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23연대의 지평리전투(1951. 2. 13∼16)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원주 북방의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 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사면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 내었으며, 그 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그곳까지 진출함으로써 전선의 연결이 이루어져 중공군의 2월공세를 막아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엔군의 썬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진격이 한강선에 육박하고 있을 무렵,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하여 미 8군의 예측을 뒤엎고 그 동안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은밀히 이동시킨후, 13일 횡성을 탈취하자 공격방향을 지평리로 지향하였다. 중공군은 2월 13일 제39군 예하 3개 사단으로 지평리의 아군 진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주요 목표가 된 지평리는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중부전선에서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만약 이곳을 잃는다면 서부전선에 있는 아군 주력의 측방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평리는 2월 3일 이후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대대와 함께 미 제378포병대대, 미 제82대공포대대 B포대, 미 제503포병대대 B포대 지원하에 전면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총 병력은 5,600명이었다.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에 여러개 고지가 있어서 직경 5킬로미터의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런 3개 대대의 병력이 담당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였으므로 연대장은 진지를 축소시켜 마을을 중심으로 1.6킬로미터의 방어선을 선정하였다.
적이 지평리를 공격할 때 미 제10군단 주력이 횡성에서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미 제23연대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갔다. 이에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여주로의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지평리를 잘 선정된 전투장으로 보고 이곳에서 중공군의 병력을 최대한 흡수하여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중공군을 격멸하려 하였던 것이다.
2월 13일 밤 지평리를 둘러싼 3-5개 사단의 중공군은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23연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사주방어를 실시하는 치열한 전투가 15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중공군의 진지돌파에 따른 백병전에 맞서 싸웠다. 특히 이 때 프랑스의 몽클라(Ralph Monclar) 대대는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싸움으로써 중공군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예비로 확보했던 돌격중대까지 투입하면서, 적과 똑 같이 함성과 수류탄, 그리고 총검으로 적에 대항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운 처절한 전투였다. 연대장인 프리만 대령도 병사들과 함께 백병전으로 싸우면서 입은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송을 거부해 가며 전투를 지휘하였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도 지평리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공군 지원 및 보급품을 공수해주었다. 그리고 14일 전투가 절정에 달하자 미 제9군단으로 하여금 증원부대를 지원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군단예비로 있던 크롬베즈의 제5기병연대가 2개 전차중대와 2개 포병대대를 배속받아 지평리에 투입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15일 적의 무차별 공격을 받으면서도 미 제23연대와의 통로를 개척하였다.
따라서 사면초가 상태에서 악전고투하던 제23연대는 구원되었고, 중공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이 때 중공군이 물러간 미군진지 주위에 흩어진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 해도 2,000여구에 이르렀다. 지평리 전투는 1950년 중공군 개입이래 처음으로 중공군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싸움으로써 진지를 고수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실패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하여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38도선 회복을 위한 작전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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