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강희제~ 건륭제 시대는 중국의 전형적인 태평성세로 간주되고 있다. 세조 순치제에 이어 중국통일을 완성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 130여 년은 청의 최전성기로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대만, 외몽골, 청해, 산강, 티베트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만(滿), 한(漢), 몽(蒙), 회(回)의 5족을 지배하고 안남, 버마, 시암을 복속시켜 조공국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 건륭제는 재위 60여 년 동안 10여 차례에 이르는 정벌로 중국 최대 강역을 확보하였으며,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자처했다.
건륭제는 청의 6대 황제로 이름은 홍력이고 옹정제의 넷째아들이다. 옹정제 재위 시 보친왕에 책봉되었다가, 1735년 8월 옹정제 사후 태자 밀검법에 의해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그 달에 청의 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이듬해에 연호를 건륭으로 고쳤다. 이 시기는 청조가 북경에 들어온 지 1세기 가까이 되었고 궁정도 중국어를 사용하여 만주라는 다른 속성으로 형해 화 되고 있었다. 영토는 확대되고 국고는 충실해졌으며,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건륭시대라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과 한인간의 반목을 막으며,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여러 번에 걸친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많은 외정과 내순, 천수연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에게 양위하였다.
건륭제의 치세는 외정과 사고전서 편찬 등의 대 편찬 사업만 보면 대단히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청조가 상승기에서 쇠퇴기로 가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쇠퇴기의 현상은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재정 면에서는 그것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옹정연간 충실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던 국고는 건륭 중기까지는 큰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 완전히 상황은 바뀌어 국고가 바닥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외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건륭제는 그와 같은 상황의 변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적어도 만년에는 이러한 상황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는 태도가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십전노인이라 칭하는 무공(武功)을 과시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면모를 보여준다.
건륭제는 재위 60년 만에 재위를 가경제에게 물려주었다. 이후에도 그는 4년간 여전히 태상황으로서 생존했지만 양위 직후에는 백련의 난이 일어났으며, 또 사후에는 화신이 탄핵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덧붙인다면 이 때 몰수된 화신의 재산은 8억 냥이 넘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건륭 연간 중반 무렵의 재정수입으로 쳐서 실로 십 수년분에 상당한다. 그가 얼마나 막심한 축재와 부정을 행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륭제의 재위동안에는 그것들이 요행히 표면화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행운의 황제였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강희제 및 옹정제 시대의 유산을 탕진하고 청조쇠퇴의 기운을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륭제 시대
건륭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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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6대 황제 | |
본명 |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
재위 | 1735년 ~ 1796년 |
별명 | 십전노인(十全老人) |
출생일 |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
출생지 | 청나라 북경 옹친왕부 |
사망일 | 1799년(가경 4년) 2월 7일 (향년 89세) |
사망지 | 청나라 북경 자금성 양심전 |
황후 | 효현순황후 계황후 효의순황후 |
부황 | 옹정제 |
모후 | 효성헌황후 |
이전 황제 | 옹정제 |
다음 황제 | 가경제 |
묘호 | 고종(高宗) |
시호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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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의 군대가 산해관으로 들어간 다음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네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이며, 연호는 건륭(乾隆)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히여허 한(Abkai Wehiyehe Han) , 몽골어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Tengeriin Tetgesen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이며,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하여 묻힌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문자의 옥을 단행하여 청나라에 비판적인 서적들을 단속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강남과 사천 등 각지로 순행을 여러 번 떠나 황제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의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정책과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 째에 태상황으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리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과 야사가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옹친왕(雍親王)이던 옹정제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황손인 홍력은 황자들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선 홍력 이외에도 자질이 남다른 여러 황손들과 홍력과 동갑인 숙부 윤희(胤禧)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강희제에게는 20명의 황자와 100명 안팎의 손자가 있었는데 강희제는 손자들의 상당수를 알지도,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황손들 중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뽑힌 홍력이 문재에도 탁월하였고 사냥에서는 어린 나이에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잡자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 때의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에게 기본적인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명해 홍력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것을 명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구의 강희제가 직접 홍력의 무술을 보고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였다. 궁정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주 자신이 살던 옹친왕부로 가 부왕인 옹친왕 윤진과 적모인 적복진 오라나랍씨,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안드렸고 이러한 성실한 모습을 본 강희제가 더욱더 총애하였다.
