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30년 전쟁의 모든것(3)

구름위 2013. 5. 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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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관여] 1625-1629


[크리스티안 국왕]

신성로마제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발단은 덴마크의 루터파인 크리스티안4세(Christian IV)가 신성로마제국의 압력을 받고 있는 인접 남부 작소니(Lower Saxony)를 지원코자 나섬으로서 시작되었다. 개신교 국가인 덴마크는 최근 보헤미아의 봉기를 가톨릭이 성공적으로 분쇄한데 대하여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덴마크에도 가톨릭이 몰려와 개신교를 탄압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는 북부 독일에서 많은 혜택을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1621년에는 함부르크가 덴마크의 강요에 의해 덴마크의 주권을 받아들여 예속된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브레멘(Bremen)에도 압력을 행사하여 자기의 둘째 아들이 브레멘의 추기경이 되도록 했다. 덴마크는 몇 년전 스웨덴으로부터는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받아 내기도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왕은 덴마크를 유럽에서도 보기드믄 안정되고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한 크리스티안이 남부 작소니를 지원하기 위해 용병 2만, 자국 병력 1만5천을 구성하여 파견키로 한 것이다. 덴마크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전비(戰費)를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 국왕 

                    

[발렌슈타인의 등장]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왕이 남부 작소니의 개신교를 지원하고 나서자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황제는 보헤미아의 귀족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한 알브레헤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발렌슈타인은 자기가 동원할수 있는 3만-10만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발렌슈타인은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부자였다. 발렌슈타인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을 대행하는 대가로 점령하는 지역의 모든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해 달라고 주장했다. 즉,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아도 좋다고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섣불리 전선으로 진격했다가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양면 공격을 받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기를 돕겠다고 말했던 동맹국들이 가톨릭 측이 우세하게 되자 ‘나 몰라라’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실제로 영국은 내분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프랑스 역시 내전의 와중에 있었다.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부 독일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는 공연히 전쟁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겨우 홀란드에 있던 만스펠트가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정예의 발렌슈타인 군대에 대패하였다. 이어 신성로마제국 측의 틸리 백작은 1626년 덴마크의 만스펠트 군대를 루터(Lutter)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전쟁에서 패배한 만스펠트는 몇 달후 한을 되새기며 세상을 떠났다.

 

알브레헤트 폰 발렌슈타인


[뤼베크 조약]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북으로 진군하여 여러 성을 함락하고 마침내 덴마크가 있는 유트란드(Jutland)반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질랜드(Zealand: Sjaelland) 섬의 한 쪽에 있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발렌슈타인에게는 해군이 부족했다. 더구나 발트해(Baltic Sea) 연안 도시들은 발렌슈타인이 함선을 건조하여 덴마크를 공격하겠다고 하자 ‘우리가 왜 가톨릭의 앞잡이인 당신을 도와야 해!’하면서 거부했다. 발렌슈타인은 대형 전함을 건조할수 있는 스트랄순드(Stralsund)를 겨우 점령하였으나 전함을 건조할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어서 아무 일도 할수 없었다. 그보다도 발렌슈타인은 전쟁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엄청나게 들자 ‘이게 아닌데’라며 공연히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덴마크를 점령한다고 해도 빼앗는 재산보다는 전쟁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렌슈타인은 휴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629년 뤼베크(L?beck)조약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만일 크리스티안 덴마크 왕이 개신교 독일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포기한다면 덴마크를 계속 통치하도록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덴마크는 억울했지만 뤼베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이후 몇해동안 가톨릭 세력들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며 기승을 부렸다. 그 시점에서 가톨릭연맹은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루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를 모두 거두어들이라고 종용했다.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에 의거, 현재 루터파들이 보유하고 있는 영토는 가톨릭교회가 정당하게 소유할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1629년, ‘반환 칙령’(Edict of Restitution)이 선포되었고 이에 따라 2곳의 대주교 교구, 16곳의 추기경 교구, 그리고 수백곳의 수도원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가톨릭의 소유로 되돌아 왔다. 평화는 체결되었지만 덴마크 유트란트 반도의 스트랄순드(Stralsund)성만이 발렌슈타인에 대하여 계속 항거하고 있었다.

