갈아 입고 배를 타고 멀리 달아난다면, 반드시 소란이 벌어 질 것이다.」

즉 그들은 서울 중앙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란을 일으켜 치안을 마비시킨 다음, 그 틈을 틈타 마음껏 범죄행각을 벌이겠다는 대담무쌍한 계획이었다. 


이런 실로 놀랄만한 보고를 접한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은 순조임금앞에서 인심(人心)의 함닉(陷溺)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변괴(變怪)가 겹쳐 일어남이 또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라며 한탄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살인죄 정도는  포청에서 담당하였지만,  워낙 흉하고 패악한 범죄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의금부에서 조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의금부로 송치된 그들의 죄상은 살인(殺人)및 재물 탈취, 도당(徒黨)을 모아 진영(鎭營)을 공격할 모의, 군기(軍器)·국가 전복(戰服)모의죄 등이었다. 여기에 밤을 틈타서 성(城) 안에 들어와 도시(都市)를 방화하여 먼저 인심을 경동(驚動)시킨 후에 이어서 근거지를 점거(占居)할려고 한 것은, 이미 반역의 형태를 갖추었음이 확실함으로 모반 대역(謀叛大逆)의 죄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김수온의 죄가 모반대역죄로 최종결정난 이상, 그는 능지처참형을 피할 수가 없었으며, 나머지 잔당  열명 역시 모두 군문(軍門)에서 참수를 한 후 효수(梟首)하여 민중을 경계시켰다. 다만 사전에 밀고하여 김수온 일당을 검거하는데 일조한 이명상만은 정상이 참작되어 유배형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치 호란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여 국가의 내란을 기도하고, 그틈을 틈타 각종 범죄를 저지른 후 유유히 도성을 탈출하려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던 수적의 괴수 김수온....

하지만 그처럼 비상한 머리를 범죄를 모의하는 것에 쓰지 말고, 상업적으로 재기하는데 썼으면 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또한 김수온의 행적은 중세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상업주의가 막 태동하던 조선근대상의 일그러진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사건이다.

▶한국사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