1722년(강희 61년) 12월, 홍력의 조부이자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노환으로 붕어하자, 당시 정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홍력의 아버지 옹친왕 윤진이 군사들과 대신들을 이용하여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임종 직전, 윤진을 불러서 미래의 황제는 홍력이니 황위를 반드시 홍력에게 물려주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에 따라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미리 황태자로서 홍력의 이름을 써서 그 함을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올려놓았다.
강희제와 같이 홍력의 재주를 귀히 여기던 옹정제는 상서방에 계속 보내어 공부를 시키게 하였고 홍력을 지도하였다. 이듬해인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는 13살의 홍력에게 자기 대신 선황제인 강희제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세간에서는 이미 옹정제가 홍력을 후계자로 눈여겨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력이 나이가 들수록 학식 또한 깊어지자 옹정제는 홍력의 제왕학을 손수 가르치고 홍력이 정치를 배우는 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홍력은 오전에는 서화에 몰두하였고 정오에서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정무에 매달리며 한편으로는 쉬운 국정을 처리하면서 정치를 배워갔다.
그러나 옹정제의 셋째 아들이자 홍력의 이복형인 패륵 홍시(弘時)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옹정제와 척을 지고 있던 숙부이자 강희제의 8남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와 손을 잡았다. 윤사가 노골적으로 부추기자 홍시는 홍력을 모함하였으나, 옹정제는 오히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홍력을 몰아붙이는 홍시를 의심하였다. 1725년(옹정 3년), 홍시가 홍력을 암살하려던 일이 발생하자, 옹정제는 윤사의 아들로 입적시켜버렸고 1727년(옹정 5년)에는 윤사 일당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이유로 모두 잡아들여 하옥시키고, 아들인 홍시마저도 잡아들인 후,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다. 이때 잡힌 윤사, 윤당은 곧 옥에서 독살당하고 홍시 역시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홍력은 부찰씨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더 이상 홍력에 맞서 황위를 노리는 경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홍시가 죽고 난 후, 홍력이 당시 옹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기에, 대다수 대신들은 이변이 없는 한, 홍력이 황위를 승계할 것이라 믿었다. 1733년(옹정 11년), 홍력은 화석친왕(和碩親王) 직을 제수받고 보친왕(寶親王)이라 불렸고 이 때부터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군기처에서 지내며 아직 완전히 섬멸되지 않은 몽골의 준가르 부족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 또한 태묘, 사직 대제나 공자와 관우의 제사 등 황제가 주관해야 할 국가의 중요 대사를 옹정제를 대신하여 주관하였다. 1734년(옹정 12년), 옹정제가 연로해져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에는 홍력이 나서서 섭정으로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즉위와 개혁
1735년(옹정 13년) 10월, 옹정제의 몸이 나빠지자 홍력은 이복동생 화친왕 홍주(和親王 弘晝)와 함께 옹정제를 간병하였다. 그러나 동년인 1735년(옹정 13년) 10월 8일, 홍력의 아버지이자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58세를 일기로 북경의 원명원에서 과로로 의한 피로 누적으로 붕어하였다. 대학사 장정옥과 악이태(鄂爾泰), 그리고 홍력의 숙부인 장친왕 윤록(莊親王 允祿), 과친왕 윤례(果親王 允禮) 등이 고명대신이 되어 옹정제의 유조를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에서 꺼낸 뒤 유조를 읽었다. 유조에는 제4황자 홍력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황제로 즉위시키라는 내용이었다.
“ | 제4황자 보친왕 홍력은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어 아바마마이신 성조인황제(강희제) 폐하께서 특별히 총애하여 궁중에서 기르셨다. 홍력은 친왕이 된 후에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정사에 능숙하며 식견이 깊으니 가히 대사를 맡겨 짐의 뒤를 이어 황위를 이을 자격을 갖추었도다. | ” |
이 유조에 따라, 홍력은 황태자로서 책봉의례를 받은 후, 곧 황위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으며 이가 제6대 황제인 고종 건륭순황제(高宗 乾隆純皇帝)이다. 연호를 ‘건륭’(乾隆)이라 정하였는데 여기서 ‘건’(乾)은 하늘, ‘융’(隆)은 높음과 영광이라는 뜻이니, 건륭이란 하늘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과거 조부인 강희제나 부황인 옹정제의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데에 비하여 이미 황자 시절에 경쟁자가 없어진 건륭제의 즉위 과정은 매우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즉위하자 건륭제는 먼저 아버지 옹정제가 연금하거나 귀양보낸 자신의 숙부들을 사면하였다. 특히 강희제의 14남이자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경쟁자로 불리던 순군왕 윤제(恂郡王 允禵)는 건륭제의 배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건륭제는 아버지가 재위기간 내내 추진하던 종친들을 정치 일면에서 배제시키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강희제나 옹정제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황자들과 일부 세력있는 방계 황족들은 군이나 육부를 통솔하였으나 그 당시의 골육상쟁을 잘 알고 있던 건륭제는 황족들을 대부분 군과 육부, 군기처에서 배제시켰고 그의 아우들마저도 정치적 발언을 규제하여 공사를 구별하였다. 혈기왕성한 청년의 건륭제는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어나 조회에서 대신들이 올린 각지에서의 보고를 받고 이를 수결하였다.
