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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전투 <3> 만주족의 병력 재배치와 유정의 최후

구름위 2013. 7. 1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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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전투 <3> 만주족의 병력 재배치와 유정의 최후

1619년 3월4일 심하 부근에서 숙영한 조명연합군은 아침부터 행군을 시작했다. 조선군이 이동을 시작한 시점은 진시(辰時), 다시 말해 아침 8시 전후였다. 명군 주력이 출발한 시점은 이보다 앞선 새벽이었다.

<책중일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유정 제독은 이날 새벽 "가합령 밖에는 적이 전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행군경로 좌우의 산 능선을 타고 정찰병력(山上候軍)을 따로 배치할 정도로 신중하게 병력을 운용하던 유정 제독은 이 같은 보고에 평정심을 잃었다. 마침 그 이전에 서북 방향에서 포성 3발이 울렸다. 두송군 등 요동에서 직접 공격해 온 명군이 근처로 온 신호일 수도 있었다. 이 같은 정황을 보고 현 상황이 결정적 국면이라고 생각한 유정 제독은 예하 부대에게 전 속력으로 행군할 것을 지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나라군의 상황에 대해 이민환은 "명나라 장수가 급히 말을 달려 수십 리를 앞서가며 부대를 나눠 부락을 약탈하는데 대오를 갖추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만주당>도 암바 바일러 다이샨이 아부달리 언덕에서 명군 1만 명과 최초로 조우했을 때 "빠르게 수색하면서 전진하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어 공격을 서두르던 당시 명군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만주실록>에서 유정군 선봉을 공격하는 만주족 기병의 모습.




■ 만주족의 병력 재배치과 투입 병력 규모
하지만 이 같은 유정 제독의 판단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황청개국방략>에 따르면 3월2일 두송과 마림군을 모두 격파한 만주족의 후금은 명나라 유정 휘하 부대를 차단하기 위해 일단 다르한히야(한문자료의 호이한)가 이끄는 병력 1000명을 급파했다. 이어 아민 바일러(한문자료는 2패륵 혹은 2왕)에게도 2000명의 병력을 지휘해 뒤따르도록 했다.

3일 승리를 축하하는 'tuu uweceme(조선의 둑제와 유사한 군사 의식)'행사를 치른 후 누르하치는 암바 바일러 다이샨(한문자료는 대패륵 대선 혹은 대왕), 망굴다이 바일러(한문자료에는 3패륵, 혹은 3왕)를 유정을 막기 위해 이동시켰다. 뒤이어 홍타치 바일러(한문자료에는 4패륵 혹은 4왕)까지 유정을 막기 위해 보냈다.

두송, 마림군을 격파했고 이여백 군이 회군의 움직임을 보이는 마당에 남은 적군은 유정 제독이 지휘하는 우익남로군의 조명연합군 뿐이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후금 만주족의 대응이 지나치게 느긋하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특히 암바 바일러와 홍타치 바일러를 바로 유정군 방어를 위해 보내지 않고, 승전축하행사까지 치르는 대목에선 여유까지 느껴진다.

이에 대해 구 일본군 참모본부 <명청결전>에서는 "누르하치가 명군의 움직임을 손바닥보듯이 파악하고 있었기 여유를 부린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실 이보다 2~3일 빨리 유정이 공격해 왔다면 모르지만 다른 방면의 명군이 모두 패전, 혹은 회군한 마당에 누르하치 측이 긴장감을 느낄 이유는 크게 없었다. 만주족의 병력 재배치가 늦어진다해도 전투 장소가 조금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뿐, 이제 승패가 바뀔 여지는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조명연합군으로 구성된 우익남로군을 방어하는데 투입한 이들 만주족 병력은 4일 오전 유정 휘하의 명군 주력은 물론이고 4일 오후 후챠 들판에서 조선군과 전투를 치른 바로 그 병력이기 때문에 그 구성을 다시 한번 세부적으로 따져 보자.

<황청개국방략>에 따르면 유정 제독의 우익남로군을 막기 위해 암바 바일러 다이샨, 아민 바일러, 망굴다이 바일러, 홍타치 바일러 등 4명의 바일러급을 파병했다. 다이샨은 때에 따라 1~2기, 나머지 바일러 등도 8기 중에 각 1기씩을 지휘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그 같은 편제 개념을 기초로 당시 이들이 만주 8기 중에 4~5기를 동원해 전투에 참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유정군과 상대할 때의 전투기록에는 몇 기가 투입되었는지 혹은 실제 병력이 얼마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사르후 등 이보다 앞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황청개국방략>이 좌익 4기, 우익 4기 등 구체적인 편제를 기록한 것과 달리 3월4일 명나라 제독 유정과의 전투에 투입한 만주측 병력에 대해 <구만주당>과 <황청개국방략>은 좌익병(hashu ergi galai cooha)과 우익병(ici ergi galai cooh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구체적인 기의 숫자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아민 바일러가 지휘한 병력은 2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가 지휘하는 양남기 전체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병력은 더더욱 짐작하기 힘들다.

