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강희제 시대 : 영향과 평가, 비판

구름위 2013. 6. 1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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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과 평가

 

스펜스 교수가 쓴 자서전 형식의 '강희제'란 책 속에 나타나 있는 강희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희제는 뮤려 61년간 중국을 다스린 청나라 황제였다. 그는 61년의 재위 기간 동안 그 어떤 중국의 황제보다도 긴 기간이었으며 그 오랜기간 동안 청나라 기틀을 완전히 다진 황제였다.오베의 난과 삼번의 난을 평정하여 가장 큰 내부의 정치적 소요를 제거하였으며, 갈단을 정벌하여 서역으로 세력읗 확장하였고, 타이완을 중국에 복속시켰다. 또 백성들의 세금을 크게 경감시켜 주었으며 문화사업을 지원하여 역사서와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그리고 주접제도라는 비밀 관료들의 태만을 감시하고 민심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런 황제로서의 업적과 정치적 성과로 인하여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 받는다.

 

강희제는 사냥과 원정을 다니면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풍부함과 다양함에 대한 까달음 및 그것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통치를 구상하고 사냥을 통하여 유목민족인 맞주족의 후에답게 오락이자 운동이며 군사적인 대비태세를 늦출 수 없었던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강희제 시대는 영토확장과 국경분쟁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스림이란 중국 전체의 경제적 .교육적 구조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인식했다. 특히 그는 삼번의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지만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보다는 이 난으로 밀미암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에 대하여 자책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군주였다. 그의 선정의 단적인 예가 인두세 동결조치였다. 이 파격적인 조치로 인해 자신의 시대가 태평성대이며 청조가 검소한고 백성들을 위한 왕조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에게 하나의 확고한 표준을 마련해 주려고 했다. 

 

강희제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로 유교경전을 열심히 읽었고, 뛰어난 주자학자들을 높게 평가했지만 결코 도덕적 고결함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단한 호기심을 가진자로 수학,천문학,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가 공자의 고택을 방문했을 때나 예수회 선교사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수에 대한 강희제의 생각은 진시황제처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인간의 육신이 추구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는 쇠약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질병.약.기억력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였던 황제였다. 그래서 질병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강희제는 세상에 부러울게 없었던 황제였지만 말년에 황자들로 인하여 불행한 나날을 보내야만했다. 자식이 지나치게 많았던 데다가(아들 36명, 딸 20명) 황태자로 책봉한 둘째 아들이 그의 기대를 져버렸고, 나머지 황자들 사이에도 파벌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안하무인격인 황태자를 두 번씩이나 폐위시키는 등 고통스런 결정을 해야했으며 파당을 도모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이처럼 분노와 고통으로 점철된 황제는 섹익스피어의 <리어왕>보다도 더 비극적인 인간 강희제의 불행스런 가정사일 뿐만아니라 청나라의 조정의 불행스런 면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717년 12월 23일, 강희제는 제위에 오른지 56년 11개월 21일쩨 되던 날 가장 긴 상유(上諭)를 발표하였는데, 이 고별 상유에서 강희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발표했다. 그는 이 고별 상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짐은 간을 드러내 놓고 쓸개를 끄집어 내고 오장을 보여주는 심정으로 진심을 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사후의 영향과 업적

 

 책을 읽는 강희제

 

현재 강희제는 역사학자들에게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도 큰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특히 건륭제는 강희제를 평생 모범으로 삼고 감히 조부를 뛰어넘을 수 없다하여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보다 적은 재위 60년 만에 퇴위를 하였다. 그러나 건륭제는 희대의 간신이자 탐관오리라 불리는 화신(和珅)을 20여 년간 총애하고 화신은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의 입에 맞는 정책으로 바꿈으로서 결국 100여 년간 지켜온 강건성세도 끝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또한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처를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 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통치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나갔다.

 

 

비판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를 만들면서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등 청나라를 너무 태평히 잘 완성시켰기 때문에, 후대에 가서 사람들이 점점 나태해지고, 군대 역시 소동에 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문자의 옥을 시작시켜서 한족 학자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문화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고, 명나라 수녀제(秀女制)를 따르라는 부황 순치제의 유명을 받들었고 그에 충실히 따라 많은 자식들을 두어 황실을 번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교육에 실패하여 황태자를 자리에 놓고 황태자였던 윤잉과 쟁탈전을 벌이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편애까지 일삼아 훗날 강희제 말년과 옹정제 초기의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본래 유교를 숭상하던 강희제는 자식들에게 주입식 유교 교육을 시켰으나 완전히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황자들은 적장자가 황위를 갖는 것이 아닌 가장 유능한 아들이 황위를 갖는 것이라는 전통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아버지의 교육에 순응하지 않았다.

 

처음 강희제는 윤잉에게 매우 큰 기대를 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현군이 되길 바랐으나 윤잉이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그 기대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강희제는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때, 많은 황자를 조정과 군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서자이며 능력있는 황자들에겐 요직을 내렸으나 정작 유일한 적자이며 황위를 계승할 한 명의 황자에게는 자신의 순행 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황자들 사이에 황위를 놓고 골이 맺혀 형제들은 윤잉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강희제의 비난은 언제나 총책임자인 윤잉에게 돌아갔고 바로 이것이 윤잉을 압박하여 윤잉의 비정상적인 기행을 낳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노력했던 윤잉도 자신의 뜻이 언제나 다른 형제들이나 적대시하는 대신들에게 좌절되자 우울증이 생기고 부황의 비빈을 건드리는 등의 기행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또한 평생 동안 너무 정무에 매진하였기에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여가가 없었고 강희제와 자식들간의 소통은 그리 원만치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강희제를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에서 실패한 군주라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가 펼친 선정에 대해 단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백성을 ‘생각했다’는 것이지 결코 정책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愛民)의 마음은 녹아 있지 않았다고 강희제의 정책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현대의 영향과 평가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얼웨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 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다. 이로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켜, 중국의 국민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청년의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국 및 홍콩특별행정구역 그리고 대만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 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만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이력과 통치 철학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