그러나 1736년(건륭 원년) 당시 조정에서는 두 개의 파가 있었는데 한 파는 영시위내대신 겸 군기대신 악이태로 군부의 신망을 얻고 있었고, 다른 파는 군기대신 장정옥으로 한족 출신의 대신들 중 가장 연장자로 당시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쓰고 있었다. 이들 두 대신은 강희제와 옹정제 때부터 조정에서 활약하던 실력자들이어서 기세가 모두 등등하였다. 건륭제는 악이태와 장정옥 모두 고령이라 머지않아 세상을 뜰 것이라 예상하여 방치해둔 채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어 서로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그 사이에 자신을 따를 신료들을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건륭제는 이들 둘의 정치적 역량과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이 죽을 때까지 내치지는 않았다.
건륭제는 곧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고쳤는데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는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4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인구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건륭제의 강력한 정책은 청대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사실상 부정부패가 시작되는 건륭제의 치세 후기까지만 지속되었다.
십전무공
보갑제와 이갑제의 덕으로 어느정도 내치를 다져서 그 성과를 본 건륭제는 국고의 은자가 풍족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나 농작도 잘되
어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건륭제는 더욱 자신의 위엄을 떨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러한 마음에는 건륭제가 평생 존경한 할아버지 강희제에 대한 동경심도 포함되었다.
1747년(건륭 12년), 대금천(大金川)을 시작으로 1755년(건륭 20년), 1757년(건륭 22년) 두번에 걸쳐 강희제 이후 세력이 미미해졌으나 여전히 몽골 고원을 호령하던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1769년(건륭 33년)에는 버마, 1776년(건륭 41년)에는 대금천과 소금천(小金川), 뒤이어 1788년(건륭 53년) 대만,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 1791년(건륭 56년), 1792년(건륭 57년) 두 차례에 걸쳐 네팔을 원정함으로서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몽골의 군사를 직접 지휘해 격파한 조부와는 달리 전선 근처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때 당시 청나라의 군사 상당수는 개국 때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이 아닌 강희제 때 신설된 한족 출신의 군대 녹영(綠營)의 군사들로서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인 사천총독 악종기(岳鍾琪)와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阿桂)가 주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원정은 바로 두 번에 걸친 준가르 원정과 대·소 금천 원정인데 준가르 원정으로 청나라는 외몽골을 얻었고 이 기세를 몰아 위구르족을 공격해서 그들을 복속시키고 크나큰 영토를 얻게 되어 새로 얻은 영토를 새로이 번성하라는 뜻의 신강(新疆)으로 명명하였다. 또한 티베트 일대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소 금천 원정에서도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성과를 보았으나 금천의 영토는 몽골에 비하여 턱없이 작았고 군비도 예상에 비해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 또한 금천 일대에는 1747년(건륭 12년) 금천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음에도 현지 주민들의 반란도 빈번히 일어났다. 주민들은 암도 지구의 티베트인들의 지원을 얻어서 항쟁을 계속하였고 건륭제는 꼭 29년 뒤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제작한 최신형 대포로 대금천과 소금천을 초토화시킨 다음에야 강제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조공품을 얻은 뒤 완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 이로서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160만 km² 늘려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버마에서는 콘바웅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청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청군이 쳐들어오자 버마도 역시 군사를 내보내 대응하게 하였으나 시암의 국왕 딱신이 군사를 내보내 버마와 싸워서 버마군을 대파하였다. 이 덕분에 청나라는 어부지리격으로 버마를 손쉽게 평정하고 버마를 조공국으로 삼았다. 그 후 대만에 천지회(天地會)라는 종교적 색채를 가진 단체가 반란을 주도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군사를 일으켜 대만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건륭제의 빠른 대처로 천지회 반란군은 궤멸되고 그 지도자들은 잡혀 처형되었다.
