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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전쟁 10대전투(9) 국군 제 3군단의 현리전투

구름위 2013. 5. 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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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3군단의 현리전투(1951. 5. 16∼22)


중공군 공세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5월 공세) 당시, 인제 남방 가로리에서 가리봉간을 방어중이던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이 중공군 2개군(제1, 27군)과 북한군 3개 사단(제6, 12, 32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은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서측방으로 투입하여 군단의 주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함으로써,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에 밀려 현리에서 분산된 채 산악지대를 따라 70㎞를 후퇴한 후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서 막대한 7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만 입었을 뿐, 미 제8군도 격파하지 못했고, 서울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를 그치게 되었다. 이틈을 이용하여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을 결심하고, 5월 1일 모든 부대에 위력수색을 실시하면서 반격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유엔군의 위력수색결과 방어전면 15킬로미터까지 적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적의 대공세로 상실하였던 지역의 절반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이후부터 중공군이 전 전선에 걸쳐 활동을 강화하면서 공세준비를 하고 있는 징후들이 발견되었다. 적은 5개군(15개 사단)을 양구-인제지역에 집결하여 재공세를 준비하였다. 이에 유엔군 각 부대는 4월 공세중 설정한 서울방어선의 진지를 강화하고 그 전선을 고수하기로 결의하였다. 유엔군이 220㎞의 전 전선에서 진지방어를 고수하기로 결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미 제8군은 국군 9개 사단, 미군 6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으로 주저항선을 점령하고, 군 예비로는 군단예비를 겸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3사단과 미 제9군단의 제187공정연대를 두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적의 공세가 개시될 무렵 주공방향을 간파하게 된 밴플리트 장군은 신속하게 미 제3사단을 중동부 전선으로 증원하였다.

적의 증원은 5월 15∼16일 밤 개시되었다. 중공군이 첫 돌파를 시도한 것은 미 제10군단의 우일선인 인제지역의 국군 제5, 제7사단 정면이었다. 이곳에서 국군은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삽시간에 전선이 붕괴되었다. 우측에 인접한 국군 제3군단도 한계리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공군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돌파는 의외로 신속히 전개되었다.

당시 현리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3군단은 사령부를 하진부리에 두고 좌전방에는 제9사단이 미 제10군단과 경계를 이루고, 우전방에는 제3사단이 국군 제1군단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역내 현저한 도로망으로는 인제-현리-오마치-침교-창촌-속사리에 이르는 31번 국도로 유일한 보급로로 매우 중요한 작전의 생명선이나 다름 없었다.

이 때 공산군이 중동부 지역에서 한국군 부대를 목표로 운용할 수 있는 부대로는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2, 제3, 제5군단(18개 사단)이었다. 중공군은 신남-현리 일대에서 국군부대를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이들 18개 사단을 운용하여 3중 양익포위작전으로 국군 4개 사단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5월 16일 18:00경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은 국군 제7사단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제7사단 전방의 2개 연대를 붕괴시킨 후 계속 진출하여 국군 3군단의 퇴로가 되는 오마치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07:30경 중공군의 오마치 점령부대는 처음 1개 중대 규모였으나 계속 증강되어 오전에는 대대규모, 오후에는 연대규모, 야간에는 1개 사단규모로 확대되었다. 또한 이 날 오후에는 오마치 10㎞ 후방 침교에 대해서도 적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국군 제3군단은 5월 17일 오전중에는 대책도 없이 전방부대들이 현리일대로 집결하는가 하면, 오후에는 군단장 상황보고 내용인 오마치 돌파방안에 대한 검토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 국군 제3, 제9사단에서 1개 연대식을 차출하여 21:00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실기를 잃은 공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마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 부대들은 통제를 상실한 채, 무질서한 철수를 하게 되었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간부들이 계급장을 떼어버린가 하면,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가는 등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제9사단장 최석 준장, 그리고 제9사단에 군단장 대리로 훈장수여식에 왔다가 미처 복귀하지 못했던 군단 참모장 심언봉 준장 등도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3군단의 무질서한 후퇴와 이에 따른 적 부대들의 추격은 창촌-광원리-하진부리에 이르는 70㎞를 가서야 끝을 보게 되었다. 5월 19∼20일까지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4%, 9사단이 40%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3군단이 입은 피해는 중공군의 최초 계획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북한군 3개 군단이 정상적으로 진출하여 계획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면, 방대산 및 계방산 일대에서 대량의 살육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 전투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계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주요 장비를 거의 파기 또는 유기하게 되었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에 이르는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군 제3군단의 패퇴의 책임을 물어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5월 26일부로 제3군단을 해체하고 기존의 한국군 제1군단에 대해서도 육군본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통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이 전투를 통해 아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대부대를 포위한다는 것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엔군사령부도 계속적인 북진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양측은 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하게 되었다.

출처 : 성호 콘덴서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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