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유성룡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행정과 군무를 총괄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이제 그 오랜 전란이 끝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유성룡에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란의 시작이었다. 그를 끌어내리려는 당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에 대한 공격은 느닷없이 개시되었다. 《선조실록》에 유성룡의 탄핵기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의 사대로가 조선출병군의 철병을 명령한 지 한 달 후쯤인 선조 31년(1598) 9월 27일조에서다.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유성룡이 사직 차자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선조실록》 31년 9월 27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탄핵당한 것은 중한 일로 결코 얼굴을 들고 조정의 반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때가 한창 위급하고 또 사직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기에 어제 공의에 범하는 것을 무릅쓰고 재차 대궐에 나온 것인데, 승문원 정자 유숙이 또 상소하여 신의 죄악을 극도로 진술하였습니다. … 신의 일로 인연하여 일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제 신은 성 밖에 나가 명령을 기다려야 하건만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두려워 방황하며 답답한 심정으로 나아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는 궁지에 빠졌습니다.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관직 환수를 명하여 사람들의 논란을 그치게 하고 뭇사람들의 노여움에 사과하소서. 유사에게 내리어 신의 형벌을 의논하도록 명하시면 신은 죽어서도 결초보은 하겠습니다. 신은 너무나 두려운 심정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차자를 본 선조의 대답은 심상했다. “사직하지 말라” 고 했을뿐 유성룡을 위로하거나 탄핵한 인물에 관한 비판은 없었다. 이는 선조의 마음이 유성룡에서 멀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선조의 마음이 유성룡에게서 멀어진 이유를 종계변무 사건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은 “무술년(1598)의 종계변무 때 유성룡이 어머니가 늙어서 가지 못한다고 말하였더니, 임금은 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연려실기술》은 유성룡의 실각 사건 바로 앞 사항에 종계변무 사건을 적어놓았는데, 여기에서는 일단 이 사건이 선조 22년(1589) 종결되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유성룡을 실각시킨 북인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은 정응태의 무주 사건 때문이라고 전한다. 명나라 과도관주사 정응태가 경리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아 양호가 울산에서 패전한 사실을 숨겼다고 비난하는 주문을 올렸는데 ‘조선이 왜적을 끌어들였다’ 는 대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정은 즉각 사신을 보내 해명했고, 또 좌의정 이원익을 다시 보내 무고임을 밝혔다. 《선조실록》은 유성룡이 이때 사신으로 가는 일을 자청하지 않아 공격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은 유성룡의 실각을 다루면서 정응태의 무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아 다른 사정이 있는지도 모름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의 시각대로 종계변무든 《선조실록》의 시각대로 정응태의 무고든 당시 유성룡은 사신으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이원익은 이미 북경으로 떠났고, 우의정 이덕형도 제독 유정을 따라 순천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조정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승이었다. 그마저 명나라에 갈 수는 없었다. 전쟁 종결이 확실시 되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제거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간파한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들이 적극 가세하면서 현안이 된 것이다.
윤선거는 《혼정편록》에서 “지평 이이첨이 맨 먼저 유성룡을 탄핵하자 윤홍 · 유숙 · 홍봉선 · 최희남 등이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렸다” 라고 북인들의 공세로 사건이 본격화되었음을 전했다.
뜻밖에도 종계변무가 현안이 되자 유성룡은 늙은 노모를 핑계로 명나라에 가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신은 대신이 되어 평소에 대강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배웠습니다. 국사가 위급하면 죽고 사는 것도 피하지 말아야 하는데 한번 명나라에 가는 것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단지 신이 창졸하여 경황이 없는 중에 일을 헤아림이 민첩하지 못하고 처리가 합당치 못하여 남들의 말을 야기시켰습니다.”
‘일을 헤아림이 민첩하지 못했다’ 는 말은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일이 당장 다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유성룡의 상소에 대해 선조는 ‘대죄하지 말라’ 고 답했을 뿐 위로하는 말은 없었다. 같은 날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일을 아뢰었으나 결재하지 않았다’ 는 《선조실록》의 기사는 선조가 유성룡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음을 보여준다.
10월 1일 홍문관 부제학 김늑 · 부응교 홍경신 등은 유성룡 탄핵을 반박하는 상차를 올렸다.
“대저 간사한 자들이 남을 모함할 때는 반드시 임금의 마음이 동요되는 틈을 탑니다. 그러므로 저 재앙 일으키길 좋아하는 무리들이, 변무하는 것은 시급하지 않다는 말을 내어 좋은 제목으로 삼고저 어진 자와 정직한 자를 해칠 계획을 하면서 변무하는 일을 무너뜨리려 하니, 참으로 참혹합니다.”