일단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이민환이 <책중일록>에서 적 병력이 3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암바 바일러, 홍타치, 망굴다이는 자신의 주력 병력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황청개국방략>에서 3패륵이 유정군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만주당>에서 유정을 공격할 때 3패륵 망굴다이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망굴다이의 정람기를 암바 바일러가 지휘했거나, 아니면 망굴다이가 독립작전을 펴지 않고 철저하게 암바 바일러의 통제 아래 작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홍타치 바일러의 우익 정백기의 참전 가능성은 비교적 높고, 암바 바일러와 망굴다이의 동원 병력은 분명하지 않으나 정홍기와 정람기의 모두 혹은 두 기 중 하나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 8기병 1개기는 25~30여 개 니루(1개 니루는 300명)가 편제가 되어 있었으므로 유정군을 공격하는데 만주족 병력 최소 1만4000여 명 많게는 2만4000여 명 이상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아민 바일러의 우익 양남기 일부 병력, 그리고 다르한히야가 이끄는 병력 등 3000명이 추가된다.



 
<황청개국방략>에서 1619년 3월4일 유정군과 조우할 때의 만주족 군대를 설명한 대목. 대패륵(암바 바일러), 3패륵(망굴다이 바일러), 4패륵(홍타치 바일러)의 출전을 명기하고 있다. 하지만 <구만주당>는 <만문노당> 계열의 만주어 사료에는 3패륵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2패륵 아민과 다르한히야가 지휘하는 3000명의 병력은 암바 바일러가 이끄는 주력보다 앞서 와르카시 숲 반대쪽 입구에 도착해 매복 중이었다. 대패륵은 그냥 같은 줄에 그대로 쓰면서 4패륵에 대해서만 행을 바꿔 존경을 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4패륵이 훗날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에 준하는 예우를 해서 편집을 했다.



■ 암바 바일러와 홍타치 바일러의 공격
만주족의 사료인 <구만주당>에 따르면 암바 바일러 다이샨이 이끄는 만주족 주력 병력은 3일 하루종일 행군해 4일 아침 기야하이(가하이,가합) 숲에 진입하고, 사시(오전 10시 전후)에는 와르카시 숲의 입구에 도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만주족 주력 병력은 우익남로군 유정이 지휘하는 명군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암바 바일러와 홍타치 바일러는 즉시 작전을 논의했다.

<황청개국방략>에 따르면 홍타치 바일러는 "형인 다이샨이 현 위치에 머무르면, 자신이 아부달리 언덕 산 위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명군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암바 바일러 다이샨은 "자신이 좌익병을 이끌고 서쪽에서 공격하면, 너(홍타치)는 우익병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되, 부하 장수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후방에서 감독할 뿐 경솔하게 직접 공격에 나서지 말라"고 말했다.

만주족 병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방심하고 진군하던 명군 선봉 1만 명을 향해서 갑자기 만주족 기병의 돌격이 시작됐다. <황청개국방략>에 따르면 홍타치의 우익병 중에 30명의 정예기병이 먼저 산위에서 아래로 명군을 공격하고 뒤따라 우익병 주력이 명군을 덮쳤다고 되어 있다. 다이샨의 좌익병도 산의 서쪽에서 협공을 가해 명군을 격파했다.

<구만주당>도 전체 흐름은 비슷한데 전투 장면이 조금 더 자세하다. 홍타치 바일러가 최초로 유정군 선봉 1만을 공격할 당시 명군은 뜻밖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중국 보병들은 포와 조총을 멈추지 않고 쏘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nikan cooha boo miocan be ambula sindeme jabduhaku)"라고 묘사할 정도다. 이처럼 초반에는 전투상황이 혼전(afanuhai) 상태로 진행되었지만 암바 바일러 다이샨이 산의 서쪽에서 좌익병으로 전투 중심지역을 강타하면서, 산 위의 명군이 동요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단 진영이 붕괴된 보병은 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는 법이다. 홍타치의 우익병과 다이샨의 좌익병이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하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 요양총병 유정의 최후
마침 와르카시 숲의 반대쪽 입구에는 다이샨과 홍타치보다 먼저 이 지역으로 급파된 다르한히야와 아민 바일러의 병력이 매복 중이었다. <구만주당>에 따르면 와르카시 숲의 남쪽 입구에서 매복 중이던 다르한과 아민 바일러의 병력은 명군 주력의 절반 이상이 지나간 후 명군 후속 부대의 후면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가 시작된지 오래지 않아 다이샨과 홍타치가 명군 선봉 1만명을 전멸시키고 와르카시 숲 반대쪽 입구로 다가왔다. 다이샨과 홍타치는 다르한과 아민 바일러가 공격 중인 명군 후속부대의 앞쪽을 공격했다. 명군 후속부대의 앞뒤로 동시에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황청개국방략>은 이때 홍타치 바일러가 유정군의 후대를 공격해 미처 진을 형성하기도 전에 기습공격을 가해 전멸시켰다고 묘사한다. 이처럼 명군 후속 부대는 앞뒤가 차단 당한 상태에서 만주족 기병의 맹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명나라 유정 제독도 이 곳에서 전사했다. <구만주당>도 이 전투에서 "amba summinguwan liojing(대총병관 유정을 의미) be bahabi waha"(대총병관 유정을 잡아 죽였다"고 명기하고 있다.

