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왜란당시 조선의 믿기힘든 행정력

구름위 2013. 6. 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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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
【이상은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京城)과의 거리는 1일 정(程)이다.】

양주(楊州)에 주차한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李?)의 군사 6백 명,
【이상은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일 정이다.】

여주(驪州)에 주차한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에 주차한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
【이상은 왕경에 있으며 1일 반 정이다.】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천 8백 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5천여 명이다.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2∼3일 정이나 4∼5일 정이다.】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만 명,
울산군(蔚山郡)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昌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천 명,
영산현(靈山縣)에 주차한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천 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만 5천명,
창원부(昌原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陜川郡)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천 명,
의령현(宜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천명,
거창현(居昌縣)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천 명,
【이상은 왕경의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나 12∼13일 정이다.】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 주차한 본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水軍) 5천 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만 명,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8∼9일 정이나 13∼14일 정이다.】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천 명,
경성부(鏡城府)에 주차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천 명,
안변부(安邊府)에 주차한 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백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백명,
【이상은 경성 북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5∼16일 정이나 24∼25일 정이다.】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 추자한 본도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천 명이다.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4일 정도다.】

평안도 순안현(順安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4천 4백 명 내에 사수(射手) 1천 2백 80명,
법흥사(法興寺)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천 명 내에 사수 2백 23명·포수(砲手) 50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백 명
【이상은 평양부(平壤府) 동쪽에 있으며 본부와는 1일 정이다.】

용강현(龍崗縣)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천 명 내에 사수 7백 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천 명 내에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에 주차한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1백 20명,
【이상은 평양부 서쪽에 있으며 본부와의 거리는 1일 정이나 반일 정이다.】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천 8백 명,
재령군(載寧郡)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천명,
연안부(廷安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이정암(李廷?)의 군사 4천 명이다.
【이상은 왕경에서 서북쪽, 평양부에서 남쪽에 있으며 왕경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며 평양성과의 거리는 1∼2일 정이나 4∼5일 정인데 모두 대동강 남쪽에 잇따라 있다.】

위의 각처 군마(軍馬)는 합계가 17만 2천 4백 명인데,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


임진년 일본의 침략이 있고 바로 이듬해 계사년 즉 1593년 1월 11일의 기록이다.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부랴부랴 한성을 떠나 왕과 조정이 모두 의주까지 피난을 가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행정력은 각도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의병이 보유한 100명 단위까지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비록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패주하던 상황이었건만 그러함에도 조선의 행정력이 여전히 제대로 가동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경상도의 병력이 눈에 띄는데, 임진년 초반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그대로 유린되었다고 여겨졌던 경상도에서 바로 이듬해 7만 7천 명, 당시 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병력의 45퍼센트에 해당하는 병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의병이라고 해봐야 1만 2천이 고작, 나머지 6만 5천은 모두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 경상좌도 절도사 박진,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보유한 관군이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그렇게 허무하게 일본군에 패해 흩어졌던 경상도에 어느새 이렇게 많은 병력이 모이게 된 것일까?