유성룡이 명나라에 변명하러 가는 것이 시급하지 않다고 했다는 말을 퍼뜨려 유성룡을 실각시키려 한다는 말이다. 이 상소는 유성룡의 전락 극복 행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유성룡은 성상께 인정받아 시종의 반열에 있는 지가 이미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국사(國事)에 손을 댈 곳이 하나도 없는 위급한 때를 당하여 왕령을 받들고 혼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오래도록 국사를 대처하는 지위에 있으니, 그간 시행한 일의 잘잘못과 이해에 관해서는 성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므로 한마디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정과 호오를 잘 분변하여 일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말게 하소서.”
이 상소에 선조는 “그 말을 무얼 그릴 따질 것이 있겠는가마는 유념은 하겠다” 라고 비답을 내린다. 선조의 속마음은 이 차자를 올린 승정원을 꾸짖은 데 있다. 선조는 승정원에 전교를 내려 꾸짖었다.
“부득이 밤에 결정할 일이라면 모르거니와 전일 밤중에 차자를 올렸으니 이 무슨 사체인가.”
‘그 말을 무얼 그릴 따질 것이 있겠는가’ 라는 말과 ‘밤중에 차자를 올렸으니 이 무슨 사체인가’ 라는 말은 상차를 올린 홍문관과 이를 보고한 승정원을 비난한 것이다.
선조는 이제 유성룡을 제거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선조와 유성룡은 전란 극복에 대한 방안이 달랐다. 한 해 전 명나라에서 평안도의 한 고을을 정해 명 관원을 두고 둔전을 설치하겠다고 요청했을 때였다. 명이 상주 관청과 관원을 두고 둔전까지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조선을 직접 지배하겠다는 뜻이다. 이때 선조는 “중국이 우리나라에 어찌 딴 뜻이 있겠는가” 라며 찬성했다. 팔도에 모두 설치하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평안도 한 고을에 설치하는 일이야 뭐가 해롭겠느냐는 것이다. 이때 유성룡은 “그 일은 해로운 점이 있습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
《선조실록》 30년 4월 13일
“중국이 어찌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를 취할 리가 있겠는가.”
유성룡이 아뢰었다.
“이는 참으로 의심할 바가 없으나 중국 관원이 나와서 모든 일을 일체 관찰사처럼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손을 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오는 자가 반드시 다 선한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니 마침내 견뎌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경우 다시 철거를 청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명나라가 조선을 취할 리 없다는 선조의 한가한 생각에 유성룡은 한 번 설치하면 나중에 철거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선조실록》 30년 4월 13일
상이 일렀다.
“둔전의 일 한 가지는 시험하여 볼 수도 있다.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적이 오는 걱정에 비교한다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영돈녕부사 이산해가 아뢰었다.
“둔전을 많이 설치한다면 반드시 견디기 어렵겠지만 한 관원을 내어 둔전을 한다면 혹 가능하겠습니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원나라가 창원에 제동행성을 설치하였는데, 오래 머무르며 폐를 끼쳐 마침내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북인 영수 이산해가 둔전 설치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반면 남인 영수 유성룡은 원나라 정동행성이 끼친 폐해를 들며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차하면 명이 조선을 합병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는 위험한 방안이었다. 국내에 명의 상주 관청과 둔전을 설치하겠다는 위험천만한 방안은 유성룡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이는 선조의 요동내부책과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였다. 유성룡은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선조와 생각이 달랐다.
선조는 이제 이런 유성룡을 제거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유성룡은 선조 31년(1598) 10월 1일 다시 자신을 체직시켜주기를 바라는 상차를 올렸다. 여기에 그의 억울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선조실록》 31년 10월 1일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은 본래 체모가 있어 죄가 있건 없건 마땅히 예의로써 진퇴시켜야 하고 소나 말처럼 매어놓을 수 없으며, 대신 또한 조정의 체모를 생각하여 진퇴할 때 염치를 차려야 하고 감히 무례하게 하인이나 종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 어제 저녁에 부리(의정부의 서리)가 유생들이 신을 공박한 상소를 등초해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였는데, 말을 하자니 역겹고 보고 있자니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 이 상소가 한번 나와, 조정에 전해졌고 사방에 전파되었으며 중국 사대부의 이목에 전달되어 씻어버릴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어디를 가나 간사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어리석게 물러갈 줄 모르고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록 염치없는 하인이나 종도 그러지는 않을 것인데 더구나 명색이 대신인 자이겠습니까. … 삼가 빌건대, 성상께서는 여론을 굽어 살피시어 신의 직책을 빼앗아 충실하고 정직한 자에게 주시고, 유사(有司)에게 내려 신의 죄를 다스리게 하면, 인심이 모두 복종할 것이고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국가의 일이 잘 시행될 것이며, 신 또한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어서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한없이 부끄럽고 황공함을 견딜 수 없어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 상소는 ‘조정과 대신이 모두 예의로써 대해야 한다’ 는 유성룡의 항변이다. ‘유사에게 내려 신의 죄를 다스리게 해달라’ 는 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사해달라는 말이다. 자신을 유사에게 내려 죄를 다스리면 ‘인심이 모두 복종할 것이고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국가의 일이 잘 시행될 것’ 이란 말은 강한 항변이다.
