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왜란 시기에 서애 유성룡이 주장했던 부국강병책

구름위 2013. 7. 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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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년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은 명나라 경략 고양겸에게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금년 정월부터 적의 형세는 전년과는 좀 달라졌습니다. 비록 적은 전처럼 서생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 웅천, 거제 등에 머물러 버티고 있으나 약탈은 좀 줄었습니다. 오직 적의 괴수 가등청정의 부하로 임랑포에 있던 자가 경주를 뺏으려다가 우리 병사들에게 단번에 쫓겨 갔을 뿐입니다.( 고 경략에게 회보하는 차부)

당시 전쟁은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휴전 비슷한 소강상태였다.

유성룡은 국력을 추스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방력 강화와 민생안정이었다.

 

1. 국방정책

유성룡이 추진한 국방정책의 철학은 양반과 천인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반 백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와 노비는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유성룡은 이 부분을 개혁하고자 했다.

선조 28년 11월 26일 유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에서 양반과 천인을 막론하고 모두 속오군에 편입시키라고 지시한다.

병졸을 교련시키는 한 가지 일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니 출신(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 양반, 서얼, 향리, 공천(공노비), 사천(사노비) 논할 것 없이 장정으로 실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사목(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군대)로 편성하여 그 부근의 각 리에 거처하도록 하고, 각각 묶어 몇 대가 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병기를 조치 준비하여 새로 훈련을 하도록 하라.(군문등록.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유성룡은 양반 종군과 천인 종군의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은 천인들이 병역을 수행할 경우 면천(천인신분 에서 면제)을 해주고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는 방안을 제시한다.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데, 공사천인, 아전, 서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 국가에서는 그들의 처자를 유달리 위안하며, 무기와 말과 식량을 주어 용맹스러운 장수에게 배치하소서. 그 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금군에 소속시켜 그들을 흥기시키고 꺼려 피하는 마음을 없게 하여 상시로 훈련해야 합니다. 만약 변란이 일어났다 하면 즉시 출동하여 싸움터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근폭집.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장계)

유성룡의 방안은 군공청에 의해 법제화가 된다

군공청이 아뢰었다.

"공천과 사천에 대해서는 적의 참수가 1급이면 면천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를 시키고, 3급이면 허통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에 제수하는 것이 이미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과 다름이 없어야 마땅합니다.(선조실록 27년 5월 8일)

그러나 유성룡의 노비충군론은 양반 사대부의 격렬한 반발을 산다.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 조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문관)의 정직에 붙인 뒤에 그만 두어야 하니 관직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라고 반대하는 구절이 있다.

천인이 왜적의 머리 10~20급을 베었다는 사실보다 천인이 벼슬을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 중인 상황에도 이런 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유성룡은 이런 사대부의 이기적 태도에 분노했다.

선조 28년 전 형조참의 유조인이 상소를 올려 노비충군론을 비판하자, 유성룡은 사대부의 이기심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지금 실정은 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중략) 어려운 걱정이 눈앞에 가득하여 뜻이 있는 인사는 눈물을 흘려야 할 터인데도, 무식한 무리들은 이따금 그의 노복이 병역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입을 벌려 이의를 선동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중략)

당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장순과 허원이 수양성을 지킬 때 장순은 자기 애첩을 죽여서 삶고, 허원도 아끼는 노복을 죽여서 그 고기를 군사들에게 먹였다" 고 하는데 두 장수는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어진 군자들인데도, 유독 사랑하는 첩과 노복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 일이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날 자기의 몇사람 안되는 노복을 아껴 국가의 큰 계책을 그르치려고 하는 사람과 비교해본 다면, 누가 어질고, 누가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만약 천인들은 사적(벼슬)에 등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한나라 때 위청은 노복에서 발탁되어 출세했고, 김일제는 항복한 부로(흉노)에서 발탁되었지만 후세에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인재가 많았다고 일컫던 때이니 이는 또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근폭집.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사직이 폐허가 되고 백성이 다 죽어가는 상황, 아직도 왜적이 물러나지 않은 전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만 투철한 사대부에 대해 유성룡은 치를 떨며 무식한 무리들이라고 비판했다.

