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서애 유성룡 - 13장 - 정유재란 전야|

구름위 2013. 5. 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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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년(1594) 11월 13일, 유성룡은 아직 상소를 올렸다. 신병 때문이었다. 유성룡은 자신의 병이 임진년(1592)에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잡저》 「내 병의 근원」
내 병의 근원은 임진년 가을과 겨울 여섯 달 사이에 일어났다. 그때 안주의 백상루에 거처하면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텅 빈 곳에서 맞게 되니, 밤마다 기력이 쇠약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잠을 자지 못했다. 반드시 한데에 등을 드러내놓아야 했고, 옷과 이불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으며 몸이 싸늘한 쇠와 같이 차갑게 된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4월까지는 동파의 산골짜기 속 한데서 거처하고 자면서 한습한 기운을 많이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내 병의 근원이다.

 

… 그 이듬해인 갑오년(1594) 4월 23일에 또 병을 얻었는데, 병의 증세는 지난해의 증세와 같았다. 7월 초승에 발병했는데, 가래와 기침이 나오고 피를 토하는 증세가 잇달아 일어나서 4, 5년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지난날의 병증의 대강이다.

 

임진년 가을과 겨울을 한데서 지내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선조는 사직서 수리를 거부했다. 유성룡은 이듬해에도 병이 낫지 않자 다시 정사(사직서를 제출하는 것)했다. 선조는 또 수리를 거부하면서 약재를 보냈으나 사흘 후 유성룡은 다시 사직 차자를 올렸다. 선조는 다시 만류했다.

 

“어찌 사직을 하는가? 안심하고 오래오래 조리하라. 비록 내사하지 않아도 국사를 족히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소소한 일에는 일일이 마음 쓸 것 없다. 나의 뜻을 알라.”

 

그러나 유성룡의 병을 도지게 한 인물은 바로 선조다. 이 무렵 또 다시 선위하겠다고 소동을 부린 것이다. 유성룡은 아픈 몸으로 백관을 이끌고 명의 환수를 거듭 요청했다. 선조의 선위소동은 없던 일로 끝났지만 유성룡의 몸은 더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축옥사(정여립 사건) 연루자들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 28년(1595) 봄, 호남의 진사 나덕윤이 상소를 올려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을 요구했다.

 

《기축록 하》 「을미년 봄 진사 나덕윤 소」
정개청은 처음부터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특히 산림에 숨어 학문하던 선비였습니다. …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 쓰는 선비가 아니면 그를 알아보고 친밀하게 지내지 않아 그런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제멋대로 방종을 즐기면서 예법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늘 기롱하고 배척하여 원수처럼 미워하였습니다. … 정개청의 아우 대청은 그 형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아프게 생각하고 원한을 씻기를 위해 상복을 입고 슬피 울며 감히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이제 6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길 가는 행인들이 듣고 상심치 않는 자가 없으니, 그 원통한 것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나덕윤은 정개청 외에도 최영경 · 유몽정 · 이황종 등 기축옥사 때 죽은 사대부들의 신원을 요구하면서 그 당시의 위관인 서인 정철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철은 사납고 강퍅한 성미로 이에 화란을 얽어 만들 꾀를 내어 불평자들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고, 몰래 함정을 파서 죄 없는 빠뜨리고, 공법을 칭탁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아 평생에 눈을 흘긴 조그만 혐의까지도 모두 보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 무렵 정철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는 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갔다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의 요구로 복관되었으나 삼사의 논박을 받고 강화도 송정촌으로 물러나 은거하다가 선조 26년(1593) 12월 사망했다. 사신은 그의 졸기에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최영경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가수(타인을 시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비판할 정도로 기축옥사 관련자들의 원한은 모두 정철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은 영의정 유성룡이 정철 비판에 가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삼사에서 주청하고 있는 관작 추탈 요구에 찬성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유성룡이 한마디만 보태면 정철의 관작은 추탈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기축옥사 관련자들의 신원은 찬성했으나 정철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반대했다.

 