선조는 “그런 말을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나와서 국사를 보살피라” 라고 말했다. 선조는 유성룡이 공격받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나 유성룡을 탄핵하는 북인들은 유성룡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없었다. 10월 3일 사헌부 집의 송일의 탄핵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유성룡이 평소 행한 일에 마음씀이 간사한지 바른지는 논할 겨를이 없고 다만 근일의 일로 말한다면 그가 영의정이 되어 오래도록 국정(國政)을 잡고 임금의 총애를 받은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임금께서 망극한 슬픔을 당해도 당초부터 사신으로 가기를 자청하지 않았으니, 이미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망각한 것입니다.”
기꺼해야 변명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일을 자청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자청하지 않는 것’ 이 죄가 될 수는 없다. 탄핵의 명분이 약하자 전쟁을 일찍 끝내지 못한 것이 유성룡이 강화를 주창했기 때문이라는 희한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윤선거는 《혼정편록》에서 “겨울에 정인홍의 문객 문홍도는 유성룡이 화의를 주장했다고 지목하여 비방하고 배척했다” 고 전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다. 유성룡이 강화를 주장해 전쟁이 일찍 종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헌부가 가세했다.
《선조실록》 31년 11월 16일
사헌부가 아뢰었다.
“풍원 부원군 유성룡은 본래 재치 있고 언변이 뛰어난 자질이 있고 문필의 하찮은 기예를 가지고 오랫동안 국정을 전담하고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국가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했으니 그 죄는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당초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에 왜적의 기세가 약간 퇴축하고 양호(호남 · 충청)가 온전하였으니 만약 그때 지성으로 중국에 호소하여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고 우리나라의 병력을 수습하여 한결같이 왜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보복하는 데 마음을 썼다면 중흥의 업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기미설을 주창하여 마침내 강화의 발판을 만들어 인심이 해이해지게 하고 국세를 부진케 하여 오늘날의 혼란에 이르게 하였으니 중외(中外)의 인심이 누가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 대신이 이러한 죄를 지고서는 하루라도 관작을 보존할 수 없으니, 삭탈관작시키소서.”
임진년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 지성으로 중국에 군사를 요청하고 우리나라 병력을 수습해서 토벌했다면 중흥의 업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유성룡 탓이라는 희한한 주장이다. 게다가 강화를 주장한 사람이 유성룡이라는 새로운 설까지 창조했다. 임진년 때 북인 영수 이산해가 파천에 찬성했다가 탄핵당한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선조의 마음을 간파하고 공세를 취한 것이다. 선조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재위 31년(1598) 11월 19일 “유성룡을 파직시키라” 고 명령했다.
북인들의 공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파직에서 끝내지 말고 산탈관작시키라고 한 것이다. 파직은 그 자리, 곧 영의정 자리를 파면시키는 것이라면 삭탈은 임관 자체를 말소하는 것이다.
《연보》는 “이때 대간의 논의가 날로 격증하여 닥쳐오는 화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사대부들은 거기에 연루될까 두려워 서로 묻는 자도 없었다” 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은 “처음 임진란 뒤에 유성룡이 7년 동안 국정을 잡아서 남인이 대성(사헌부 · 사간원)에 벌여 있었다. 이경전을 경박하다고 하여 예조좌랑 직위에 허락하지 않더니, 이에 북인들이 드디어 기회를 틈타 성룡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라고 그 내막을 전하고 있다.
전란 극복의 일등공신인 유성룡이 공격당하는데도 구원하는 세력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연려실기술》에 그 단초가 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남이공 등이 두 번째 소를 올렸는데 대략, “… 국정을 담당한 6, 7년 동안에 그가 경영하고 배치한 것은 모두 유명무실한 것이며, 고집스럽고 강팍하여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하여 정사에 해롭게 하였습니다. 그가 훈련도감과 체찰군문에서 속오 · 작밉법을 만들고 … 이것을 빙자하여 이익을 탐내었으므로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촌락이 퇴락하게 하여 원망은 임금에게 돌리고 이익은 자신이 독차지하였습니다. … 서예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 줄 때는 그들로 하여금 둔전을 파수하는 관원으로 설치하였는데, 거의 모두가 치질이나 빨아주는 무리였습니다.”
