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이자성의 난)

구름위 2013. 6. 13. 16:28
728x90

 

 

 

명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명의 천계 7년(1627)으로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에 출병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해부터였다. 명나라는 청나라와 계속되는 싸움으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했고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반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도망친 백성들은 반란군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백성들이 도망치면 농촌은 더욱 황폐해졌고 기근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 기근은 더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반란 집단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반란이 일어난 곳은 기근이 가장 심하였던 하남과 섬서 지방으로 섬서 지방에서 동원된  군대에게 군량을 공급하지 못하자 폭정이 심해지고 마침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들 반란군은 처음 왕가윤의 지도 아래 고영상, 장헌충, 마수례, 나여제 등의 간부들이 이끌었다. 반란군의 세력이 날로 거세지자 명나라 조정은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임하여 3~4만 여명에 불과하던 반란군은 힘없이 패배하여 반란군의 수령 왕가윤이 부총병 조문조에게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왕가윤이 죽자 그의 부장 고영상이 다시 반란군의 무리를 집결시켜 날이 갈 수록 그 형세가 확대되었다.

 

숭정 8년(1635)에 명조정은 홍승주를 병부상서 겸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각지의 반란군을 하남 지역으로 몰아 넣어 일망타진 할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반란군은 하남의 형양에서 모여 대책을 논의 한 결과 하북으로 공격하자는 파와 반대하는 파 간에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한 젊은 장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적의 공격을 기다리지 말고 10만 반란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정부군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다. 힘찬 그 젊은 장령의 말에 모두가 용기를 내어 구체적인 작전을 협의하게 되었다. 일부는 사천.호북 방향, 일부는 섬서 방향, 일부는 북쪽의 황하 방향, 일부는 기동부대로 편성하여 각지의 반란군을 원활하게 지원하도록 합의하였다. 역사상 분산된 반란군이 연합하여 통일된 작전을 구사하기는 유사이래 처음이었다. 이 젊은 장령이 바로 명왕조를 타도한 이자성이었다.

 

형양의 작전회의가 끝난 후 고영상.장충헌의 연합군은 질풍같이 동쪽으로 진군하여 10일이 못되어 안휘성의 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 곳은 명태조 주원장의 고향으로 명나라 조상 묘가 있는 곳으로 조상 묘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소리 내어 통곡하고 그 화풀이로 봉양의 순무 양일붕을 처형하였다.

 

이자성(1606~1645)은 연안의 미지현 출신으로 본명은 이홍기였다. 그는 역부(驛夫) 출신의 실업자로 고영상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었다. 숭정 2년(1629) 감숙.섬서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지방 관리들을 죽이고 대음해 4월 고영상의 휘하로 들어 갔다.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간 이자성은 형양 회의 때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연합작전이 있은 다음해에 이르러 반란군의 형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고영상이 섬서 순무 손전정에게 잡혀 북경에서 주살되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자리를 승계하여 사천으로 들어가 총병 후양주를 죽이고 각지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자성도 그 후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사천의 자동 싸움에서 대패하여 겨우 18기로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또 동관 남원 전투에서도 겨우 7기만 대리고 도망쳐 섬서 남쪽의 상락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에  북경에서는 이자성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숭정 11년 섬서.하북.광동.호북.광서 지방의 반란군도 대부분 진압되어 반란의 불길이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한숨 돌릴 겨를도 없었는데, 바로 동북방의 후금군의 침공이었다. 숭정제는 동북 지방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하남.섬서 지방의 정부군을 뽑아 북경 동북방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숭정 12년 정부군이 북상하자 호북에서 장헌충.마수례가 반란을 일으켰다. 숭정 13년에는 이자성이 사천 파서산.어복산에서 50기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나왔다. 호북 지방은 기근이 극심하여 이자성이 나타나자 농민들이 기뻐하며 대거 몰려 들어 한 달도 안되어 반란군이 수만으로 불어 났다. 이 가운데 이암.우금성 같은 지식인들도 함류하여 '균전면량'과 군기를 엄정히 하도록 조언 하는 등 군기를 엄정히 하고 수탈받은 농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 작전이 주효하여 이자성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처럼 이자성은 지식인과 중소 지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안정된 세력을 구축하기 이르렀고 숭정 14(1641)년에는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낙양은 역사상 여러 왕조의 수도로 당시에는 만력제가 가장 사랑하던 정비 소생 복왕 주상순이 살고 있었다.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하자 복왕은 성 밖으로 도망가 영은사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복왕은 막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로 횡포와 탐학이 심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이자성은 반란군이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 복왕의 살과 사슴고기를 섞어 요리를 만들어 안주로 먹었다고 한다. 복왕은 주살되었고 사람들은 이 술을 복록주라 불렀다.