 

임진왜란 시기에 서애 유성룡이 주장했던 부국강병책(2)

 

2. 민생정책

병역제도 못지 않은 조선의 문제점은 조세제도의 불균등이었다.

당시 백성들을 괴롭히던 가장 큰 폐단은 공납이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다는 점이다.

공납은 먼저 군현과 마을 단위로 부과되고 마을에서는 이를 다시 가호단위로 분배했다. 문제는 군현과 마을의 크기가 다른데도 공안의 액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구가 적은 군현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었다. 

가호단위 부과 기준도 문제였다.

가난한 전호(소작인) 나 대토지를 가진 전주(지주)나 비슷한 액수를 부담했다. 가난한 백성이 더 많은 부담을 지는 것이다.

여기에 방납의 폐단이 백성을 괴롭혔다. 공물을 대신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방납인데, 관리와 아전들은 농민들이 직접 납품하는 공물은 퇴짜 놓고 방납업자들이 파는 공물을 사서 납품해야 받아주었다. 이 과정에서 방납업자와 관리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공납을 쌀 한가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토지 면적의 다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 즉 사대부는 소유한 토지만큼 세금을 내고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면제 되는 것이다. 오늘로 치면 부자증세, 서민감세 인 것이다.

지금 백성은 이미 극도로 궁하고 사세는 위급하니, 도탄에 빠지고 거꾸로 매달린 고통은 족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의 건의가 만약 실시 된다면 나라에는 남은 축적이 있고 백성은 여력이 있어서 수년 뒤에는 기세가 촉진되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밖에 자질구레한 절목은 그 실마리가 매우 많으니 지금 감히 일일이 열거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국가 수치를 아직 갚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기소서. 그래서 민심의 만회에 골똘히 노력하는 것으로 영명을 하늘에 비는 근본으로 삼아 하루 이틀이라도 재물을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킬 계책을 생각하여 나쁜 옷과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노심초사하소서(시무를 아뢰는 차자)

선조 27년 유성룡은 공납제 개혁안을 내놓는다.

이것이 이른바 작미법이다.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최대의 개혁입법이었다

그러나 작미법은 대토지를 소유한 사대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들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를 대며 반대했다. 유성룡은 공물작미의에서 이런 반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공물 배정에는 수량이 가볍고 무거운 것과 수송에 힘들고 쉬운 것이 있는데, 힘 있는 백성들은 번번이 가볍고 싼 것만 배정받고, 가난한 빈민이나 힘없는 하호들은 무겁고 괴로운 것만 치우쳐 배정받은 것입니다. 이제 이런 구별 없이 똑같이 배정해서 숨기거나 회피하는 편법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공물작미의)

백성들이 불편히 여긴다는 것은 구실일 뿐이었다.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백성은 조선땅에 모든이들이 아니라 사대부들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세금을 더내야 하니 불편하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서울 각 관사의 하리들은 지방의 공물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을 세습 사업처럼 여기면서, 10배 혹은 100배의 이익을 노려왔습니다.(중략) 이것이 방납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협잡하여 이익을 취해왔기 때문에 백성들의 곤궁함은 날로 심했는데, 지금 공물이 모두 국용으로 들어가게 되자 방납업자들이 이익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각 관사의 전복(하리나 노복)에게서 나온 말입니다.(공물작미의)

지방관리들의 반대이유는 방납업자들과 짜고 횡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백성은 조선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세금을 횡령할 수 있는 지방관리와 방납업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횡령할 수 없어 불편하다는 이기심 이것이 작미법을 반대하는 이유였다

나라가 어찌되든, 백성들이 죽든, 말든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킬려고 하는 당시 조선 지배층의 모습에 유성룡은 분노했다.

작미법은 유성룡이 실각한 후 결국 폐지되었다.

유성룡은 곡물작미의 뒤에 해설을 붙이며 그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날에 이익만을 탐내 방납하던 무리들이 온갖 꾀를 써서 이를 방해하였으며, 사대부 중에서도 식견 없는 자들이 이를 좇아 부화뇌동하는 바람에 다시 그 법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