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30년전쟁 의모든것(4)

구름위 2013. 5. 18. 10:10
728x90

[프랑스의 관여] 1636-1648


[리슐르 재상의 선택]

프랑스는 철저 가톨릭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과 한치도 양보할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프랑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 측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 들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루이13세의 재상(宰相) 리슐르(Richelieu)추기경은 합스부르크가 아직도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가 프랑스로부터 동부에 있는 지역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며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고 프랑스로부터 북부에 있는 저지대의 네덜란드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상 리슐르는 자신이 가톨릭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동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에 대항키로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더치(Dutch) 및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13세 시대의 재상 리슐르 추기경


[마자랭의 등장]

프랑스가 그렇게 나오자 위협을 느낀 스페인이 먼저 프랑스를 공략하였다. 1636년 신성로마제국의 요한 폰 베르트(Johann von Werth) 장군과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Ferdinand Habsburg) 추기경이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샴파뉴(Champagne)와 버건디(Burgundy) 지방을 유린하고 내친김에 파리까지 위협하였다. 그러자 작센-봐이마르(Saxe-Weimar) 공국의 용감한 베른하르트(Bernhard: 베르나르: Bernard) 장군이 콩피에뉴(Compiegne) 전투에서 가톨릭 연합군을 프랑스 국경밖으로 몰아냈다. 이후 양측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면전을 펼치며 승부를 가렸으나 양측에 피해만 주었을 뿐 승자는 없었다. 1642년, 전쟁을 물심양면에서 지원하던 리슐르 재상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년후에는 전쟁을 주도한 루이13세도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살의 루이14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루이14세의 재상인 마자랭(Mazarin) 추기경은 전쟁이 지겨워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작센-봐이마르 공국의 베른하르트(베르나르) 공작 


[최후의 렌 전투]

한편에서는 평화협상이 추진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645년, 스웨덴의 렌나르트 토르텐슨(Lennart Torstensson) 원수가 이끄는 군대가 프라하 부근의 얀카우(Jankau)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2세(Louis II de Bourbon)는 제2차 뇌르딩겐 전투에서 바라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가톨릭 사령관인 프란츠 폰 메르시(Franz von Mercy) 남작은 제2차 뇌르딩겐 전투에서 전사했다. 1647년 3월, 바바리아, 쾰른, 프랑스, 스웨덴의 4자는 울름(Ulm)에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듬해인 1648년, 스웨덴과 프랑스 연합군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추스마르스하우젠(Zusmarshausen)과 렌(Lens)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합스부르크의 지역에 한정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편, 스페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페인은 일찍이 1643년, 프랑스 부르봉의 루이2세 장군에게 대패하여 이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도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에게 승리를 가져온 렌전투 


[베스트팔리아 조약]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보헤미아 봉기 이후 덴마크 및 스웨덴의 군대를 제압했던 것과는 달리 프랑스와의 한판 승부에 패배하여 평화협상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 당사국들인 페르디난트3세의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더치, 스위스, 스웨덴, 포르투갈, 그리고 교황청 대표가 협상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저 유명한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조약이다. 

 

30년 전쟁 협상의 리더인 프랑스의 줄르 마자랭 추기경


아우구스부르크 칙령에 의거, 모든 나라들은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3세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제국에 속하여 있는 나라에서 개신교 신봉을 반대하였다. 페르디난트3세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의 모든 권한이 박탈당했다. 이로써 독일 국가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종교를 다시한번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정교일체(政敎一體)의 원칙, 즉 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른 것이다. 베스트팔리아조약에 따라 개신교와 가톨릭은 동등한 위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칼빈주의도 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조약의 내용]

역사적인 베스트팔리아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의 정신에 따라 모든 군주들은 자기 영토에서 개신교이든, 가톨릭이든, 칼빈주의이든 종교를 선택할 권한을 갖는다. (All parties would now recognize the Peace of Augsburg of 1555, by which each prince would have the right to determine the religion of his own state, the options being Catholicism, Lutheranism, and now Calvinism : the principle of cuius regio, eius religio).