사실 임진년 전쟁에서 죽거나 다쳐 사라진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부산과 동래, 밀양 등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느라 피해가 발생했을 뿐, 그나마도 이들 성에서 전몰한 병사는 전체 병력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 이외의 병력은 미처 싸워보지도 않고 전쟁이 나자마자 모두 도망쳐 흩어졌다. 그것도 병사들이 먼저 도망쳐 흩어진 것이 아니라 박홍과 원균, 김수 같은 지휘부가 먼저 겁을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기껏 제승방략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 집결했던 병사들마저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쳤다고 모두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임진년의 충격이 가시자 조정에서 파견된 김성일과 김늑 등을 중심으로 다시금 병력과 행정력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에서 흩어진 병력들도 다시 조선 조정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관군에 합류하지 않은 병사들은 각 지역의 명사들의 아래에 모여 의병이 되었다. 도망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쟁 초반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다시 결집하여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임진년 그렇게 허무하게 패한 것은 다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지휘부 책임이었다 할 수 있다. 병사들은 여전히 싸울 의지가 충만했는데, 그래서 처음의 혼란이 가시자 다시금 관군으로, 혹은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의 싸움에 나서고 있는데, 심지어 수군에 속해 있던 병력마저 수사들이 배를 불사르고 도망치자 육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의 쌍무을 계속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러함에도 정작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이며 관리들이 먼저 도망치고 말았으니 제대로 싸움이 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임진년의 싸움에서 김성일의 공이 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이미 민심의 동요를 꿰뚫어 보아 그것을 수습하고자 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서는 초유사로 임명되어 적지나 다름없던 경상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력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것은 장차 의병과 관군이 연합작전을 통해 임진년 당해 이미 경상우도를 회복하고 진주성을 지켜내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김성일의 공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일방적으로 패주했다고 여겨지는 임진왜란에서 이미 이듬해 17만 이상의 병력이 결집되어 있고, 그것을 조정에서 1백 명 단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사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고 나면 행정력이고 뭐고 마비되어 버리는 것이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전장에 나선 장수는 적군에 투항하고, 심지어 왕의 측근들조차 배반하여 왕을 팔아 넘기려 하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조차 조선은 저와 같은 치밀하고 정교한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만큼 조선의 시스템이 얼마나 잘 정비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초반의 불리함에도 끝내 나라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러한 바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아쉽다면 저 17만 이상의 병력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인데, 일단 경상도를 함락당한데다,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피폐해지면서 조선 조정은 더 이상 10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할 재정적 여력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고서는 그들에 대한 보급까지 책임져야 했던 데다, 정유재란에 이르러서는 진주와 남원이 뚫리며 호남의 곡창지대까지 유린되었으니 당장 10만의 병력조차 언감생심이었다. 이것은 역시 또한 당시 조선이 갖고 있던 한계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웅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순신의 공이 가장 컸다. 명의 참전 역시 일본군에게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이 되었고, 스스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졌던 의병이며 관군에 속한 이름없는 용사들의 활약 역시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왕이 수도를 벗어나 북쪽 끝으로 도망치던 상황에서조차 이처럼 왕의 명령이 각지로 전달되고 각지의 상황이 왕에게로 다시 모이는 시스템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만일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전장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고, 가장 강력한 정예병을 보유한 장수를 압송해 처벌하려 했다면 당장 반란이 일어나도 몇 번은 일어났을 것이다. 조정이 건재하다면 모를까 수도를 버리고 땅끝까지 도망쳤었던데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 군량으로 모아놓을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이고 보면 어지간해서는 다른 마음을 먹기 쉬웠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기꺼이 조정의 잘못된 결정을 따랐다. 조정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만을 비판할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모면 삼도수군통제사라고 하는 자리도 전쟁 도중 조정에서 급조해 내린 것이다. 당장 회사에서 새로이 자리를 하나 만들고 윗서열에 자신보다 입사도 늦고 진급도 늦은 사람을 앉히면 누가 기꺼이 따르고 싶어 할까? 그러나 당시 원균은 그러한 조정의 결정에 기꺼이 따랐다. 속내야 어찌되었든 뒤로 따로 뭔 짓을 하든 이순신이 부당한 명령을 기꺼이 받들어 따르듯 조정이 부여한 삼도수군통제사라고 하는 권위에 대해서는 복종했다. 그리고 그것은 원균에 비해 아랫서열이던 이순신이 무리없이 삼도 수군의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다시 말해 이순신조차 죽일 수 있었던 바로 그러한 탄탄한 시스템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압도적인 일본군을 상대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멸망에 이르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서조차 최악의 결과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나 할까? 전장의 장수를 두려워해 벌을 줄 것도 주지 못하고, 장수는 그것이 부당하다며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나라였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져 멸망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아주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장 전쟁이 터지자 조선 조정이 한 일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거나 혹은 위협에 노출되었을 지역에 대한 감세였다. 어차피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할 바에야 인심이나 사자는 어찌 보면 얄팍한 속셈이기는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세금부터 올리고 보는 다른 나라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하긴 그 전에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멀어질까 저어하여 일본군의 침략이 침략할 것을 알면서도 전쟁준비의 속도를 조절하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있었기에 왕이 도망치고 군대가 무너져 흩어진 상황에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조정에 붙들어 둘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나라여서가 아니다. 백성이어서도 아니다. 그 나라가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한 목숨 바치더라도 나라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나라를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것을 조선은 알았고, 그래서 처음의 어려움에도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끝내 나라를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이 병자호란의 참화를 한 번 더 겪고서도 다시 200년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다.

나라가 강하다는 건 단순히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물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모두 강국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다.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승복할 수 있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온전히 제대로 돌아갈 때만이 비로소 그 나라는 자신이 가진 바 모든 힘을 한 데 모아 쓸 수 있게 되어 강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인구 150만의 스웨덴이 당시 유럽 최강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을 유린하여 마침내 사실상 해체로 몰아갔던 것처럼. 고작해야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장차 지중해세계를 통일할 수 있게 만든 바로 그것처럼.

이러한  점은 그로부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선진국으로 이끌 것인가.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어디에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그런 나라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심을 알았기에 스스로 위기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것을 잊는 순간 제대로 저항조차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조선에서.

다른 이야기지만 조선이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상대적으로 준비가 소홀했던 것은 당시 조선인의 지리지식이 큰 몫을 했다. 조선인에게 있어 일본은 아주 작은 나라였고, 설사 바다를 건너 군사적인 도발을 하려 해도 1만이나 2만 정도가 고작이라 여기고 있었다. 일본 역시 조선을 자신보다 큰 나라라 잘못 알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조선만 탓할 수는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마 당시 조선의 왕이나 신료들이 일본의 실제 크기나 인구에 대해 알았다면 저리 느긋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전쟁이 일어나고,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 왕성이 있는 한양까지 모조리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이듬해 무려 17만 4천 2백이라... 과연 지금 우리나라라면 어떠할까?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까지 도망치고, 전방의 지역들이 모조리 함락된 상황에서도 저리 버틸 수 있을까? 설마 싶기는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요즘 같아선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떨까? 과연...

 

http://kr.blog.yahoo.com/sawoochi/1243210

 

 

▶ 임진왜란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백과사전 보기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祿]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편당(), 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란길에 오르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의 서천(西)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적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을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모함에 의해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