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사르허전투 조선군 항복,패전, 순간

구름위 2013. 7. 1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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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허전투 조선군 항복 순간

 

-이하는 구 일본 참모본부편 '명청결전'에서 강홍립 항복 부분을 옮깁니다.

 

이리하여 3월 4일의 싸움은 저녁까지 세차례에 걸친 싸움으로 우익남로(右翼南路)의 명나라 군사들은 모조리 쓰러지고 조선군 좌우영의 약 5천명의 병사도 무너졌다. 남은 것은 조선군 중영(中營)뿐이었다. 이를 이끌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 이하는 눈앞에서 명군 및 조선군 좌우 양영이 전멸당하는 것을 보고는 만주팔기(滿洲八旗)의 용감함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선측의 기록에 따르면  "병사들을 격려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는 싸움을 벌여 활로를  열려고 해도 한 명도 응하는 사람이 없다. 양영(兩營)이 유린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넋을 잃지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기를 포기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도 있다. 몇일 동안 굶었는 데다가 목마름과 피로로 도망가려고 해도 퇴로는 끊겼고, 싸우려고 해도 사기가 완전히 붕괴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장수들은 모든 장수와 함께 단지 화약상자를 꺼내어 이것을 앞에 놓고 분신자살(自焚)하려고 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두 장수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류수남(柳秀男)을 말한다.  

 

이어서 조선측 기록은 "마침 그 때 한 군졸이 양영(兩營)에서 도망쳐나와 말하기를<적 기병(騎兵)이 진지 앞에 와서 통역을 부르고 있는데, 통역이 없어서 응답할 수 없다>라고 하자 두 장수는 통역인 황연해(黃連海)를 시켜 대답할 수 있도록 했다. 청나라측이 말하기를<우리와 중국과의 사이에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너희 나라와는 원래 적이 아니다. 그런데 왜 와서 싸우는가?>라고 하자, (조선측) 통역이 대답하기를<양국간에는 어떤 원한도 없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온 것은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 나라는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일로 인하여 화해를 하기위해서 왕래가 있었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청나라기록과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청나라의『滿文老檔』에는 단지 그 어쩔수 없는 사정이 보다 확실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측이) 한 사람을 시켜 소기(小旗)를 들려 (청나라 진영에) 보냈다. (조선측이 말하기를)  <우리 조선은 이 전쟁에 좋아서 참가한 것은 아니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 성곽을 모두 빼앗겼는데, 이 우환(憂患)에서 명나라 군사들은 우리 조선을 지원해 주었다. 그 보은으로 이번 전쟁에 참가했다. 너희들은 이미 명나라 군사들과 섞여서 싸운 우리 조선의 군사들을 전부 죽였다. 이 진영에는 단지 조선의 군사들뿐이지만, 밖에는 명나라의 일개 유격과 그를 따르고 있는 군사들이 있다. 우리들 목숨을 구해주면 명나라 유격(遊擊)과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명나라 군사들을 잡아 너희들에게 넘겨 주겠다>  이에 (청나라) 대왕(大王)은 이와 같이 투항하면 그것으로 좋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투항시키지 않고 죽일것인가? 죽이는 것보다도 목숨을 살려주는 쪽이 평판이 좋지 않을까?>라고 여러 왕과 대신들은 의논했다"

 

조선측의 기록은 청군의 권유에 의해 투항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반하여, 청측의 기록은 조선이 먼저 다가와서 투항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선측으로서도 투항하더라도 상대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청나라도 아무 이익도 없는 결전은 끝내려고 일단 투항을 권유하는 사신도 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였다. 교섭 결과 조선군은 투항하게 됐다. 조선군이 명나라 군사를 붙잡아 청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불쌍한 명나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는 목매달려 죽었다.

 

사르허전투 조선군 패전 순간

-당시 조선군 종사관 이민환의 목격담을 담은 책중일록을 편역한 겁니다.  