“요즘 대간의 일을 보면, 정철 한 사람의 일로 매우 소요스러운데, 혹은 ‘공의를 신장시켜야 한다’ 하고, 혹은 ‘정철은 모르는 일이다’ 하여,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이처럼 다투어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동서인의 일로 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소신은 전부터 동서인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동서인의 일’, 곧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연일 정철의 관작 삭탈 문제로 시끄러웠으나 유성룡은 시종일관 반대 당파의 영수 정철을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비변사를 통해 계사를 올려 무고한 기축옥사 연루자들을 신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기축록 라》 「서애 유성룡의 계사」
만약 그때 옥사를 맡아 처리하는 신하가 전하의 지극하신 뜻을 넓히고, 질문과 변론을 잘하여 그 허실과 경중의 실상을 찾아 털끝만큼의 사적인 감정도 그사이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다면, 원흉과 대악, 법에 응당 연좌된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 모두 마땅히 차례로 석방하여 그 정상과 죄벌이 서로 알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 이른바 한 쪽의 사람들이 이 기회를 타서 주위 사람끼리 서로 적발케 하여 연좌시킬 꾀를 내면서 그 형세를 추종하고 그 의도를 엿보아 소를 올려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가 관서 앞에 서로 잇달았습니다. … 한 사람도 이 같은 사실을 임금 앞에 아뢰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린 죄를 고루 가지고 있는 것이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허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성룡은 억울한 연루자가 많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 책임을 정철 한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당시 ‘한쪽의 사람들’, 곧 서인들이 의도적으로 옥사를 확대했으나 이런 사실을 아무도 선조에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공동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성룡은 “나덕윤의 무리가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대궐문을 두드리고 원통함을 호소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라고 억울한 연루자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관 정철에 대한 처벌은 요구하지 않되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은 씻어줌으로써 과거를 정리하고 함께 미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란 1년 전인 신묘년(1591) 김성일의 주청에 의해 이미 신원시킨 최영경에 대해서만 갑오년(1594)에 대사헌을 증직하고 나머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축옥사 때 무고한 원혼이 많이 나온 것은 정철뿐만 아니라 선조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계혈통의 선조가 왕권의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옥사 확대를 방조한 정황도 있었다. 선조가 정철의 추가 처벌도 반대하고 무고한 연루자를 신원하자는 유성룡의 건의를 거부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의 아들 정진명이 부친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변수가 발생했다. 최영경을 죽인 사람은 정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선조를 끌어들이자 화를 낸 것이다.

 

“최영경의 문서 가운데 사운시가 있는데 성상께서 ‘이는 필시 영경의 시일 것이다’ 라고 하시고 최영경을 끝까지 추문하라고 명하셨는데, 영경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비가 ‘이 시는 전부터 전해온 익명시로 신도 일찍이 들은 바 있습니다. 이는 영경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영경이 대답하지 못하자 신의 아비가 이처럼 분별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선조는 자신을 끌어들인 데 격분해 정진명을 의금부에 가두어 심문하라고 명했다. 유성룡은 이에 반대했다.

 

“들으니 정철의 아들 정진명을 조옥(의금부의 옥)에 내렸다 하는데, 신은 상소의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악을 숨기는 것이니 묻지 않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선조는 “자식이 아비를 위하여 악을 숨긴다는 것이 어찌 임금을 속이고 아비의 악을 숨긴다는 말이겠는가” 라며 분개했다. 장령 유영순이 이때를 틈타 “그것이 바로 그 아비가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정상입니다” 라고 가세했다.

 

결국 정철은 그해 11월 13일 삭탈관직되고 말았다. 선조는 “이처럼 다급한 때에 서로 버티고 있기가 어려우니, 억지로 따르겠다” 면서 삭탈 주장에 응한 것이다. 화해로 과거를 털고 미래로 가자는 유성룡의 생각은 먹혀들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로 동서 당쟁이 다시 재연되고 있었다. 당쟁에 몰두할 때가 아니었다. 전쟁 상황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선조 27년(1594) 12월, 일본의 납관사 소서연안은 명나라 조정에 항복문서를 전달했다. 위조된 가짜 문서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의 완전 철병을 조건으로 풍신수길을 왕으로 책봉하는 책봉사를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명사》 신종 만력 23년(1595) 1월조는 “도독첨사 이종성과 도지휘 양방형을 파견하여 평수길(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삼았다” 라고 하며 이종성과 양방형이 일본에 가서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 것처럼 기록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이종성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당초 명 사신 이종성과 양방형이 만주의 요양을 떠나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는 정보를 들은 선조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일본이 조선 남부를 떼어달라는 것을 강화조건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혹시 명나라가 조선 남부를 일본에 떼어주고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선조는 서울에 있는 명나라 유격 진금홍 등을 만나 진의를 탐색했는데 그는 일본군 1만 5천 명이 36척의 배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3월에는 명나라 도사 장응룡이 서생포(울산)로 가서 가등청정을 만났다. 두 나라 사이에 강화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두 나라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선조는 답답해했다.

 

문제는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풍신수길의 뜻과 조선에 나와 있는 장수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두 나라는 책봉사 문제로 부딪쳤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철수하면 책봉사를 파견하겠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군은 책봉사 파견의 확증이 있기 전까지 철수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래서 일본군이 철군 준비를 끝내면 책봉사가 요양에서 서울로 출발하고, 책봉사가 서울에 도착하면 일본군은 곧바로 철병한다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는 풍신수길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성과 양방형이 서울에 도착해 일본군의 철수를 독촉했으나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다. 이종성은 자신이 직접 일본군 진영으로 가서 철군을 독촉하면 일본군이 물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사 양방형을 먼저 부산으로 보낸 뒤 9월에는 자신도 서울을 출발해 11월 22일에 부산의 일본군영에 들어갔다.

