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정성공의 대만 경략)

구름위 2013. 6. 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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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의 대만 경략)

 

 

 

정성공의 대만 경략

 

정성공은 반청 활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순치 15년(1658) 5월 북벌군을 결성하여 반청기치를 높이 내걸고 군대를 정비했다. 병력 총수는 17만 5천 명. 군율도 엄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켜 정예화하였다. 그해 7월에는 예주산에 도착하여 훈련 후 8월 9일 3백여 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였다. 이윽고 양산에 도착하였으나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군선 3백척 가운데 약 1백 척이 파손되고 병력 8천이 수장되었다. 정성공의 측근과 가족들도 익사했다. 그러자 정성공은 북벌 계획을 수정하여 온주 가까이 있는 반석위를 군사 재건 기지로 삼아 군사를 모으고 군선 제조에 박차를 가하였다.

 

다음해 3월 25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모두 반석위로 집결하여 군대를 재편성한 다음 정성공은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지난해 악몽의 현장이었던 양산을 무사히 통과하여 항주만 입구를 가로 질러 장강에 들어선 함대는 남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최종 목표는 북경이었으나 우선 남경을 점령하는 일이었다.

 

정성공의 함대는 과주.진강 등 청군의 기지를 차례차례 함락하고 남경에 육박하였다. 연전연승한 정성공은 적을 얕보는 자만심이 생겼다.

 

정성공의 함대는 남경 밑까지 육박하였으나 청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숭명도에 주둔하고 있던 반청 세력이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청군의 기만 전술에 속아 신책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청군에게 허를 찔려 정성공의 군대는 결멸당하고 말았다. 정성공의 부하 장수들인 감휘,장영,임승,진괴,만례,이필 등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죽었다.

 

급히 철수 한 정성공은 아모이로 돌아와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에게 왕작을 사퇴하고 북벌을 단념한 후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대만으로 향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대만은 네들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대만의 백성들은 식민지 지배의 가혹한 탄압에 허덕였다.  정성공은 동인도회사에서 해고 당한 하빈을 앞세우고 대만을 경략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당시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였는데 1624년에 네들란드 식민지가 되었다. 대만을 정복한 네들란드인들은 이곳에 성을 쌓고 백성들을 착취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가끔 봉기를 일으켰으나 가혹한 탄압으로 대부분 실패하고 1625년 봉기 때에는 부녀자를 포함하여 8천여 명이나 살해되었다.

 

대만의 백성들은 정성공의 진군을 학수고대하였고 네들란드 동인도회사는 스파이를 파견하여 정성공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통역 하빈은 정성공에게 네들란드 식민 당국의 움직임을 소상하게 알려주었고 대만의 지도까지 보내 하루빨리 대만에 출병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661년 마침내 정성공으 대만 공략에 나섰다. 이 해는 청나라 순치 18년으로 격동의 해였다. 정월 순치제가 겨우 24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남명 정권의 영력제가 미얀마로 도망쳤다가 오삼계에게 인도되어 살해된 것도 같은해였다.

 

1661년 4월, 정성공은 350척의 군함에 2만 5천 명의 병력을 싣고 대만으로 향했다. 이 함대는 녹이문항(현재 안평항 북쪽)에 들어가 적감성에 다다랐다.

 

적감성의 네들란드군은 녹이문항의 수심이 얕고 항로가 좁아 겨우 두 척 정도의 밖에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성공의 대군이 기습 공격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적감성의  네들란드군은 당황한 나머지 네들란드의 대만 총독에게 급히 구원요청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네들란드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정성공은 적감성을 손에 넣었다.

 

서전을 장식한 정성공은 계속해서 대만성(현재의 안평)을 향해 진군하였다. 대만성에는 네들란드 병력 1천 6백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네들란드 총독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정성공은 공격에 앞서 네들란드 총독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네들란드 총독은 병력과 식량,탄약이 충분함을 이유로 항복을 거절하는 붉은 깃발을 내걸었다.

 

마침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8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네들란드 병사 1천 6백 여명 가운데 반 이상이 전사하고 양곡도 바닥이나고 물의 공급도 끊겼다. 정성공이 총공격을 감행하려는 순간 네들란드 총독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였다. 1662년 2월1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만은 38년 동안 이어오던 네들란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대만 백성들은 경축일을 맞은 듯이 기뻐하며 이 날의 승리를 기뻐하였다.

 

이날부터 대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백성들의 피와 살을 짜내는 세금 제도가 사라지고 농업면에서는 철제 농기구와 농우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크게 상향되었다. 정성공은 복건 연해 지방으로부터 수십만 명의 이민을 대만에 받아들여 대만 개발의 인력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산간 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고산족의 생활에도 신경을 써 군대의 둔전을 설치할 때 고산족의 농경지 사용을 엄금하고 종자나 농우를 제공하거나 농업 경험이 풍부한 한족을 고산족 마을에 보내 농사일을 돕도록 하였다. 정성공도 수시로 고산족 촌락을 방문하여 그들과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등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고산족들은 정성공이 왔다는 소문만 들으면 너도 나도 술과 안주를 들고 모여들었다.

 

정성공은 대만에 1부 2현을 두어 관제와 법률을 정하고 학교를 세워 후진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정성공의 정책과 조치는 대만 경제와 문화 발전에 좋은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성공은 1년이 채 못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정성공이 병사한 후 그의 아들 정경이 승계하여 19년 동안 대만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1681년 정경이 죽은 뒤에 지배자 사이에서 내분이 계속되었다. 3년 후인 1683년 청군이 대만에 출병하자 정경의 아들 정극상은 청에 투항하였다.

 

이렇게 정씨 일족의 40년에 걸친 반청 항쟁은 종지부를 찍고 청나라는 전국 통일의 대업을 실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