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서애 유성룡 - 14장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구름위 2013. 5. 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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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은 일본군의 재침을 예견하고 방비책을 세웠다. 바로 청야전법이다.

 

《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유성룡이 아뢰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우선 요해지에 의거하여 성벽을 굳게 지키고 청야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앞서 권율이 행주에 웅거하였으므로 이겼거니와, 이제 어쩔 수 없이 요해지에 웅거하여 저축하고 힘을 다하여 지킨다면, 행주 싸움처럼 적의 기세가 먼저 꺾이고 우리 군사는 용기를 얻을 것이며 적은 천리길에 양식을 나를 수 없으므로 그 형세가 반드시 지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크게 친다면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

 

청야전법이란 고구려에서 즐겨 사용한 전법이다. 식량을 비롯한 모든 군수품을 산성으로 옮겨놓아 적이 굶주리게 하는 전법이다. 유성룡은 또한 국제사기꾼 심유경이 중국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할 것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적정이 변동할 것임은 틀림없으니, 싸워 지킬 일이 있을 뿐이고 다른 일은 없습니다. …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힘을 다하여 대비하고 중국 조정에 빨리 알려 중국군을 평양에 출진시켜 달라 청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될 것입니다.”

 

심유경이 거짓으로 보고하기 전에 명나라 조정에 상황을 설명하자는 것이다. 과연 심유경은 그해 10월 25일 대마도에서 문서를 위조해 풍신수길이 ‘책봉에 사은한다’ 는 표문을 명 조정에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통보로 강화교섭이 실패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는 심유경을 처벌하고, 강화를 주도한 병부상서 석성까지 실각시켰다.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이 재침하면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조선도 영의정 유성룡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당쟁이 재연되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우익을 자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순신을 공격한 것이다. 일본은 재출병의 선결조건이 이순신 제거라고 생각했다. 이순신이 건재하면 수송로가 단절되어 임진년의 비극이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서행장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간첩 요시라를 이용했다. 대마도 좌하촌 출신인 요시라는 유창한 조선어 솜씨 덕분에 소서행장의 통역이 되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적의 장수 소서행장이 그의 졸병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자주 드나들도록 하여, 은근한 정을 보였다” 라고 썼다. 요시라의 주선으로 김응서는 함안 곡현에서 소서행장과 이른바 함안회담을 하기도 했다. 이 함안회담은 조정의 사전 허락 없이 진행되었으므로 김응서에 대한 처벌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에서 얻은 정보의 가치를 높이 산 선조가 “단기(單旗)로 행장을 만나보았다니 김응서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라고 평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고무된 요시라는 조선에 벼슬을 요구했고, 김응서는 정3품 절충장군과 은자 80냥까지 주었다. 요시라를 간자(間者)로 삼았다고 여긴 것이다. 요시라는 조선 관복을 입고 조선 진중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이때 요시라가 준 정보에 김응서를 비롯한 장수들과 조정 대신들 그리고 선조까지 현혹되면서 이순신의 고초가 시작된다.

 

요시라가 준 정보는 ‘가등청정이 건너올 때를 가르쳐줄 테니 제거하라. 소서행장도 이를 원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이순신은 요시라의 술책임을 단번에 파악했다. 자신을 유도해 제거하려는 소서행장의 술책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요시라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행록》
정유년(1597) 1월 21일, 권율 원수가 한산도 진영에 이르러 공(이순신)에게 “적장 가등청정이 다시 나온다고 하니, 수군은 요시라의 말대로 하라. 삼가 기회를 놓치지 마라” 고 말했다. 이때 조정은 원균의 말만 믿고 공을 비방해 마지않았으므로 공은 요시라의 말이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감히 그 앞에서 마음대로 물리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가등청정이 장문포(거제도)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이순신에 대한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일부러 가등청정을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초 요시라를 포섭했다고 자부한 경상 우병사 김응서는 자신이 보낸 전사 송충인에게 소서행장이 한 말을 전하면서 이순신을 비판했다.