대만을 진압하고 그 다음해인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에서는 후 레 왕조 말기에 접어들었으나 떠이선 왕조가 잠시 들어서면서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쯔이에우 통은 광서성으로 도망쳐 청나라로 망명하여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건륭제는 그의 요청을 수락하여 대군을 보내 하노이를 공략한 다음 다시 쯔이에우 통을 왕위에 앉혔으나 그는 이미 건륭제에게 조공을 맹세하고 실권을 청나라에 넘겨 허수아비 왕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떠이선 왕조의 국왕 응우옌훼(阮惠)는 1789년(건륭 54년) 기습적으로 하노이를 공격하여 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놀란 쯔이에우 통은 다시 청나라로 망명하고 응우옌훼는 왕에 즉위한 후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
네팔을 점령할 때는 이미 네팔의 구르카 부족이 쳐들어와 1788년(건륭 53년) 티베트 남부를 점령하고 라사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티베트 주재 청군은 판첸 라마 텐페이 니마를 납치하여 다른 곳에서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건륭제는 사천성에 주재하던 군사들에게 티베트 남부에 있는 구르카 군사들을 몰아내라 명령하였으나 이미 구르카 부족은 퇴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1년(건륭 56년) 겨울, 구르카는 다시 티베트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맞서 건륭제는 팔기군과 녹영의 군사들을 파병하고 그 사령관에 자신의 처조카인 복강안(福康安)을 임명하여 구르카군을 몰아내도록 하였다. 복강안의 군대는 청해성으로 진격해 티베트 분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씨가 춥고 고지 분대라서 눈이 녹지 않아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봄이 되어 다시 진격한 후 1792년(건륭 57년) 여름에 구르카군을 섬멸하고 그들을 히말라야 산맥의 카트만두 계곡까지 압박하였다. 1793년(건륭 58년) 복강안은 구르카족의 항복을 만주식으로 받고 철군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건륭제는 자신이 이긴 모든 10번의 원정을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하고 이를 기념해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십전무공기》로 청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을 스스로 칭찬한 저서였다. 또한 자신을 십전노인이라 스스로 칭하였고 자금성 안의 무영전(武英殿)에 청군이 원정에서 얻은 화려한 진상품이나 조공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강남 순행
조부 강희제와 같이 건륭제는 여러 곳을 순행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순행은 황제가 백성들에게 부와 위엄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이었다. 건륭제는 개인적인 여가를 보낼 때나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심신을 달래러 주로 떠났는데 1751년(건륭 16년), 1757년(건륭 22년), 1762년(건륭 27년), 1765년(건륭 30년), 1780년(건륭 45년), 1784년(건륭 49년) 등 대대적인 강남 순행, 즉 남순(南巡)을 모두 여섯 번 단행하였다. 건륭제는 순행 할 때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명을 대동하였는데 여기에다가 건축가, 화가, 시인 등까지 데리고 가 그들과 더불어 강남의 절경을 논하였다. 그동안 북경에서는 장성한 황자나 여러 명의 군기대신이 남아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건륭제의 순행의 주요 동선은 남경, 양주, 항주, 그리고 소주였다. 이 네 도시에서 건륭제는 대운하나 다른 명승고적을 돌아다니며 담론을 즐겼고 저녁에는 호화로운 행궁에서 지역 유지들과 관리들이 주최하는 호화로운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매일 거르지 않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만찬을 벌려 자신이 가져온 내탕금이나 상인들과 지역 관리들이 바친 돈까지 모두 떨어지자 지역 관리들과 상인들의 하수인들이 자원하여 백성들로부터 돈을 뜯어내어 충당을 하였고 몇 개의 행궁을 짓는 데에도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큰 원성을 샀다. 조부인 강희제가 순행 때 가져간 내탕금만으로 모든 걸 충당하고 북경으로 돌아올 때도 다 쓰이지 않았던 것과 상반된다. 실제로 건륭제는 순행 때 강희제가 쓰던 비용의 평균 열 배 이상을 써서 국고의 돈을 지나치게 낭비하였다.
남순 이외에 사천성, 청해성 인근을 돌아보는 서순(西巡)을 4번 하였고 산동성, 호북성 인근을 도는 동순(東巡)도 5번이나 진행하며 각지의 교류를 트게 하였다. 건륭제는 자신을 수행하는 시인, 화가 등을 불러 황실에서만 마시는 좋은 차를 대접하며 시 한 수를 읊거나 써 줄것을 권유하였다. 특히 자신이 데려온 시인과 강남에서 살던 시인들과도 문예 대결을 펼치게 하는 등 문예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자신의 탁월한 예술적 안목으로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강남의 골동품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여 환관들로 하여금 특정한 골동품을 수소문하여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사서 가져오라 할 만큼 수집욕이 매우 컸다.