- 비록 자기가 속하여 있는 나라가 이미 어떤 교파를 선택했다고 해도 자기의 교파가 다르다면 자기 의사에 따라 자기 교파의 신앙 활동을 제한된 시간내에 개인적으로 수행할수 있다. (Christians living in principalities where their denomination 교단 교파 was not the established church were guaranteed the right to practice their faith in public during allotted hours and in private at their will.)


영토에 대한 조정도 이루어졌다. 협상은 프랑스의 마자랭 추기경이 주도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14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은 국정은 마자랭 추기경이 맡았었다.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하여 우선권이 있었다. 로레인 인근의 메츠(Metz), 툴(Toul), 베르뒨(Verdun) 추기경 교구의 영지, 알사스의 데카폴(Decapole)에 있는 도시들(스트라스부르 제외)이 프랑스의 관할도 들어갔다.  

- 스웨덴은 서부 포메라니아(Pomerania)와 브레멘 및 베르덴(Verden) 추기경 교구의 영지를 보장 받았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은 사실상 오더(Oder)강, 엘베(Elbe)강, 베저(Weser)강 하구를 관할할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은 독일 제국의회의 제후위원회(Council of Princes)에서 3표의 투표권을 얻었다.

- 바바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제국선거후위원회(Imperial Council of Electors)에서 팔라틴의 표를 갖게 되었다. 바바리아는 1623년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을 반대한바 있다.

-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Brandenburg-Prussia: 훗날 프러시아 제국)는 포메라니아의 일부와 마그데부르크(Bagdeburg), 할버슈타트(Halberstadt), 캄민(Kammin), 민덴(Minden) 추기경 교구의 영지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 윌리히(Julich), 베르크(Berg), 라벤슈타인(Ravenstein)은 노이부르크(Neuburg)의 분봉제후에게 주어졌다. 클레브스(Cleves), 마르크(Mark), 라벤스베르크(Ravensberg)는 브란덴부르크에게 돌아갔다.

- 브레멘(Bremen)을 독립된 도시국가로 인정하였다.

- 팔라틴(Palatinate)은 둘로 나누어졌다. 개신교인 팔라틴 선거후 샤를르 루이(Charles Louis: 프레데릭5세의 아들)와 가톨릭인 바바리아의 선거후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분배되었다. 샤를르 루이는 라인 연안의 남부 팔라틴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막시밀리안은 바바리아 북쪽에 이르는 상부 팔라틴을 관할하게 되었다.

- 전쟁중 폐기되었던 무역에 대한 장벽이 거두어졌다. 누구나 라인강을 자유롭게 운항할수 있게 되었다.


30년 전쟁이 남긴 것

 

[인명손실과 역병]

30년 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와 인명소실은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심각한 것이었다. 독일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전체 독일 주민의 30%이상이 희생되었다. 병사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전사하기도 했지만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민간인들은 잔인무도한 용병들 때문에 많은 희생을 보았다. 용병들의 살인, 강간, 약탈, 방화, 폭력은 이들이 과연 종교를 위해 전쟁을 하는 사람들일까 라는 의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었다. 용병들은 폭력을 일삼았지만 실제로 전쟁으로 치부를 하는 사람들은 장군들이었다. 장군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병사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약탈한 재물들을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전쟁에 투입할 병사들을 빼돌리는 사령관들도 많았다. 전쟁은 경제와 인구의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왔다. 부익부 빈익빈이었으며 농촌의 피난민들 때문에 농촌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30년 전쟁중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얀코프 전투


