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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의 외교정책 | 7년전쟁의 모든 것 -5

구름위 2013. 6. 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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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의 외교정책

 

18세기에 프랑스의 동맹국 또는 식민지에 대한 외교정책은 특별했다. 간단히 말해서 ‘되도록이면 당신들 혼자의 힘으로 꾸려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민지나 동맹국에서 군사요청을 하면 명목상으로 최소한의 군대를 파견하였을 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만일 프랑스 본토가 군사적인 위협을 받으면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한 배경 때문인지 해외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프랑스 본국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는 일은 극히 드믈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 상당수의 군대를 배치한 것이었지만 그것도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모집한 용병들인 외인부대가 주축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는 영국에 비하여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영국은 해외의 식민지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함선에 병사와 보급품을 싣고 지원에 나섰지만 프랑스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한 프레데릭 대제

 

영국의 외교전략을 좀 더 관찰해보자. 영국이 어떤 영국인가? 세계에 유니온 잭이 휘날리지 않는 곳이 없다는 그 영국이다. 그런 영국의 대외전략은 유럽 대륙에 하나의 든든한 동맹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든든하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막강한, 특히 육군이 강력한 나라를 말한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은 바로 입맛에 맞는 동맹을 발견하였다. 프러시아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프레데릭 2세: 1712-1786)는 뛰어난 전술가이기도 했다. 영국은 동맹국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해상을 통해 지원을 한다. 하지만 많은 수의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는다. 되도록 적은 수의 병력만 파견한다. 그래서 돕는다는 생색을 내며 영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이 대신 싸워주도록 한다. 프러시아와의 동맹에서도 영국은 프레데릭 대왕이 열심히 싸우도록 군비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해군을 동원하여 적국의 해상운송을 봉쇄하고 적국의 군항에 함포사격을 퍼붓는 일도 영국의 주특기였다. 물론, 외국으로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우수한 해군력으로 임무완수였다.

 

프러시아 보병. 옛날 전투는 이랬다. 전진..또 전진..뻔히 총알을 맞고 쓰러질것을 알면서도 척척 발마추어 전진만 했다.

 

신대륙인 아메리카(미국)에서 영불의 적대관계는 나중에 유럽대륙으로 옮겨졌다. 프랑스는 아메리카에서 이른바 미시시피 밸리(Mississippi valley)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부해안지대에서 이미 발판을 굳혀 놓고 있었다. 175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는 더 북쪽으로 진격을 시도했고 영국은 더 남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두 세력이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세력은 버지니아(현재의 워싱턴 일대)와 펜실베이니아를 서로 차지하려고 총을 겨누지 않을수 없었다. 이른바 프랑스-인디안 전쟁의 일단이었다. 아메리카에서의 ‘7년 전쟁’이었다.


[1756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8세기 영국 수상인 뉴캐슬 공작(Duke of Newcastle)은 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전투가 유럽대륙까지는 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프랑스가 선수를 쳤다. 툴롱(Toulon)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더니 얼마 후에는 예상치도 못하게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을 공격하였다. 영국은 미노르카 섬을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후퇴해야만 했다. 1756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영국 해군제독인 빙(Byng)이 패전의 죄를 물어 처형당했다. 아메리카의 오하이오에서 영불간의 전투가 벌어진지 2년후의 일이었다.

 

로보지츠 전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는 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고 있고 지중해에서는 프랑스가 미노르카 섬을 공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는 소식을 듣자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영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보급 받기로 약속받은 프레데릭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1756년 8월 29일 작소니를 공격하였다. 작소니는 독일 국가의 하나로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프레데릭은 장차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군이 실레지아를 되찾기 위해 공략할 것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선수를 쳐서 작소니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작소니와 오스트리아는 아직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마치 6. 25때 아무런 방비도 없었던 우리나라를 북한 공산당이 일거에 쳐들어왔던 것과 같았다. 작소니와 오스트리아군은 미안한 말이지만 작전상 후퇴를 하였다. 얼마후 재결집한 작소니-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Lobositz)에서 프러시아군과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전략에 뛰어난 프레데릭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프러시아군은 작소니-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훌륭하게 방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 피르나(Pirna)에서 작소니군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프러시아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작소니를 점령하고 손에 넣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그나마 승리한 것은 실레지아의 일부지역에서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가 승리한 로보지츠 전투 

 

실상 영국은 프러시아가 갑자기 전투를 벌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이 그렇게 되었으므로 동맹조약에 의해 보금품이나 열심히 제공할수 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영국은 더치 공화국을 설득하여 같은 편에 서도록 시도하였다. 그러나 더치 공화국은 중립으로 남아 있겠다고 하며 어느 편에 서기를 거부하였다. 당시 서로간의 병력을 따져 보면 프랑스-오스트리아 쪽이 훨씬 우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벌어지자 프레데릭 대왕의 프러시아 군대는 전격작전의 덕분으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은 북미에서 실망스런 결과를 얻었지만 유럽에서는 동맹국인 프러시아 덕분에 일시적이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