‘속오군 · 작미법’ 과 ‘서예의 천한 신분 발탁’ 은 모두 같은 맥락의 비판이다. 유성룡이 창설한 속오군은 양반부터 노비까지 포함한 군대였고, 역시 유성룡이 실시한 작미법은 토지 소유의 과다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대동법을 뜻한다. ‘서예의 천한 신분 발탁’ 은 서얼이나 천인들을 발탁해 면천시키고 벼슬을 주었다는 뜻이다. 이는 모두 양반 사대부들의 오랜 기득권을 흔든 제도이자 법이다.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속오법, 작미법(대동법), 서예 면천 · 등용법 등으로 신분적 기득권을 흔든 데 큰 불만을 갖고 있다가 선조의 마음이 그에게서 멀어진 틈을 타서 대공세에 나선 것인데, 여기에 앞장선 세력이 북인들이다. 이들이 유성룡이 등용한 노비 출신 신충원을 공격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남이공이 등이 세 번재 아뢰기를, “성룡이 10년 동안 벼슬시키는 권한을 천단하여 친족이 안팎에 벌여 있고, 4도 체찰사의 임무를 맡아서 농장이 원근에 가득하옵니다. … 신충원의 범람함은 세상이 모두 미워하는 바인데, 한번 그에게 아첨하자 천거하여 둔전의 파수를 삼았습니다.”
결국 북인이 총대를 멘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유성룡의 전란 극복 정책에 대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서얼이나 천인들은 등용하거나 면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백성들이 다 굶어죽고 유리하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 같은 것을 만들어 전주들에게 땅을 많이 가진 만큼 세금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양반들은 병역의무를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나라보다 양반 사대부 계급이 소중한 것이다. 신충원은 유성룡이 실각한 후 집중 공격을 당한다. 《선조실록》 34년 9월 10일조는 “형방 승지 최기가 신충원의 추안을 읽었는데, 죄가 교형(교수형)에 해당되었다” 라고 전한다. 범장죄에 해당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노비들을 면천시키며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한 사람당 단지 무명베 반 필씩을 받았다’ 고 자백했다고 기록했다. 무명베 반 필씩 받았다고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것은 괘씸죄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노비 주제에 벼슬에 오르고, 다른 노비들을 면천시킨 신충원을 죽여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리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돈녕 부사 유자신이, “이것만 가지고 형을 가한다면 옳지 못할 듯도 하니 다시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라는 신중론을 제시하자 선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도 이 사람은 의논해야 할 듯싶다. 당초 조정에서 공명고신을 이런 사람에게 준 것이 잘못이다. 그리고 한마디 할 말이 있다. 이자는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다. 유성룡이 실권하자 이자가 죄를 얻었으니 이는 ‘엎더져 가는 놈 꼭뒤 찬다’ 라는 속담에 해당되는 말일 듯싶다.”
선조도 대신들도 신충원이 죄를 받은 것은 유성룡이 실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성룡이 실각하자 노비 출신으로 면천되고 벼슬까지 한 사람들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유성룡이 실각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다. 불세출의 전쟁영웅 이순신도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유성룡이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치른 날이다.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선생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해서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 라고 탄식했다” 고 전한다. 후견인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순신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도 죽을 지경의 고문까지 당한 이순신이다. 유성룡의 실각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선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사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해전이었다. 철병 명령을 받은 소서행장은 명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써서 안전한 철수 보장을 요청했다.
《선조실록》 31년 12월 4일
당초에 소서행장이 천위(중국군의 위력)를 두려워하여 유 제독(유정)과 진 도독(진린)에게 강화하자고 하면서 유 제독에게는 수급 2천을, 진 도독에게는 수급 1천을 보내줄 터이니 자기를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진 도독은 그 말을 믿고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수급 2천을 보내주면 보내주겠다’ 고 하자, 소서행장이 날마다 예물과 주찬 · 창검 따위의 선물도 끊이지 않고 보냈다.
진린은 철수하겠다며 보내는 뇌물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철수하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린과 소서행장은 마치 전우라도 되는 것처럼 부하들이 서로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행록》 선조 31년 11월 16일
도독 진린이 부하 장수 진문동을 적의 진영으로 보냈다. 갑자기 적장 오도주가 배 3척에 말과 창 · 검 등을 싣고 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왜의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이순신)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에 공이 말했다.