30년 동안 독일과 주변 국가들은 여러 종류의 전염병으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전염병을 뿌리고 다니므로 어쩔수 없었다. 군대가 이동할 때, 외국 군대가 유입될 때, 그리고 전투가 끝난후에 인마의 시체 등으로 전염병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피난민들이 도시에 몰려들면서 괴질을 전염시켰다. 물론 전염병이란 것이 전쟁기간중에만 발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 전에도 괴질이 만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호는 예상 이상이었다. 1625-26년에 덴마크 군대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작소니 및 투린기아(Thuringia)에서 조우한후 이 지역에 전염병이 크게 번진 일이 있다. 지역 교회에서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헝가리 병’ 또는 ‘머리 질병’이 번져 수많은 병사들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장질부사였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과 합스부르크군이 만투아 전쟁(Mantuan War)을 벌인후 북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른바 ‘이탈리아 역병’이라는 쥐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이 만연했다. 1632년 스웨덴이 뉘른베르크(Nuremberg)를 공성하였을 때 양쪽 군대는 물론 뉘른베르크의 주민들 사이에 장질부사와 괴혈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사망했다. 2년후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스웨덴 군대를 추격하여 라인강을 따라 북상할 때에도 원인 모를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져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전염병 중에서도 쥐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은 30년 전쟁을 계속 괴롭혔다. 1634년의 기록을 보면 드레스덴과 뮌헨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유행성출혈열과 같은 전염병이 번져 희생이 컸다고 되어 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독일에서 장질부사와 이질, 그리고 풍토병이 기승을 부렸다.


[정치적 후유증]

30년 전쟁의 결과중 하나는 독일 국가들이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으로 존속하고 있지만 각각 실질적인 주권을 가진 지역들로 분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독일국가들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저해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같은 분열이 훗날 독일 통일을 위한 국수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그런 사항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영국의 여류사학자 C.V. Wedgewood가 쓴 '30년 전쟁사'. 무시무시한 표지.


30년 전쟁은 과거 유럽의 권력구조를 재편해 주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군사력과 정치력은 현저한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스페인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매달려 있을 때 과거 거의 60년 동안 스페인의 그늘 아래 있었던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과거에는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30년 전쟁 기간중 포르투갈은 브라간자(Braganza) 가문의 후안4세(Juan IV)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이후 브라간자 왕조가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문을 열었다. 한편, 스페인은 1648년 마침내 더치공화국(오늘날의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서 스페인과 더치(Dutch)간의 80년에 이르는 분규를 마무리하였다. 스페인이 약화되자 프랑스가 유럽의 맹주로 등장하였다. 프랑스의 득세는 프랑스-스페인간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함으로서 더욱 굳건해졌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패배는 합스부르크 세력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프랑스 부르봉(Bourbon)왕조가 부상(浮上)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0년 전쟁의 후반기에 스웨덴과 덴마크는 별도의 토르스텐슨(Torstenson)전쟁을 치루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이 승리하였고 더구나 베스트팔리아 조약에 의거하여 스웨덴의 위상이 올라가자 스웨덴은 30전쟁 이후 유럽의 강자로 자리를 잡았다. 

 

포르투갈 브라간자 왕조를 창시한 후안4세(Joaol)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규모 종교전쟁이었다. 이후로 유럽에서는 종교분규로 인한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 전쟁중 용병의 만행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다. 이후로 용병을 사용하는 일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대신 자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30년 전쟁을 요약해보자. 기간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장소는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 결과는 베스트팔리아조약이었다. 교전당사국은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가톨릭연맹,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스페인이 한편이었고 다른 한편은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더치공화국, 스코틀랜드(주로 용병 제공), 영국, 작소니였다. 전쟁에는 유명한 지휘관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신성로마제국 측에서는 틸리백작인 요한 체르크라에스(Johann Tscerclaes), 알베르트 폰 ?렌슈타인, 페르디난트2세, 페르디난트3세, 막시밀리안1세 등이 전쟁을 지휘했고 개신교측은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 프랑스의 리슐르 추기경, 부르봉의 루이2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 국왕, 봐이말의 베른하르트, 작소니의 요한 게오르그1세 등이었다. 병력은? 신성로마제국 측은 스페인군 약 45만명과 독일 국가의 군대가 ?렌슈타인의 군대를 합하여 약 20만명으로 거의 65만명에 이르는 대군이었으며 개신교 측은 스웨덴군 약 15만명, 덴마크 군 2만명, 더치공화국 군 7만5천명, 독일군 약 10만명, 프랑스군 15만명 등 모두 50만명에 이르는 병력이었다.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 병사들의 창과 총 진법(스톡홀름 박물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