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새벽 수황정 옆에서 비극적인 일생을 마친 숭정제의 체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십만 반란군이 '틈왕기'를 높이 들고 보모도 당당하게 북경성 선무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점심때가 되면서 덕승문 일대에는 각양각색의 제등이 걸내리고 수만의 인파가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모여들었다. 이자성이 부하 장령들과 함께 이곳에서 입성식을 거행했다.
이윽고 이자성은 털모자에 푸른 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장령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당당한 모습으로 입성식장에 나타났다. 길 양쪽에는 '영창원년', '대순왕만세'라고 쓰여진 황색 깃발들이 나부끼고 잇었다. 이자성은 이 광경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이자성은 군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장안문을 통과하여 승천문(천안문)으로 자금성에 들어갔다. 자금성에 들어선 이자성은 말에 채찍을 더하여 황극전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자금성 하늘에는 이자성을 상징하는 '틈왕기'가 펄럭였다.
대순왕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황후를 황제.황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그리고 일련의 정령을 공포하는 한편 수백 명의 관리를 하북.하남.산서.산동.섬서.사천.강소.호북 등지에 파견하여 지방 정권의 귀순에 힘을 기울였다. 이자성은 천하통일이 실현된 것으로 믿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새로운 황제국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이자성의 북경 점령을 기정사실로 판단한 각 지방의 주둔군과 행정 기관은 이자성의 신정권을 지지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맹세의 문서를 보내느라 분주하엿다. 그러나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청군 침공에 대비하여 방어중인 산해관 수비대장 오삼계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삼계는 이자성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향하다가 이미 북경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지금성 하늘에 틈왕기가 펄럭인다는 소식을 청나라에도 전해졌다. 이때 청나라는 태종이 죽고 8세 난 어린 아들 푸린이 즉위해 숙부인 예친왕(도르곤)이 섭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의 야망에 불타던 예친왕은 이 기회에 꿈을 실현하고자 친히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떠나 산해관 쪽으로 향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는 가중되는 청군의 압력과 이자성군의 동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 오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이자성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너도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오삼계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자성으로부터 군용 자금조로 백은 4만 냥이 전해졌다. 그러자 오삼계의 마음은 이자성에게 귀순하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 그런데 오삼계의 심경을 뒤바꾸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자성이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집을 덮쳐 아버지를 연행해갔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오삼계는 자신을 잡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이자성이 거짓으로 아버지 편지를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아끼는 애첩 진원원에 대해 물었다.
중국 사극 '강산풍우정'에 나온 진원원
도대체 진원원이 누구인가? 진원원은 성은 형이고 이름은 원이라 했다. 원래 소주 태생의 명기였는데 그 후 북경으로 올라와 우연한 기회에 연회석상에서 오삼계의 눈에 들어 매료시켰다. 그 후부터 오삼계는 진원원을 총애하여 보물처럼 아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진원원을 포악하기로 유명한 유종민이 빼앗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오삼계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섰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원원은 무사하더냐?"
"원원 아씨는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유종민은 이자성의 부하 가운데 가장 포악한 인물이었다. 원원의 소식을 듣자 순간 오삼계는 눈이 뒤집히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장부가 한 여자를 구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오삼계의 태도는 돌변하여 즉시 청나라에 투항할 것을 결심하고 서신을 보냈다. 지금까지 대치하던 적인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이자성을 쳐 없앨 작정이었다. 명의 멸망과 이자성의 건국의 물거품, 청나라의 중원 진출 가능성 여부가 여기서 결정이 나는 순간이었다.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결정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놓는 순간이엇다. 오삼계의 판단은 결국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물거품으로 만들게 되었으며 오삼계 스스로도 청나라의 중원 평정에 이용만되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비극의 종말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로 인해 청나라는 어부지리로 중원을 점령하게 되는 천운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오삼계의 특사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심양으로 달려가다가 옹후(요령성 광녕 부근)에서 공교롭게도 예친왕의 행렬과 마주쳤다. 오삼계의 특사는 예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바치자 예친왕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자못 가슴이 설렐지경이었다.
"산해관은 난공불락의 명나라 요새이다. 일찍기 태종 홍타이지도 정면 공격을 피했던 금성탕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산해관을 지키는 명나라 군대의 안내를 맏으며 산해관을 넘게 되었으니 정년 하늘이 우리 청나라를 도움이로다!" 라며 예친왕은 오삼계의 특사에게 지원의사를 흔쾌히 밝히고 답서를 쓰서 보냈다. 그리고 산해관을 향해 서서히 진군해 나가면서 다음 작전능 구상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거느리는 산해관의 명군과 이자성의 군대와 싸움은 격렬할수록 좋다. 양군이 사투를 벌여 힘이 다 빠졌을 때 우리의 철기가 돌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나중에 오삼계를 제거하는 데도 유리하다. 그래서 오삼계의 전력을 극도로 약화시켜야 한다."