 

《선조실록》 30년 1월 23일

소서행장이 송충인에게 매우 통분해하면서, “그대 나라 일은 매양 그러하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가등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너왔으니, 전날 내가 한 말이 청정의 귀에 누설될까 걱정된다. 모든 일의 비밀을 지키도록 힘쓰자” 라고 말했습니다. … 대개 우리나라의 일은 이처럼 지체하여 만에 하나도 성사될 수 없으니, 다만 민망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일본군의 두 기둥이었다. 가등청정이 주전론자이고 소서행장은 주화론자이며, 둘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군을 이용해 아군 장수를 제거한다는 것은 병법에도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런 방법을 통해 가등청정을 제거하려 한 사실이 풍신수길에게 전해진다면 멸문지화를 당할 일이다. 이는 소서행장 자신이 조선의 간첩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소서행장이 이런 간계를 쓸 수 있던 것은 이순신이 정유재란 1년 전인 선조 29년부터 논란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29년 6월 26일

상이 일렀다.

 

“이순신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좌의정 김응남이 아뢰었다.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으로 선전하는 점도 있습니다.”

 

상이 일렀다.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광해군)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선조가 이순신을 비난하고 나서자 이순신을 공격하는 대신들이 늘어갔다. 선조 26년(1593)부터 영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유성룡에 대한 불만이 이순신에게 투영된 것이다.

 

《선조실록》 29년 6월 26일

김응남이 아뢰었다.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은 순신이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상이 일렀다.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김응남이 아뢰었다.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진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상이 일렀다.

 

“거제에서 군사를 철수한 뒤에 나도 물었고 비변사도 주둔시켜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산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윤근수가 아뢰었다.

 

“반드시 한산도를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상이 일렀다.

 

“한산도는 진을 비울 수 없다. 그러나 지킬 경우에 군사가 적어 세력이 분산되겠거니와 양향(식량)은 또 어떻게 장만하여 내겠는가?”

 

김응남과 윤근수는 모두 서인이다. 게다가 김응남은 《선조수정실록》 27년 11월조에서 “이산해의 매서로 … 한결같이 산해의 구태대로만 따랐다” 라고 쓴 것처럼 북인 영수 이산해의 사돈이다. 북인 이산해는 “요시라와 소서행장은 후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뒤에도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소서행장과 요시라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해 11월 다시 이순신과 원균이 싸운 것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우의정 이원익이 아뢰었다.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예전의 장수 중에도 공을 다툰 자는 있으나, 원균의 일은 심하였습니다. 소신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 대하여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다 글러질 것입니다…”

 

상이 일렀다.

 

“난처한 일이다.”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원균은 소신의 친족인데, 신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이순신이 후진인데 지위는 원균 위에 있으므로 발끈하여 노여움을 품었을 것이니, 조정에서 헤아려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상이 일렀다.

 

“내가 전일에 들으니, 당초 군사를 청한 것은 실로 원균이 한 것인데 조정에서는 원균이 이순신만 못하다고 생각하므로 원균이 이렇게 노하게 되었다 하고, 또 들으니 원균은 적을 사로잡을 때 선봉이었다 한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원균은 가선대부(종2품)가 되었을 뿐인데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가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원균이 분노한 것입니다.”

 

상이 일렀다.

 

“내가 들으니, 군사를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그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또 들으니,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잡은 것은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하였다 한다.”

 

승지 이덕열이 아뢰었다.

 

“이순신은 열다섯 번이나 부른 뒤에야 비로소 가서 적의 배 60척을 잡고서는 자신이 맨 먼저 쳐들어간 것으로 자기 공을 신보하였다 합니다.”

 

이원익이 아뢰었다.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남인 이원익은 이순신을 옹호한 반면 서인 윤두수는 원균을 옹호했다. 다른 인물도 아닌 선조가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비판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틀 후 해평 부원군 윤근수의 장계는 이순신 죽이기의 서막이 올랐음을 말해준다.