 

이자성은 복왕의 창고를 열어 수십 만석의 쌀과 금은보화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자, 백성들은 "만세! 만세!"를 외치며 이자성을 황제처럼 환호하였다. 이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재물을 나누어 주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한 그 시기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호북.사천에서는 장충헌이 병부상서 양사창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사창이 장헌충을 공격하자 형세가 불리한 장헌충은 공격을 피해 사천으로 들어 갔다. 양사창은 장헌충을 추격하여 사천으로 들어가 사천 순무 소첩춘, 참군 요대형과 합세하여 앞뒤에서 장헌충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한밤중 정부군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몰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와 하루 3백리를 달려 호북의 양양에 도착하였다. 장헌충은 조용히 잠들어 있는 성문을 열고 양사창의 사령부를 점령한 후 힘 안들이고 양양을 점령하였다. 장헌충은 양왕 주익명을 생포하여 그를 죽였다.

 

양사창은 양양이 함락되고 복왕과 양왕이 모두 반란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죄책감을 누를 길 없어 자살하고 말았다. 양사창의 후임으로 임명된 정계익은 장충헌 토벌 작전에 고심하고 있었다. 장헌충은 정계예익의 부하 좌옥량과 신양 전투에서 패배하자 다시 사천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같은해 11월 이자성은 남양을 함락시키고 당왕 주율막을 주살하였다.

 

이자성은 계속해서 개봉을 공격하였으나 병부시랑 손전정이 원군을 거느리고 선방하여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숭정 15년 (1642)에 겨우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자성은 황하의 둑을 터 개봉을 물에 잠기게 하여 북문을 깨뜨리고 함락하였는데, 정부군은 식량이 없어 땡감까지 먹을 정도였다고 하여 이 전투를 '시원(枾園)의 전투'라고도 한다.

 

개봉 함락 두 달 후 여녕을 함락하였는데, 총병 호대위는 전사하고 총독 양문악은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숭정 16년(1643) 정월 이자성은 승천을 함락하고 양양을 양경이라 하여 궁권를 짓게 하고 우금성 등에 명하여 정부기구를 구성토록 하였다. 겨울에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동관.서안을 공격하고 감숙.섬서로 진출하였다.

 

숭정 17년(1644) 정원 초하루날 아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나라 이름을 대순, 연호를 영창이라 하였다. 서안을 서경으로 삼아 장안이라 부르고 스스로 대순왕이 되었다. 조상에게 제사도 올리고 존호를 추증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봉작도 내렸다. 즉위식 후 이자성은 다음 공격 대상을 북경과 남경을 놓고 고심하다가 정부군의 방위력을 무시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결국 관중을 선택하였다.

 

이자성은 곧바로 동정군을 일으켜 2월에는 친히 보병 40만,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용문에서 황하를 건너 분주를 공략하고 산서 최대 도시인 태원을 함락하였다. 태원 함락은 북경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자성군이 태원에 이어 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총병 주우길이 대주를 선방하였고 이자성은 군량이 떨어지자 영무로 후퇴하여 공격하였으나 여기서도 주우길이 끝까지 버티었으나 시가전을 벌인 끝에 영무를  점령하였다. 주우길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주살되었다.

 

이자성은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이 주우길에게 예상 밖으로 고전하자 예기가 꺽여 대동.양화.선부.거용 등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공격하는데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이자성은 일단 후퇴하여 재기를 도모할 예정이었으나 그때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이 날아 들었다. 대동 총병 강양과 선부 총병 왕승윤으로부터 항복하겠다는 서신이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자성은 대동과 선부를 접수하고 정부군을 흡수하여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만약 정부군의 항복이 없었다면 이자성은 반란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려면 장수들의 마음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망해가는 나라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단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자성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을 것이다.

 

3월 15일 숭정제 집무실에 이자성으로부터 통첩이 날아들었다.

"18일 유주에 이를 것임."

 

유주란 북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이자성이 3일 후에 북경을 유린하겠다는 협박장이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일밖에 없었다.

 

숭정제는 16일 중신회의를 열고 민심의 안정과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회의 중 또 한 장의 봉서가 날아 들었다. 이를 본 숭정제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봉서를 본 대신들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봉서의 내용은 북경 근교의 창평이 지난 12일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능묘의 향전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반란군은 이미 북경 근처 40킬로미터 지점까지 육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은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북경성 밑에 도착하니 북경성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북경성에는 15만 4천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대부분 노약자. 환자들이 대부분이고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군대가 아니었다. 병력도 부족하여 성벽에 배치할 숫자도 모자랐다. 숭정젱는 환관 수천 명을 보내 독전토록 하였으나 포악한 환관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등 난폭하게 다루자 병사들의 반발도 게세졌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병사들은 사기가 심하게 저하된 상태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도 못하였고  반란군을 정탐하기 위해 보낸 척후병 병사들은 반란군에 투항하여 반란군에 가담하여 버렸다. 사자로 파견한 환관들도 반란군에 투항 한 뒤 순정제 퇴위를 요구하며 반란군에 앞장서서 진군하였다.

