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7년 전쟁의 배경 | 7년전쟁의 모든 것 -4

구름위 2013. 6. 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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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의 배경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연장이라고 말할수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까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벌인 전쟁이다. 샤를르6세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인 마리아 테레자를 자기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삼고자 했으나 ‘아니, 여자가 무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단 말인가?’라면서 열강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로레인 가문의 프란시스를 사위로 맞아 들여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인 프란시스는 명목상의 군주이며 모든 정사는 사실상 마리아 테레자가 관장하였다. 1740년, 샤를르6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인 프란시스1세가 결국은 합스부르크를 대표하여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1685-1740)의 젊은 시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지자 유럽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던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는 ‘어찌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사람들만 계속 해 먹느냐?’면서 이런저런 구실을 내걸고 마리아 테레자를 견제하다가 결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합스부르크를 공격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별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프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의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거의 8년 동안 끈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자의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여 1748년 액스 라 샤플르(Aix-la-Chapelle)조약에 따라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양보했다. 실레지아는 오늘날 주로 폴란드에 속한 지역이며 일부는 체크공화국과 독일에 걸쳐 있는 곳이다. 전쟁에 패배하여 프러시아에 실레지아를 주어야 했던 마리아 테레자는 와신상담을 다짐했다. 마리아 테레자는 군비를 재건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동맹을 만들기 위해 프러시아에 일단은 머리를 숙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생 원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레데릭을 '악마같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자의 외교 전략은 전혀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에 과감히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정치지도는 마리아 테레자의 의도대로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의기투합하여 동맹을 맺어 프러시아와 영국을 대적하게 되었다. 이를 1756년의 Diplomatic Revolution(외교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자 프러시아의 유일한 지원국은 영국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과 프러시아는 조상이 같은 하노버 가문이라면서 동맹을 맺자 겉으로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더구나 영국의 하노버 가문은 오래동안 프랑스로부터 위협을 받아 왔다. 그런 점에서 영국과 프러시아는 ‘우리는 진작에 동맹을 맺었어야 했는데! 나 원 참!’이라면서 늦었지만 동맹을 맺게 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영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다. 카리브해와 대서양에서 스페인 함대를 약탈하기를 밥 먹듯이 한 것도 영국의 해군, 즉 해적이었다. 한편, 프러시아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명령에 따라 돌격만 하는 독일병정의 정신은 바로 프러시아 육군이 주입한 정신이었다. 영국은 유럽 본토에 프러시아라는 강력한 동맹국을 갖게 되자 해군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해외 식민지 개발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외교혁명’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동맹(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이 프러시아와 싸우지 말고 평화스럽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영국과 프러시아가 동맹을 맺은 것은 결국 7년 전쟁을 야기한 촉매역할을 하였을 뿐이었다. 비록 수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유럽의 군주들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러시아에 패배한 마리아 테레자는 군대 시스템을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에 따라 프러시아 시스템을 도입하여 군대를 개혁하였다. 마리아 테레자의 군사지식은 실로 휘하 장군들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자는 퇴역병사와 전사자 및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복지도 크게 강화하였다. 이에 감동한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마리아 테레자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퇴역장병들은 나라로부터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자 그 은혜에 감읍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마리아 테레자를 위하여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갈 기세에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프러시아로부터 모욕적인 패전을 여러번 당하였다. 그럴 때마다 유일한 동맹국인 영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바랐지만 바다건너의 영국은 거리가 멀다는 핑게로 선뜻 지원병을 보내지 않고 자기들 실속만 차리기에 바뻤다.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동맹을 맺은 프랑스는 지리적으로 이웃이었다.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스트리아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더구나 마리아 테레자는 막내딸인 마리 앙뚜아네트를 프랑스의 루이16세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사돈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마리아 테레자는 눈물을 흘리며 프러시아에 넘겨주어야만 했던 실레지아를 다시 찾고 프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상과 같은 배경이 ‘7년 전쟁’의 첫 번째 사연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 딸로서 프랑스의 왕세자(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12세 때인 1767년. 12세라...

               

두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과열된 식민지 투쟁을 원인으로 꼽을수 있다. 두 나라는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서로 식민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총검을 앞세우고 대결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하이오국가(Ohio Country)를 놓고 서로 대결한 것이었다. 오하이오국가는 지금의 미국 오하이오 주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수립된 일종의 신생국가 형태로서 이를 차지하는 것이 추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력을 잡을수 있는 발판이되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 이전인 1754년부터 사실상의 전투를 벌였지만 이는 유럽이 아니라 아메리카에서였기 때문에 유럽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