한편 산해관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이자성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는 오삼계의 움직임에 크게 분노하여 친히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삼계 토벌에 나섰다. 이때 이자성의 진중에는 포로가 된 숭정제의 황태자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 그리고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도 함께 대동하였다.
이자성의 선봉군은 산해관 가까이 있는 일편석에 당도하여 오삼계와 대치했다. 청의 예친왕은 명군의 안내로 산해관으로 입성하여 오삼계를 만나 크게 치하하며 투항을 격려했다. 그리고 예친왕은 이자성군과 구분을 위해 오삼계에게 군사들로 하여금 변발과 갑옷에 흰 천을 두르도록 하였다.
예친왕이 산해관에 들어간 4월 23일부터 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예친왕은 자신의 계획대로 오삼계로 하여금 이자성 주력부대를 돌격하여 격파하도록 종용했다. 이자성군은 산해관 북쪽 산으로부터 해안에 걸쳐 20만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분노에 찬 얼굴로 성문을 열고 출격하자 이자성군은 장사진의 양 날개를 급히 꺽어 오삼계군을 포위할 태세를 보였다. 마침내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수십 번의 충돌이 되풀이되면서 혈전이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모래와 자갈이 어지럽게 날리고 우뢰 소리와 같은 굉음이 양 진영을 맹타하였다. 청군의 포격과 오삼계군의 맹공으로 이자성군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수십 차례 충돌로 기진맥진한 이자성 앞에 갑자기 청의 철기군이 나타나자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철기군이 종횡무진으로 이자성군을 무너뜨리고 본진까지 위험해지자 대패를 직감한 이자성은 말을 타고 앞장서서 도망쳤다. 이자성은 영평까지 도망쳐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왕칙요, 장약기 두 사람을 오삼계에게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있었기에 강화를 낙관하였으나 오삼계는 강화를 받아들일 능력마져 없었다. 강화 제의를 일축하고 추격을 계속하자 이자성은 인질로 잡고 있던 오삼계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쳤다.
그 길로 이자성은 북경까지 단숨에 도망쳐 돌아갔다. 이자성 신하들이 황제 즉위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시간에 이자성이 북경성에 당도하였다. 이자성은 서둘러 오삼계의 가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38명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자성은 4월 29일 자금성의 무령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황제를 칭하였다. 즉위식을 올리면서도 이자성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다. 그를 추격하는 청군이 곧바로 북경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즉위식을 올린 이자성은 도망칠 준비를 하였는데, 자금성 안에 있던 엄청난 금을 녹여 소 금괴로 만들어 일단 서쪽으로 도망친 다음 재기할 때 군자금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이날 밤 도망칠 준비를 끝낸 이자성은 궁전과 성루에 불을 지르고 다음날인 30일 나머지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자성이 북경을 떠난 다음날인 5월 1일 예친왕이 거느리는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명나라 문무백관들은 성 밖까지 나와 새 권력자의 입성을 환영했다. 40일 전 이자성을 환영하였던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이민족인 청군을 맞아들여야 하는 북경 백성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예친왕이 거느리느 청군은 해방군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북경에 입성하였다. 무령전에서 명나라 관료들의 조하를 받았다.
다음날 예친왕은 숭정제의 죽음을 발표하고 백성들에게 3일간 복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예에 따라 숭정제를 이장하고 능묘를 세워 사릉이라 하였다. 또 명나라 모든 관료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명나라 관리들은 청나라 관리들과 같이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공공기관의 직인은 한자와 만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예친왕이 북경에 입성한 후 일마 있다가 청나라 어린 황제 순치제가 북경에 천도함으로써 청나라는 지방 할거정권에서 명실공히 중국을 통일하는 왕조가 되어 2백 수십 년에 걸친 청나라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오삼계의 마음을 움직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진원원은 이자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오삼계의 추격을 늦추도록 해겠다는 진원원의 이야기를 듣고 살려주고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진원원은 오삼계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몇 년 후 오삼계가 남명정권 황제를 추격하여 운남까지 갔을 때 그곳 운남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역사 ,세계사 > 중국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성공의 대만 경략) (0) | 2013.06.13 |
---|---|
(청태종의 중국 침입) (0) | 2013.06.13 |
(이자성의 난) (0) | 2013.06.13 |
한(漢)과 흉노(匈奴)의 "60년평화"는 누가 가져다주었는가? (0) | 2013.06.13 |
곽씨일족(霍氏一族)은 왜 한선제에게 멸족당하는가? (0) | 2013.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