 

3월 18일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숭정제에게 가장 신임을 받던 조화순이 창의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들였다. 이자성에게 항복한 환관 두훈이 조화순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한 것이다. 창의문이 열리자 반란군이 노도처럼 성 안으로 몰려 들었다. 명왕조의 운명도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장수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커녕 군사를 동원할 자금도 부족하여 내금고를 열지도 않았던 숭정제였다. 나라가 망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재물을 지키려는 숭정제를 포함한 대신들이 결국 멸망을 초래한 결과였다. 총사령관 왕영길은 산해관 밖 관외 4성을 포기하더라도 최정예 부대로 하여금 북경을 방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삼계는 왕영길의 주장에 따라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오삼계가 풍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북경성이 반란군에게 함락한 이후였기에 더 이상 진군을 할 수가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간 이자성의 반란군은 다른 성문을 열어젖히고 반란군을 맞아 들였다. 북경에는 외성과 내성이 있었고 내성 안에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이 있었다. 반란군은 외성과 내성을 돌파하여 자금성에 육박하였다.

 

 

반란군이 성내에 진입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을 데리고 자금성을 나와 만수산에 올라가 멀리 북경 시내를 바라보니 북경 내성 9개 성문 밖 여러 곳에서 반란군의 횟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우렁찬 함성 소리가 북경 하늘에 메아리쳤다.

 

숭정제는 이미 명의 운명이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자금성으로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하여 연거푸 마셔댔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였으나 명나라 황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황태자와 영왕.정왕을 평민 복장으로 변장시켜 각각 그들의 외가인 주씨와 전씨 집으로 피난시켰다. 세 황자들은 모두 나이가 어린 상태였다.

 

세 아들을 궁 밖으로 피난시킨 숭정제는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황후 주씨는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고 후비 가운데 자결하는 자도 많았다. 그리고 숭정제는 딸인 황녀들을 살려두면 반군들에게 능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장평공주가 있는 수령궁으로 가서

"너는 무슨 죄로 짐의 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이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단 말인가! " 라고 탄식하면서 장평공주의 왼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겨우 여섯 살 난 소인공주가 있는 소인전으로 들어가 딸을 칼로 찔렀다.

 

어린 소인공주는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으나 장평공주는 왼팔에 상처를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헐떨거렸다. 시녀들이 그녀를 부축하여 도망갈 것을 권하였으나 그녀는,

 

"부황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리셨으니 내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또 도적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나를 찿을 것이니 나는 숨을 곳이 없다." 고 말하였으나 시녀들이 억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후에 그녀는 청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다음 그녀는 신분을 밝히고 불문에 귀의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청왕조는 그녀를 용서하여 결혼할 것을 권하여 결국 주세현이라는 청년과 결혼하여 평범한 일생을 누렸다고 한다.

 

악몽같은 18일이 지나고 19일 아침이 되자 숭정제는 친히 경종을 울려 중신들을 불렀으나 중신들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환관들과 시녀들도 대부분 도망치고 남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을 대리고 다시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만수산에는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세운 수황정이 있었는데, 숭정제는 그곳을 자신이 죽을 장소로 선택했다. 숭정제는 왕승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목을 메었다. 명나라가 마지막 멸망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반란군이 나중에 발견하였을 때 숭정제는 소복차림에 왼발은 맨발, 오른발에는 붉은 신을 신었다. 관은 벗겨지고 긴 머리는 얼굴을 가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흰 옷깃에는 다음과 같은 유조가 씌어 있었다.

 

" 짐이 제위에 오른지 17년,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고, 반역의 무리에게 땅을 잃은 것이 세 차례였다. 이제 도적이 창궐하여 궁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모두 중신들이 짐을 그릇쳤기 때문이다. 짐이 죽어서 지하에 들어간 들 선제를 뵐 면목이 없다. 그래서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도적들은 짐의 시신을 갈기갈기 찟어도 좋고 문관들을 모두 죽여도 좋지만 다만 능침만은 허물지 말라. 또 우리 백성들 한 사람도 상하지 말라." 

 

이 유서를 보면 숭정제는 끝까지 망국의 책임을 중신들에게 돌리고 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수황정에서 숭정제는 34세의 졺은 나이로 죽었다. 주문장이 명을 세운지 16대 277년 만에 역사의 막을 내렸다.

 

도적이 도적을 낳고 또 다른 도적이 도적을 낳아 역사는 반복되어 굴러왔다. 권력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고 권력에 등승한 인간의 이기심은 탐욕과 부패를 낳고 결국에는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고 이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이러한 불만이 표출되어 성공하면 창업이 되고 실패하면 반역을 도모한 역적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자성도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키는 성공적인 반란을 도모하여 새로운 나라의 창업에 꿈이 부풀어 올라 있었으나 시기적으로 천운이 따르지 못했다. 이자성은 단지 45일간 제위에 있었을 뿐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오삼계의 50만 대군이 산해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며 반란군이 오삼계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은 청나라에 투항하게 만든 잘못이 있었다. 반란군은 청군과 오삼계군을 막아내지 못함에 결국 이자성은 북경을 쫒겨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미 역사의 운명은 청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