그러나 순행을 하면서 그는 가정적으로 큰 일을 두 번 겪었다. 1748년(건륭 13년) 건륭제는 자신의 정실 부인인 효현순황후 부찰씨와 더불어 동순을 나가 제남을 거쳐 공자의 고향 곡부까지 내려가 공림을 참배하였으나 효현순황후는 배 위에서 연회를 즐기는 도중에 강물에 빠져 북경으로 급히 가다가 덕주에서 오한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녀를 매우 사랑하고 아꼈던 건륭제는 크게 상심하여 순행을 떠나는 것을 몇 년간 중지하였고 동순을 갈 때에도 덕주를 경유하지 않고 우회하여 갔다. 그 후 건륭제는 한황귀비 오랍나랍씨를 황후로 새로 맞아들였으나 1765년(건륭 30년) 네 번째 남순 때, 연회 후 함부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려 하였다는 이유로 건륭제의 노여움을 사서 강제로 북경으로 보내졌다. 그 후 오랍나랍씨는 황후로서의 권위를 박탈당한 채 유폐되어 1768년(건륭 33년)에 사망하였고 황후가 아닌 귀비로서의 장례로 지내지고 황후로서의 시호도 받지 못하는 등 건륭제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문화·예술 발전과 문자의 옥
건륭제는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정무를 본 오전과는 달리, 오후와 저녁에는 시를 지으며 낙으로 삼아 평생 4만 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나 그 중 상당수는 어법이 틀리고 질도 낮아 잘 지어진 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예에는 실력이 뛰어나 자금성 안의 여러 편액들을 썼으며 대신들의 생일 때에는 자신이 손수 쓴 글귀를 그 대신에게 선물해주기도 하였다고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여 여러 그림을 남겼는데 주로 자신이 좋아하던 후원과 정자를 주로 그렸다. 건륭제는 순행에서도 그러하였듯이 황궁인 자금성에서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역시 차를 대접하며 그들의 학식과 예술성에 감탄하였다.
건륭제는 청나라 각지의 궁전, 행궁, 도로, 운하, 성벽, 사원 등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 데에도 힘썼다. 건륭제는 본래 자신이 태어난 잠저인 옹친왕부였으나 옹정제 때 라마교 사원과 행궁으로 개축된 옹화궁을 대폭 증축하였고 명나라 때 지어진 자금성이 너무 인위적이고 낡아서 자신의 쉼터가 될 만한 곳, 즉 큰 연못과 나무 등이 많은 거대한 후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최고의 장인, 석공, 목공 등을 불러 후원을 만들었는데 그때 처음 만들어진 후원이 북경 서북쪽에 있는 청의원으로 훗날 이화원으로 개명되었다. 다른 한 후원은 바로 원명원으로 본래 아버지 옹정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후원을 대폭 증축하고 옆에는 그 부속 후원인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을 새로 지였다. 건륭제는 원명원을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궁전이 되길 원하여 조부 때부터 궁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 중 최연장자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 랑세녕(郞世寧))와 프랑스에서 온 천문학자 미셀 베누아에게 원명원의 개·보수를 명하였다. 카스틸리오네는 베르사유 궁전의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을 본따 지었는데 지붕은 중국식, 건물 외벽은 서양식으로 지어 혼합 양식을 따 지었고 안에는 유럽 왕실에서 쓰는 진귀한 물건을 가져다놓아 전시하는 등 매우 화려하였다. 북경 밖으로는 강희제 때 지어져 북경 북쪽 승덕 땅에 있던 피서산장을 1743년(건륭 8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여 49년 후인 1792년(건륭 57년)에야 완성을 하였다.