 

독일 북부 발트해에 면한 스트랄순드 전경 

 

 

[스웨덴의 관여] 1630-1635]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

                        

[구스타프 국왕]

발렌슈타인(Wallenstein)은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큰 도움을 주었지만 페르디난트의 측근들은 발렌슈타인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이 독일의 제후들과 연합하여 페르디난트에게 영향력을 행사코자 하기 때문이었다. 1630년,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나중에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Gustaf II Adolf: Gustavus Adolphus)가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하자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 스웨덴과의 전쟁을 치러달라고 요청했다. 그건 나중의 얘기이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신성로마제국이 막강해지면 결국 개신교인 스웨덴도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구스타프 왕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을 지원코자 남하하였다. 구스타프는  이와 함께 발트해 주변의 독일 국가들에게 경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프레데릭의 가톨릭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과 마찬가지로 스웨덴의 구스타프 역시 프랑스 루이13세의 재무장관인 리슐르(Richelieu)추기경의 지원을 받았다. 같은 가톨릭국가이지만 프랑스는 독일국가들이 주축을 이룬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프랑스는 스웨덴이 프랑스의 라이벌인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해 주겠다고 하자 재정지원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웨덴은 130년부터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여 4년동안 그동안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였던 독일 북부 지역의 개신교 지역을 거의 모두 탈환하였다.

 

 스웨덴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스의 독일북부 브라이트펠트 전투에서의 승리


[틸리 백작]

발렌슈타인을 해임한후 얼마 되지 않아 스웨덴의 공격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또 다시 가톨릭연맹에 의지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랑스와 바바리아는 폰텐블러(Fontainebleau)조약을 비밀리에 맺어 서로 평화를 합의했지만 스웨덴의 바바리아 공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약이었다.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대는 틸리(Tilly)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연맹군을 격파하였다. 얼마후 구스타프와 틸리는 다시 전장에서 만났다. 그 전투에서 틸리 장군은 전사했다. 행운의 여신은 스웨덴을 주축으로한 개신교연맹의 손을 들어 주었다.1630년, 처음 전쟁이 시작될 때에 스웨덴은 4만2천명 군대를 위해 약 2백40만 달러(daler)를 지불했다. 하지만 1632년에는 병력이 15만명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1630년 군비의 5분의 1인 약 47만 달러만을 지불했다. 나머지는 프랑스의 재정지원으로 충당했다. 스웨덴은 북부 독일의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를 해방시키고 이곳에 있던 죄수들을 군대로 편입하여 병력을 크게 증강하였다. 구스타프는 2만에서 3만명의 용병을 스코틀랜드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틸리 백작 


[프라하 평화조약]

다급해진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부르지 않을수 없었다. 발렌슈타인의 막강한 군대는 독일 남부로부터 북부로 진격하며 구스타프의 보급로를 위협하였다.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은 1632년 뤼첸(L?tzen)전투에서 접전을 벌였다. 스웨덴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스웨덴은 구스타프 국왕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듬해인 1633년, 발렌슈타인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재를 자청하여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으로 인하여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재가 진행되는 중에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이 개신교측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고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이 마음을 바꾸어 개신교측을 지지하게 된다면 큰일 이라고 생각했다. 페르디난트의 이방(吏房)들도 발렌슈타인 죽이기에 한몫을 했다. 페르디난트는 측근 이방들의 말을 들어 발렌슈타인을 체포하고 사령관에서 해임하였다. 1634년 2월 어느날, 발렌슈타인의 부하장교인 드브러(Devereux)대위는 발렌슈타인이 비밀리에 스웨덴 측과 연락하고 있다고 믿고 발렌슈타인을 살해했다. 에거(Eger)라는 도시의 시청에서였다. 한편, 발렌슈타인이 살해된 그 해에 개신교 군대는 유명한 뇌르드링겐(N?rdlingen)에서 발렌슈타인 군대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두 군대 모두 지도자를 잃은 상태에서 서로 크게 피해만 보았다. 페르디난트는 스웨덴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1635년 프라하평화조약(Peace of Prague)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앞으로 40년간 ‘재산반환 칙령’(Edict of Restitution)의 효력을 중지한다. 개신교 군주들은 1627년 이전에 민간으로 이관된 교회재산을 계속 소유할수 있다. (이 조항으로 동북부 독일의 루터파 군주들은 그들이 획득한 영토를 보호 받을수 있게 되었지만 1627년 이전부터 영토를 신성로마제국이나 가톨릭연맹 군대에 점령당한 독일 남서부의 군주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와 독일 제후들의 군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로 단일화한다. (그러나 작소니의 요한 게오르그 군대과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군대는 명목상 황제의 군대에 예속되도록 하고 실제로는 예외로 인정하여 독립된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 독일의 제후들은 상호 연맹을 맺거나 외국과 동맹을 맺지 않도록 한다.

- 1630년 스웨덴이 침공한후 황제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주들은 모두 사면한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합스부르크만 강력하게 만드는 조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전쟁에 등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은 프랑스가 장식하였다.

 

역사적인 뇌르딩겐 전투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