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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르카 전투(Battle of Moniorca) | 7년전쟁의 모든 것 -3

구름위 2013. 6. 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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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의 기폭제

미노르카 전투(Battle of Moniorca)

 

미노르카 섬의 중심도시인 마혼의 한가로운 모습

 

지중해 한가운데에 마요르카 섬이 있고 그 옆에 미노르카 섬이 있다. 모두 스페인령이다. 바르셀로나로부터 보면 한참 남쪽에 있다. 마요르카(Majorca)는 Major Island(큰 섬)라는 뜻이며 미노르카(Minorca)는 Minor Island(작은 섬)이라는 뜻이다. 미노르카 섬은 망망대해 지중해의 한 가운데에 외롭게 있어서인지 현재 인구 8만8천명에 불과하다. 미노르카 섬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을 죽이며 지내왔다. 이 섬에는 선사시대로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오랜 유적이 남아 있다. 고대이후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반달족을 비롯하여 여러 이민족들의 침범이 다반사로 있었던 교통의 요지였다. 그러다가 근대에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가 1708년 이른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스페인이 영국에 패하자 영국의 관할이 되었다. 영국은 이 섬에 총독을 두고 수비대를 위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미노르카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마혼(Mahon)의 부근에 있는 성필립요새(Fort St Philip)이다. 그러한 미노르카가 세계를 뒤흔들었던 7년 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영원한 견원지간인 프랑스와 영국이 미노르카 섬에서 대결하여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섬을 장악한 것이다. 이를 ‘미노르카 전투’라고 부른다. 7년 전쟁의 개시를 알리는 본격적인 전투였다. 미노르카 전투는 성필립 요새 공성과 미노르카 해전으로 나눌수 있다. 먼저 성필립 요새에 대한 프랑스의 포위공격이 있었고 그후 영국군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해군과 역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해군이 마혼(Mahon)의 앞바다에서 해전을 벌였다. 마혼은 미노르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두 전투는 모두 프랑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영국!

 

미노르카 해전이 벌어졌던 해안에 있는 등대

 

미노르카 전투는 영국이 먼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발단되었다. 선전포고 이후 두 나라의 군대가 처음으로 조우한 곳이 미노르카 섬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캐나다의 동부지역, 특히 퀘벡지역을 놓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미국의 남부지역, 특히 루이지애나에서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대전하고 있었다. 이를 프랑스 및 인디안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인디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프랑스는 아메리카에서 영국에 항거하는 독립군과 함께 영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사회가 불안해졌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심지어는 내친 김에 프랑스가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영국은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프랑스에 대하여 미리 선전포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프랑스는 이번 기회에 영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의 우선 전투를 벌인 곳이 지중해의 고도 미노르카였다.

 

 미노르카 섬의 항구 도시인 마혼(Mahon)

 

선전포고는 영국이 먼저 했지만 프랑스군이 먼저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리술류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은 1756년 4월 25일 미노르카 섬에 상륙하여 영국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성필립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영국군 수비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지만 끈질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영국군이므로 무던히도 잘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미노르카의 영국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은 지브롤터에 주둔하고 있던 존 빙부제독을 해군제독으로 임명하고 10척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미노르카에 급파하여 수비대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을 내쫓도록 하였다. 존 빙 제독은 우수한 사령관이었다. 냉철한 이성과 풍부한 지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영국 해군의 함선들은 모두 보수해야할 정도로 취약한 형편이었다. 반면, 툴롱에서 파견된 프랑스함대는 강력하였다.

 

지브롤터를 출발한 영국 함선은 5월 19일 미노르카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성필립요세를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군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프랑스로부터 지원함대가 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기 때문에 우선 프랑스 함대를 맞이하는 것이 더 급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함선들은 5월 20일 마혼의 앞 바다에서 조우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프랑스 함대들은 학익진을 펼쳤고 영국군은 창을 찌르듯 일자형으로 돌진하였다. 결과는? 영국이 크게 패배하였다. 존 빙은 성필립요새의 영국 수비대를 구조하지도 못하고 지브롤터로 후퇴하였다. 그후 성필립요새에 있는 영국군은 한 달 이상이나 버텼지만 결국 6월 25일 항복함으로서 자존심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영국군 수비대의 패잔병들은 그나마 프랑스의 자비심으로 목숨을 건져 영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성필립요새에서 끝까지 항전했던 윌리엄 블레이크니(William Blakeney) 사령관은 나중에 영국에서 귀족의 칭호를 받았지만 구원하기 위해 왔다가 패배하여 후퇴한 존 빙은 미노르카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법회의를 거쳐 총살형을 당했다.

 

존 빙 제독. 영국의 우수한 지휘관이었으나 미노르카 해전에서의 패배로 처형을 당했다.

 

존 빙을 처형한 것은 볼테르의 소설 캔다이드(레오나드 번슈타인이 오페라로 만들어 더 유명해짐)에 나오는 대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프랑스어로 Dans ce pays-ci, il est bon de tuer de temps en temps un admiral pour encourager les autres라고 되어 있다. 굳이 번역하면 ‘이 나라에서는 때때로 해군제독을 처형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 현명한 일이다’이다. 미노르카 전투 이후 영국은 한두번 병력을 파견하여 프랑스로부터 재탈환코자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미노르카가 영국의 손에 다시 들어온 것은 파리 조약에 의해서였다. 프랑스는 영국이 소유하고 있던 과데루페(Guadeloupe: 일명 나비섬)와 미노르카를 교환하였다. 그러다가 1781년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이 패배하자 미노르카는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카리비아에 있는 지상낙원인 과데루페 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