 

《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서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또 수전에 익숙하여 적을 보는 대로 나아가 이기기만 하고 지는 일이 없으므로 군졸이 믿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제 주사(수군)을 버리고 기보(육군)를 거느리니, 병사(충청 병사)가 수사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그 잘하는 것을 버려두고 그 재주를 못 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윤근수 장계의 내용대로라면 백전백승의 장수는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이다.

 

《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원균이 수군을 거느리면 반드시 이길 도리가 있음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마땅하지 않은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여 적에게 대항하지 못함으로써 적이 혹 호남으로 가는 길을 한번 범하면 원균이 한 도의 기보 군졸을 거느려 대장이 되더라도 결코 수전에서처럼 뜻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니, 다시 수사를 삼아 전일에 싸운 장기를 쓰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사람’ 인 이순신을 원균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윤근수의 주장이다.

 

《선조실록》 29년 11월 7일
어떤 이는, “원균은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이순신이 통제사이므로 원균을 절제(節制)할 것인데, 원균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지 못하여 두 장수가 화합되지 않을 것이니, 일이 성공될 리가 없을 듯하다” 라고 말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제사란 직임은 한때의 필요로 생긴 것이어서 그대로 둘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습니다. 이순신의 통제사라는 직명을 낮출 수도 있고 혹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라 칭하여 이순신과 명위가 대등하게 할 수도 있으니, 신축자재하게 한다고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원균의 자금이 본디 이순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다시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혐의를 피할 겨를이 없습니다.

 

원균을 수군으로 재임명하는 것이 ‘국가의 존망’ 에 관련되는 중대사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이렇게 써서 아뢰니, 매우 아름답고 기쁘다” 고 답했다. 육군 명장 김덕령을 제거한 데 이어 수군 명장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요시라의 정보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스스로 그물에 걸려든 격이었다. 이들이 공격한 표면적 대상은 이순신이지만 실제 대상은 그를 천거한 유성룡이다.

 

《징비록》
조정 의논이 두 갈래로 갈라져 각각 주장하는 바가 달랐는데,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유성룡)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몹시 공격했으나 오직 우상 이원익 만은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신영은 《재조번방지》에서, “당시 서인은 원균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문제는 서인만이 아니라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까지 공격에 가담한 데 있다.

 

《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아뢰었다.

 

“지난번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헌의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하고 있으니, 행장이 지휘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지중추부사 정탁이 아뢰었다.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소서행장이 지휘해도 할 수 없다는 발언이다. 마치 소서행장이 조선군 도원수라도 된 듯한 발언이다.

 

《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상이 일렀다.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 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 중국 장수 이 제독(이여송) 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 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와 안위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영돈녕부사 이산해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상이 일렀다.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감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가등청정을 제거하러 출격하지 않았다고 공격하더니 이제는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와도 용서할 수 없다’ 고 하는 판국이었다. 이순신 제거에 선조와 서인 영수 윤두수, 북인 영수 이산해가 동조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유성룡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었다.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경성(서울)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로 천거했습니다.”

 

상이 일렀다.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유성룡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상이 일렀다.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 역시 녹둔도에 둔전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의 장수로 서로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모두가 비난하는 상황에서 유성룡이 외롭게 조산 만호와 수사로 천거했다고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10년 전 녹둔도 시절의 일을 국왕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후궁이나 내관이 알려준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설혹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선에서 경계를 철저히 한 이순신을 칭찬하는 용도로 사용될 일화이지 비난의 용도로 사용될 일화는 아니다. 좌의정 김응남은 규찰어사를 파견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따라 선조는 남이신을 보내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징비록》
드디어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삼았다. 임금께서 이 일이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라 의심해서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보내 한산도로 가서 사찰하도록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니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가등청정이 섬에 7일간이나 머물러 있었으니 우리 군사가 만약 출진했으면 청정을 잡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남인 유성룡과 정탁 등을 빼고는 이순신 제거에 온 당파가 단결했다. 길을 막고 호소하는 군사와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다. ‘임금께서 이 일이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라 의심’ 했다는 말은 유성룡의 의례적 수사에 불과하다. 선조는 이순신 제거가 추락한 국왕의 권위 회복에 필수라고 여기고 있었다.