 

 

 

초사흘 진시(8시)에 행군을 했다. 명나라 장수(원문의 표현은 천장)가 앞서갔다. 아군의 좌, 중, 우영(左, 中, 右營) 뒤를 이어 전진했다. 도로는 평탄하지만 산속의 계곡이기 때문에 복병(伏兵)을 경계해야만 한다. 간신히 수십리를 걸어서 부차(富車)의 들판에 이르렀다

 

(청나라의 본거지인) 노성(奴城)으로부터 60여리를 앞둔 지점에서 대포 소리가 세 번 연달아 났다. 원수 강홍립(姜弘立)은 말을 달려 길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모래섞인 먼지가 하늘에 가득찼다. 원수 강홍립은 이것은 분명 적이 습격해 올 징조라고 판단, 좌영(左營)으로 하여금 앞쪽의 높은 봉우리(高峰)에 진을 치게하고, 중영(中營)은 자신이 지금 올라온 곳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우영(右營)은 남쪽 주변에 진을 치게 했다.

 

중영과 좌영은 곧바로 진을 펼쳤으나 좌영은 평평한 들판에 이미 진을 쳤으므로 원수 강홍립이 별장 박난영에게 좌영으로 달려가 높은 언덕으로 진을 옳기도록 전하라고 명했으나 적의 기병이 이미 (좌영) 진앞에 닥쳐서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근처 (만주족) 부락에 집이 100여 채 있었는데 명군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아군) 진영을 뒤덮었다. 중영 진앞에 높은 언덕이 있어 주변의 진중을 살필만 했다. 원수 강홍립이 별장 황덕창을 시켜 일사(一司)의 부대를 이끌고 그 곳에 주둔하게 했다. 적이 이르기도 전에 황덕창이 부대를 이끌고 (중영) 진영으로 돌아와서 몰래 북을 치고 요사스런 말로 장병들을 동요시켰다. 원수 강홍립이 노하여 군율로서 이를 제지했다. 명나라 유격 교일기가 홀로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군이 전멸하고 제독 유정도 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기와 먼지 속으로 앞을 보니 적 기병이 계속 밀어닥쳐 양익(兩翼)을 이루면서 멀리서 아군을 포위했다. (원문의 표현은 煙塵中望見。賊騎大至。爲兩翼。遠遠圍抱) 아군 좌영 군관(軍官) 조득렴(趙得廉)이 달려와서 좌영의 위급함을 알렸다. 원수(元帥)는 좌영이 고립되어 상황이 위급하다고 판단, 우영에 명령하여 급하게 구원하도록 독촉했다.

좌우영이 진을 합하여 겨우 열(列)을 이루자 적의 기병이 달려와 충돌하는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조총을 한 발 쏘고나서 다시 장전할 틈도 없이 적 기병(騎兵)은 벌써 진지안으로 돌입했다. (원문의 표현은 賊騎齊突。勢如風雨。砲銃一放之後。未及再藏。賊騎已入陣中)

 

순식간에 좌, 우영은 모두 전멸했다.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 영유현령(永柔縣令) 이유길, 우영천총 김효경과 오직, 좌영천총 김좌룡이 모두 적에게 죽고 좌영천총 신중업만 탈출에 성공했다. (내가 있는) 중영(中營)과 좌,우영과의 거리는 천보(千步)에 지나지 않았는데, 순식간의 일이었기 때문에 원군(援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틈도 없었다.

 

노을 아래에서 (청나라 군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철마(鐵馬)가 진퇴(進退)하는 것을 단지 바라만 볼뿐, 그 황홀한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수 없었다. (원문 표현은 夕陽下。但見射矢如雨。鐵馬進退。而恍惚難狀矣)

 

***  문신 관료의 실제 전투 목격담인만큼 제가 본 조선시대 전쟁기록물 중에서 최고의 문학적 표현 수준을 보여줍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패전한 싸움, 그것도 처절하게 참패한 전투라는 점이죠. 夕陽下。但見射矢如雨。鐵馬進退。而恍惚難狀矣.....석양이 벌겋게 물들어가는데 청나라 기병이 활을 쏘아대면서 조총을 든 조선군 진중으로 돌입하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대목과는 약간 내용상 차이가 있습니다. 종사관 이민환의 목격담에 따르면 모래바람이 조총 1차 사격후에 불어온 것은 아니죠. 바람 때문에 사격을 못했다기보다는 조총 연속사격시 시간상 한계와 단병 엄호부대가 없는  조총병 vs 기병 전투의  비극적 결과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