현직 요양 총병이자 전투에서 우익남로군의 지휘관이자 유정(劉綎)은 나름 용장으로 이름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품은 탐욕스럽고 교만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고,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서 유정이 일본군의 뇌물을 받고, 고니시 유키나카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설은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1583년 버어마(缅寇)의 공격을 저지했고, 나웅(羅雄)의 반란도 진압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도 부총병으로 참전했고, 정유재란 때는 제독으로 서로군을 지휘했다. 1612년에는 다시 사천 총병으로 달창과(達昌猓)의 반란을 평정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항상 말 위에서 무게가 120근이나 나가는 빈철도를 휘둘러 "유대도(劉大刀)"라고 부르며 경외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명사> 열전은 유정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다"면서도, "여러 장수 중 가장 용감하다(諸將中最驍勇)"며 그 용감성만은 인정하고 있다.

유정의 최후 순간에 대해 칼을 가슴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폭약 위에 올라가 자폭했다는 설도 있다. 왕종안의 논문에선 유정의 최후를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정은 처음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고통을 참으며 화살을 뽑아 버리고 한쪽 손으로 대도를 휘둘러 만주족 병사 수십 명을 연달아 베어 살해했다. 유정은 얼굴에 다시 자상을 입었으나 죽을 힘을 다해 후금병과 싸웠다. 후금의 암바 바일러 다이샨이 군사들에게 일제히 유정을 향해 활을 쏘라고 명을 내리자 유정은 마침내 화살을 몸에 무수히 맞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16세기말 17세기초 동북아시아를 뒤흔든 격전지를 모두 누볐던 한 군인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 후챠 들판에 있었다는 니칸 보병의 정체
<구만주당>은 유정이 이끄는 명군 주력을 섬멸한 후 후챠(富察) 들판에서 니칸 보병과 솔호의 보병이 주둔하는 있는 모습을 봤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유정 지휘 하의 명군 주력을 와르카시 숲에서 섬멸시킨 후, "그곳에서 보니 남쪽 후챠 벌판에 니칸 보병과 솔호의 보병이 주둔한 모습이 보였다(tereci caci tuwaci julegi fucai bigande nikan solhoi yafan cooha iliha be geli sabubi)"고 기록하고 있다. 니칸은 만주족이 요동 일대에 거주하던 한족(漢族)을 지칭하던 표현이고, 솔호는 고려 혹은 조선을 뜻한다. 즉 후챠 들판에 명군과 조선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후챠 들판에서 명군과 조선군을 공격할 때는 더욱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니칸 보병들은 가지가 있는 대나무 창을 들고, 'moi 갑옷'과 'mangga ihaci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솔호의 보병들은 'hoosan i olbo'를 입고 있었다(nikan i yafahan cooha gemu gargangga ceuse moo de gida nisiububi jafababi moi uksin mangga ihaci uksin etuhebi solhoi yafahan cooha gemu hoosan i olbo etuhebi)라는 대목도 나온다.


한문 자료인 <황청개국방략>도 유사하다. "이때 명나라의 해개도와 강응건의 보병이 조선병과 합쳐 부찰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했다. 그 병사들은 낭선 장창을 들고, 등갑과 피갑을 입었으며, 조선은 지갑을 입었고, 그 투구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었는데, 화약무기를 층층이 별려 놓았다. (是時明海蓋道康應乾步兵 合朝鮮兵營于富察之野。基兵執筤筅長槍, 被藤甲皮甲朝鮮被紙甲,基胄以柳條爲之。火器層疊列侍)"

이처럼 <구만주당> 등 만문노당 계열의 만주어 사료는 물론이고, <황청개국방략>, <만주원류고> 등 한문으로 정리된 청나라측 사료는 일관되게 후챠 들판의 전투에도 명군이 참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명사> 같은 일부 명나라 관련 사료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은 사실일까. 사실 사르후전역의 최후 단계이자, 이 글의 핵심 주제인 조선군의 패전 순간을 분석해야하기 때문에 별도의 글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지만, 후챠 전투에 명군이 참전했는지 여부만 일단 여기서 살펴보도록 하자.