건륭제는 이미 전임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와 같이 궁정의 선교사들을 우대하며 그들에게 부분적인 선교 활동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건륭제 자신은 조부와 부황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선교사들의 예술적, 과학적 지식만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건륭제의 증조부인 순치제부터 이미 아담 샬 폰 벨을 시초로 건륭제 때에도 이그나츠 쾨글러, 안토 고가이슬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대인 흠천감을 이끌며 중국의 천문학과 지리학에 도움을 주었다. 1769년(건륭 34년) 이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건륭황여전람도》(乾隆皇與全覽圖)는 서양식으로 그린 지도로 청나라의 강역을 세밀히 그려냈다.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마리 아미오는 여러 개의 황실 정원을 프랑스식으로 꾸며주고 《손자병법》과 같은 중국의 유명한 고서적이나 건륭제가 지은 시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건륭제는 1770년(건륭 35년), 중국에 있는 모든 고서적들을 수집할 것을 칙령으로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학자들에게 모든 고서적들의 이름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고서적들을 사서오경과 같은 고전인 ‘경’(經), 역사서인 ‘사’(史), 제자백가를 포함한 철학서인 ‘자’(子), 그리고 문집인 ‘집’(集) 등 모두 네 분류로 나누었다. 모은 서적을 모두 학술 기관인 한림원과 문연각(文淵閣)에 비치한 후 조사하여 분류하고 일람에 적어놓는 작업만도 2년이 넘게 걸렸다. 건륭제와 군기처는 이러한 사업이 세금도 적게 들고 국가의 문화적 위치를 한층 발전시킬 것이라 여겨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1773년(건륭 38년), 이렇게 모인 3,503 부에 79,337 권 33,054 책의 서적을 한데 모아 3,800여 명의 학자들이 필사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고전서》(四庫全書)이며 이 《사고전서》에 실린 서적들을 분류해 놓은 일람을 《사고전서총목제요》라고 한다. 《사고전서》는 9년 뒤인 1782년(건륭 47년)에 가서야 완성이 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의 양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북경의 자금성, 원명원 등 북경성 내의 4곳에서 보관한 뿐만이 아니라 양주, 진강, 항주 등으로 보내 한림원의 원로 학사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사고전서》는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져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사업인 《영락대전》의 3배를 훌쩍 뛰어넘는 양이었다.
건륭제의 치세에도 문자의 옥은 계속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1773년(건륭 38년)부터 모든 책들을 2년간 다시 조사하여 청나라의 정책과 그 뿌리에 정통성을 제기하는 서적은 모두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불태워버렸다. 이 책들은 대부분 명나라 말엽에 쓰인 것으로 선황인 태조 누르하치의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북방 민족은 한족을 다스릴 권리가 없다’, ‘명나라 만이 중원을 다스릴 유일한 정통 황조이다’라는 등 청나라의 중국 지배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건륭제는 이러한 행위를 대역죄로 처리하여 책을 쓴 저자와 그의 가족들을 변방으로 유배보내거나 노예로 삼았고 노골적으로 공격한 경우에는 주동자는 능지형에 처하고 그 삼족이나 구족을 멸하는 등 엄정하게 다스렸다.
경제와 부의 완성
건륭 시대 초기부터 선대인 강희제·옹정제의 강력한 내치와 더불어 새로운 작물과 농작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농업 수확률이 대폭 상승함에 따라 상업이 번창해져 경기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신대륙에서 전래되어 유럽 선교사들이 가져온 작물들이 서서히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고구마는 어느 땅에서나 잘 자라서 백성들의 기근을 면하게 해주어 이때 들여온 작물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밖으로는 무역을 늘렸는데 면, 칠기, 도자기, 비단 등이 주요 특산품으로 세계에 수출되었고 이에 따라 재정은 물론 백성들의 삶의 질도 크게 상승하였다. 차의 생산량도 크게 많아져 영국에 수출하는 차의 생산률이 건륭제 즉위 80년 후인 1815년(가경 20년)에는 50배까지 증가하였고 유럽 선교사와 상인들은 고가인 칠기 가구나 질 좋은 종이, 서적에 큰 관심을 가져 구입한 후 본국에다 다시 팔았다. 건륭제는 이러한 무역 정책을 크게 장려하여 유럽 상인들로부터 은이 많이 들어와 1760년(건륭 25년) 총 85,000 kg의 은이 국고에 있었으나 20년 후인 1780년(건륭 45년)에는 450,000 kg의 은이 국고에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부와 새로운 농작 방식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늘어났는데 1722년(강희 61년) 1억 5천만 명이었던 인구가 68년 뒤인 1790년(건륭 55년)에는 3억 명을 넘어서 배가 되었다. 18세기로 들어서면서 백성들이 문화·예술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여가 시간은 많아지고 각지가 부유해져 인구가 급속도로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대 이후 가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경기는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폭증하면서 경제적 부양력이 인구 상승률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이에 불만을 가지게 된 일부 백성들을 중심으로 반청(反淸) 세력이 싹트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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