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청태종의 중국 침입)

구름위 2013. 6. 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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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의 중국 침입

청태종은 명나라 배후세력인 조선의 정벌(병자호란)과 아울러 영원성의 원숭환을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원숭환이 영원성을 굳게 지키고 잇는 한 청군에게는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이에 청태종은 고심끝에 양면작전능 구사하기로 하였다.

 

그 하나는 명군과 맞설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략을 써서 원숭환을 제거하자는 계책이었다.

 

첯번째 무기 문제는 모문룡 휘하에 있다가 투항해 온 공유덕 등이 누르하치를 쓰러뜨리고 청군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홍의포를 그대로 가져 왔기에 해결되었다. 청태종은 이 대포를 모델로 성능이 우수한 대포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청태종은 원숭환을제거하기 위해서 모략을 쓰는 방법을 구사하였는데, 당시 명나라 최후 황제인 숭정제는 특히 의심이 많아 재위 17년 동안 40여 명의 관료를 파면,사형시키는 등 의심이 나면 즉시 처형시키는 인물이었다. 청태종은 이와같은 숭정제의 이용하여 원숭환을 제거하도록 게략을 꾸몄다. 청태종은 명군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원숭환은 후금과 대치하면서 극비리에 후금과 내통했다"며 소문을 내도록 했다. 원숭환은 가도에서 문제를 일삼던 모문룡을 처형하였는데, 명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처형한 것은 원숭환의 월권행위였으며 모문룡의 뇌물로 길들여진 고급관료 등 반대파들로부터 원숭환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그래서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태종은 사절로 온 명나라 환관들이 머무는 옆 방에서 그들이 들리도록 청군 장수들 끼리 원숭환의 내통사실을 은밀히 이야기하도록 하는 계략을 썼다. 그들이 명나라로 돌아가 숭정제에게 그들이 들은 원숭환의 내통 사실을 고하게 되자 숭정제는 당장 원숭환을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청의 이간 게략에 멋지게 숭정제는 넘어가게 되었다.

 

청군이 산해관을 우회하여 북경성에 근방에 진입하자 원숭환은 이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가 북경성 근처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버티다가 황제가 군량문제를 논의하자며 호출하자 북경 성 안으로 들어 가고자 하였으나 항제의 명으로 게엄중이라 병력이 같이 들어 올 수가 없다며 원숭환 혼자만 바구니를 타고 들어 오도록 하였다. 바구니를 타고 들어간 원숭환은 바로 투옥되었고 청과 내통 사실을 빌미로 숭정 3년 (1630) 7월 저잣거리에서 결국 책형으로 처형되고 만다. 

 

원숭환의 후임으로 손승종이 산해관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청에 빼았겼던 4개 성을 수복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이때 청태종은 명나라 기술자를 동원하여 대포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포가 제작 완료된 해는 원숭환이 처형된 다음해 6월(1631)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 1636년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칭하였는데 그의 나이 48세 였다.

 

청태종은 제위에 오른 해에 조선 친정(1637)과 아울러 명나라 정벌이 감행되었다. 이때 명나라 정벌은 태종의 동생 아지커가 맡아 만리장성 독석구와 거용관으로 우회하여 들어가 북경에 근접한 보정에 까지 이르렀다. 56전56승에 12성을 빼았고 18만에 이르는 인축을 포로로 잡았다.

 

숭덕 3년(1638)에 조선을 정벌한 후 태종이 친정에 나서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였고 동생 도르곤은 밀운현으로 진군하였다. 도르곤은 산동까지 진격하여 58성을 함락시키고 46만 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린 후 산해관이 무너지지 않아 철수 하였다.

 

태종은 산해관을 공격하는데 우선 금주(영원성), 송산,행산,탑산  등 4개의 외성을 먼저 공격해야 했다. 이 외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이 되고 있었고 한곳이 공격 당하면 다른 외성에서 지원군이 달려오곤 하였다.

 

태종은 먼저 금주성을 공격하였는데, 금주성은 송산성과 행산성과의 연락이 긴밀하여 금주성을 함락하자면 송산.행산과의 연락을 두절시키는게 중요했다. 청군은 금주성 외곽에 책을 설치하여 원군이 올 수 잇는 길목을 막고 금주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원군이 금주성으로 달려오다 길이 막혀 송산성으로 집결함으로써 송산성 일대가 격전장이 되엇다.

 

이자성의 난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 명나라가 파견한 총독 홍승주, 순무 구민앙이 거느린 13만 병력과 총병 오삼계, 왕박을 포함한 8명이었다. 청군은 명나라 군사가 송산성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심양에서 6일만에 급거 달려와 송산성 근방 척가보에 당도하였다. 명나라 총독 홍승주는 지구전을 준비하였으나 명나라 병부상서 진산갑은 지구전에 따른 군사비의 가중을 연려하여 속전속결을 주장하였다. 진산갑은 현지에 감독관으로 부하 장약기를 파견하여 독려하였는데, 현지에 도착한 장약기는 성질이 광폭한 사람으로 진산갑의 지시대로 총독 홍승주에게 속전속결을 강력하게 강조하자 명나라 군대는 본의 아니게 청군과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청군과 싸움을 벌인 결과 금주성이 무너지고 송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는 명군의 대패였다. 이제는 외성을 모두 잃고 남은 것은 마지막 관문인 벌거숭이 산해관뿐이었다. 명나라 총독 홍승주는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고 순무 구민앙과 조변교 두 사람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총병 오삼계와 왕박은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산해관으로 탈출하였고 명군의 전사자는 5만 3천이 넘었다. 감독관 장약기는 어선에 몸을 숨겨 뱃길로 탈출하였고 나중에는 청군에 항복한 인물이다.

 

총독 홍승주의 항복은 북경 조정에서는 순직했다는 소문이 전해져 조정에서는 홍승주의 제단에 제사지내기를 무려 16회나 달하였고 나중에 홍승주가 포로가 되엇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리둥절해 하였다. 일설에는 태종이 홍승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항복하기를 권유하엿으나 홍승주는 단식과 자살 하겠다며 버텼으나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홍승주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종은 미녀와 인삼즙으로 홍승주를 구워삶아 결국에는 홍승주가 넘어 갔다는 이야기고 있으나, 다른 한편 청의 기록에 의하면 홍승주가 자진하여 항복하기를 원하였고 한족 출신 대신들이 보증하였기에 태종은 생각은 없었으나 마지못해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명나라는 송산성 싸움에서 대패해 큰 타격을 받았으며 병행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반란이 확산돼 송산성 패배 2년 후인 숭정 17년(1644) 마침내 멸망의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