잘 알려져 있듯이 <광해군일기>, <책중일기>, <속잡록>, <연려실기술>, <충렬록> 등 사르후전역과 후챠전투에 관한 조선측의 거의 모든 기록은 후챠 전투에서 조선군이 단독으로 전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좌영과 우영이 만주족 기병과 싸워 전멸했고, 중영과 원수/부원수 표하군은 그 패전 장면을 지켜본 후 항복했다는 것이 조선측의 일관된 기록이다.

과연 어느 기록이 사실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측 기록이 사실로 보인다. 구체적인 묘사에서 만주족이나 명나라측 사료를 압도하는 조선측 사료에 후챠 들판의 조선군 진영에 명군이 같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와르카시 숲에서 명군이 전멸한 후 일부 명군이 조선군 진영으로 후퇴해 왔다는 표현은 있어도 강응건이 지휘하는 명군의 존재에 대해 조선측 사료에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더구나 <구만주당>이나 <황청개국방략>에 나오는 후챠 들판의 전투 묘사-화약무기의 사격과 바람이 불때 청군의 공격, 그 뒤에 이어지는 조선군 도원수 5000명이 지휘하는 진영의 포위, 조선군의 항복-는 조선군의 좌우영의 전투 장면 묘사와 그 뒤에 이어지는 조선군 원수의 항복과 일치한다. 좌우영 외에 명군과 연합한 별개의 조선군 진영이 존재하고 그 진영에서 조선군 단독부대보다 앞서 전투가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측 사료 외에도 당시 유정 휘하에서 종군했던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던 강세작의 증언도 조선측 증언과 일치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연경재전집>에 남아있는 명나라 귀화인 강세작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3월) 초4일 아침 만주병이 평야 한쪽으로 전진해 왔다. 조선 원수와 부원수는 산위에 진을 치고, 좌우영은 평지에 진을 쳤다. 만주병이 먼저 좌영을 공격해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다시 옮겨 우영을 공격했다. 우영 패잔병들이 산 위의 군대(원수 진영)로 도망갔는데, 산 위의 군대가 보고 전율했다.(初四日早朝。滿洲兵遍野而進。朝鮮元帥副帥陳山上。左右營將陳平地。滿洲兵先擊左營。一鏖而盡之。移擊右營。右營敗入山上軍。山上軍望見皆戰慄。) 강세작은 이에 앞서 유정과 교일기가 전멸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후챠 들판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의 단독 전투후 산상의 원수진이 항복했다고 명시하고 있어, 기본 흐름이 조선측 기록과 일치한다.


결국 만주족-청나라의 사료는 모종의 혼동을 일으킨 결과로 보인다. 이민환의 <책중일기>를 보면 다음날인 3월5일 4~5리쯤 떨어진 곳에서 명나라 패잔병 수천명이 산위에 포진하고 있다가 만주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군 패전과 항복을 전후에 명군 우익남로군 소속 일부 부대가 곳곳에서 각개 격파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구만주당>, <황청개국방략>에서 후챠 들판에 명나라 보병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것은 그런 전후 전투과정의 인상이 남은데 따른 혼돈으로 보인다.

 



 
중화민국 3군대학의 <중국역대전쟁사>에 실린 우익남로군 전투 상황도. 3패륵은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구만주당> 등 만문노당 계열에서 3패륵이 전투에서 활약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도의 전반적인 배치도와 피아군의 이동도 동의하기 힘들다. <구만주당>에 따르면 가하이 숲 남쪽에 아부달리 언덕이 있고, 이곳에서 암바 바일러와 홍타치 바일러가 명군 선봉 1만을 공격했다. 이어 명군 후속 1만명은 아민 바일러과 다르한히야의 매복 병력 3000명이 와르카시 숲 반대쪽 입구에서 먼저 공격하고 다시 암바 바일러는 전면에서 공격했다. 이 곳에서 후챠 들판이 보였고, 후차 들판의 전투는 조선군 단독 전투였다는 점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상황도가 이 같은 각 전투지점의 상호 관계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유격 교일기는 조선측 기록에서도 별도의 병력을 인솔하고 앞서가다 패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명군 본대와 분리해서 기동로를 표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가 최선봉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다.


<두줄 요약>
-사르후전역에서 아부달리 언덕-와르카시-후챠 전투에 참전한 만주족 군대는 암바 바일러, 홍타치 바일러가 지휘한 병력이 주력이고 여기에 망굴다이 바일러가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민 바일러 등이 이끄는 매복 병력 3000명이 추가로 있어 전체 병력은 3만명이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