“대장된 사람은 적과 강화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도독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왜의 사자가 다시 오자 도독이 말했다.
“내가 너희 왜인들을 위해서 통제사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이순신은 진린과 달리 자신이 소서행장의 회유에 넘어갔다간 끝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진린의 권유에 조금이라고 응했다가는 바로 ‘적을 놓아보냈다’ 는 혐의가 씌워졌을 것이다. 이순신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진린은 한 가지 방책을 냈다.
《행록》 선조 31년 11월 16일
이때 도독은 이미 적의 뇌물을 많이 받은 뒤여서 빠져나갈 길을 터주려고 하면서 공(이순신)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소서행장을 치는 것을 그만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적을 토벌하러 가겠소.”
이순신이 답했다.
“남해에 있는 사람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으로 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지 왜적이 아니오.”
“이미 적에게 붙은 자는 그들 역시 적이요. 지금 그곳으로 가서 토벌한다면 힘도 안 들이고 머리를 많이 벨 수 있을 것이오.”
“황제께서 적을 무찌르라고 보낸 것은 우리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이제 구원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황제의 본의가 아닐 것이오.”
도독은 성을 내며 말했다.
“우리 황제께서 내게 장검을 하사하셨소.”
“한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 대장인 나는 결코 적을 놓아 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명 신종이 하사한 검을 들먹이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는데 ‘한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 라고 대답한 것은 이미 죽음을 결심한 이순신의 결기였다. 《행록》은 다음 날 초저녁에 소서행장이 봉화를 올려서 남해의 적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고 전한다.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소서행장이 이순신과 결전을 하기 위해 휘하의 군사들을 결집한 것이다.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에게 군비를 엄하게 하고 기다리라는 영을 내렸다.
이튿날인 11월 18일 저녁부터 무수히 많은 일본 전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이날 밤 10시쯤 출발해서 새벽 2시쯤에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적선은 무려 5백여 척이었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85척이었다.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과 함께 나갔다고 하지만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 데다 싸울 의사도 없었으므로 조선 수군 단독 해전이었다. 진린과 등자룡 두 장수만이 조선 판옥선을 빌려 타고 싸움에 나서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노량해협과 그 아래 관음포에서 적선 5백여 척과 조선 함선 85척이 뒤섞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행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날 밤 자정에 공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하늘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이 원수를 모두 무찌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때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는, ‘한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 라고 말하고, 하늘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거듭 죽음에 대해 말했다. 이렇게 18일 저녁부터 시작된 싸움은 유성룡이 파직되는 19일까지 계속된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은 것은 19일 새벽이다.
《징비록》
이순신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우고 있는데, 날아온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기자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고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은 조금 더 생생하게 그 광경을 묘사했다.
《난중잡록》 11월 19일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해서 죽였다. 적선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들이 순신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난중잡록》은 이순신이 마치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융복을 입어 적의 눈에 잘 띄는데도 이순신이 직접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했다는 것은 적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자청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시킨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묘한 일치이자 묘한 운명이다. 이순신은 죽음으로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순신은 전사했으나 조선 수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라고 보고하자 선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선조실록》 32년 2월 2일
상이 일렀다.
“수병(水兵)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말은 과장된 말인 듯하다.”
이덕형이 아뢰었다.
“수병의 대첩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신이 종사관 정혹을 보내 알아보니 부서진 배의 판자가 바다를 뒤덮어 흐르고 포구에는 무수한 왜적의 시체가 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굉장한 승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승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순신은 선조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군신(軍神)이 되었다. 유성룡을 실각시킨 북인들의 시각에서 쓴 《선조실록》의 사관도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실록》 31년 11월 27일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 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선조 29)과 정유년(선조 30) 사이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그러나 선조는 달랐다. 이순신이 일본군을 격퇴하는 동안 자신이 임금으로서 한 일은 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주한 것과 김덕령 · 이순신 · 유성룡 같은 인재들을 죽이거나 제거하려 한 것뿐이다.
선조는 이들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다시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서 전란 극복 공로에 대한 선조의 이상한 논리가 등장한다.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보존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 우리나라의 일은 대인께서 익히 아시니 우리나라의 일을 주선하는 문제는 대인만 믿을 뿐입니다.”
선조의 논리는 ‘승전은 명나라 덕분’ 이라는 것이다. 유성룡을 비롯한 수많은 문신과 이순신 · 권율을 비롯한 무장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지원군 때문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유정은 왜교성 전투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수군이 지원하는데도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아서 왜교성 함락을 무산시킨 용장(庸將)이다. 이런 용장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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