 

그러자 일본군은 오히려 이종성을 연금시킨 채 도일을 재촉했다. 일본군이 철군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도일할 경우 문책이 두려워진 이종성은 도일을 거부했다. 사실 인질이 된 뒤에야 이종성은 풍신수길의 진짜 요구를 듣게 되었다. 조선 남쪽을 떼어주는 ‘할지(割地)’ 와 명나라 공주를 내리는 ‘납녀(納女)’ 가 진짜 요구였다. 게다가 풍신수길이 책봉사를 인질로 삼아 조선을 재침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리자 이종성은 1596년 4월 야음을 틈타 일본군 진영을 탈출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선조는 조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사 이종성이 왜영을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사이의 곡절은 알지 못하겠으나, 필시 걱정스런 사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인의 거조는 이럴 수 없으니, 와전된 말이 아닌가.”

 

선조는 명나라 사신이 중도에 도망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유성룡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일이 몹시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요동에 자문을 보내는 한편 북경에 주달해서 중국 조정의 조처를 보아야 합니다.”

 

이종성은 몰래 조선을 지나 명나라로 귀국했고 명 조정은 그를 투옥했다. 그리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강화교섭을 계속하도록 했다. 심유경은 이종성이 도주하기 석 달 전인 선조 29년(1596) 1월, 소서행장과 함께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다. 심유경이 부사가 된 것은 국제사기꾼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어서 조선은 크게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유경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라고 요청했다. 철천지원수인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라는 요청에 어이가 없었으나 무작정 거부했다가 강화가 결렬되기라도 하면 조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판국이었다. 심유경도 이것을 노리고 사신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선조가 이 문제를 2품 이상 47명의 조의에 부치자 영의정 유성룡은 이렇게 분석했다.

 

“심유경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계책이 궁해지자 도리어 그 허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어 스스로 변명할 계책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 이제 이 자문을 직선적인 말로 거절해버린다면 바로 심유경의 농간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심유경은 이것을 핑계로 중국에 치보하기를 ‘봉사는 이루어져 가는데 사신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조선에서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왜적이 물러가지 않는다’ 라고 할 것이며, 그의 말을 따르려고 한다면 또한 인정과 의리상 차마 할 일이 아닙니다. 비록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더라도 왜적의 철수는 기필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난처한 까닭입니다…”

 

소서행장과 심유경의 간계임에 분명하지만 무작정 거부할 경우 심유경의 농간에 빠지는 것이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성룡은 일단 심유경에게 애매한 내용의 답서를 보내 시간을 번 다음 일본의 동태를 보아서 후속 조처를 의논하자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유성룡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어태세 강화라고 주장했다.

 

“또 신이 생각나는 일이 있어 아울러 언급합니다. 금년 봄에 방어하고 수비할 계책을 시급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에 왜적이 또한 멀리서 헛된 말로 우리를 해이하게 하여 세견선이 곧 이를 것이라고 말하더니, 대적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금년 일 또한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기타의 모든 일은 비변사와 함께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적절히 조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진년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강화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재침할 수 있으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선에서 시간을 끌자 다급해진 심유경은 통신사가 아니라 배신(명 사신을 수행하는 신하)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유성룡은 근수라는 명목으로 배신을 보내자는 방안을 냈다. 통신사가 아니라 명나라의 책봉사를 수행한다는 뜻의 근수 배신을 보내 조선이 강화를 깼다는 혐의에서도 벗어나고 일본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삼사에서는 근수 배신 파견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29년(1596) 6월 명나라 조정에서 일본에 보내는 봉왜고명과 유서(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고명과 유서였다. 명나라 조정도 강화를 원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삼사는 계속 근수 배신의 도일을 반대했지만 유성룡은 근수 배신 파견을 강행했다.

 

“통신사를 들여보낸 다음에야 우리나라가 지탱하게 될 것입니다. … 일에는 경중과 대소가 있는 법입니다. 국가의 보존과 멸망이 따르는 일인데 어찌 신하 하나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따라 호군 황신의 직급을 돈녕부 도정으로 올려 근수 상사로, 대구 부사 박홍장의 직급을 장악원정으로 올려 근수 부사로 삼아 일본으로 파견했다.

 

양방형과 심유경은 비로소 선조 29년(1596) 9월 2일 오사카 성에서 풍신수길을 만나 명나라 신종의 고명과 유서를 전달했다. 양방형과 심유경은 이로써 사태가 끝나리라고 예상했지만 풍신수길은 유서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내용 외에 조선 남부의 ‘할지’ 와 명나라 공주를 보내는 ‘납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국제무역을 거부하고 조선 근수사의 직급이 낮다는 이유로 접견을 거절했다.

 

풍신수길은 명나라 책봉사와 조선 근수사의 퇴거를 요구했고, 가등청정 등 강경파들은 재출병을 주창하고 나섰다. 선조 29년(1596) 9월 9일 귀국길에 오른 근수 사신 황신은 수행 군관을 먼저 보내 일본이 재침략할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다시 전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년에 그런 것처럼 조선은 또다시 당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