 

《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에 전교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무군지죄(역적죄)이며,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부국지죄(국가 반역죄)이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은 함인지죄(남을 함정에 빠트린 죄)이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지죄(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어서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선조는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고 극언했다. 여기에 서인과 북인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이순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선조 30년(1597) 2월 28일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조실록》 30년 2월 28일

신은 본디 변변치 못한 인물로 오래도록 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한 가지의 공효도 없었습니다. … 신의 본직(영의정)과 도체찰사 직명을 속히 체직하도록 허락하소서.

 

‘심병이 더욱 중해’ 졌다는 것이 사직의 변이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사직으로 항의한 것이다. 선조가 허락하지 않자 유성룡은 다음 날 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번에도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연보》는 “차자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라는 구절 바로 뒤에 “이에 앞서 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으면서 누차 적을 격파하자, 적장 평행장(소서행장)이 걱정하여 그 허실을 탐지하려고 사람을 시켜 우병사 김응서에게 속여 말하였다” 라고 적었다. 유성룡의 사직차자는 이순신 공격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연보》 정유년

이순신은 충직하여 평소에 권력자를 섬기지 않았고, 게다가 선생이 천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시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 이순신을 배척하여 선생에게까지 화를 끼치려고 군기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갖가지를 얽어매었다. 그러자 상이 진노하여 이순신을 법으로 처리하고 원균에게 이순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려 하자, 선생이 말하였다.

 

“통제사는 이순신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사태가 위급한 데다가 장수를 바꾸어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면 호남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상은 더욱 노하여 비변사가 아첨만 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하니, 모든 신하들이 다 황공하여 감히 말을 못했으나, 선생만은 국사의 성패로 수일 동안에 간쟁하여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상은 선생에게 나가 경기를 순찰하라고 명한 다음 재신들을 인견하고 이순신의 죄를 논하자, 최황이 죄를 주자는 결의에 찬성하니 이순신은 드디어 죄를 얻고야 말았다. 선생이 조정에 돌아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순신 처벌에 반대하는 유성룡을 순찰 명목으로 경기로 내보낸 다음 처벌을 결정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의금부 옥에 갇힌 이순신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한번만 더 신문하면 그대로 고문사할 상황이었다.

 

이때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차자가 올라왔다. 정탁의 차자였다. 정탁은 자신이 예전에 죄인을 국문했을 때 고문으로 죽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하면서, “이제 이순신이 이미 한 차례 고문을 당했으므로 만일 또다시 형을 가한다면 엄한 고문으로 반드시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라고 더 이상의 고문을 반대했다.

 

정탁은 남인이자 퇴계의 문인이다. 그가 차자를 올려 이순신을 구원하고 나선 배경에는 남인 영수 유성룡이 있었을 것이다. 살려주어야 한다는 차자가 올라온 상황에서 선조가 계속 죽이라고 명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져 옥문을 나섰다. 선조 30년(1597) 4월 1일, 체포된 후 27일 동안 이승과 저승을 오간 셈이다. 그사이 원균은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 자체가 조선 수군의 위기였다.

 

《징비록》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운주당에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하였다. 이순신을 작전을 개시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애첩을 데리고 와 운주당에서 함께 살았으며 울타리를 쳐 당(堂)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또 술을 즐겼는데 날마다 주정을 부렸으며 형벌을 쓰는 데 법도가 없으니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다만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라고 했으며,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못했다.

 

요시라를 이용해 이순신 제거에 성공한 소서행장은 같은 전술을 원균에게도 적용했다. 소서행장은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일본군 후속부대가 도해하는 시일을 알려주었다. 원균은 4월 19일 조정에 “소서행장 · 요시라 등이 거짓으로 통화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요시라 덕분에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은 요시라의 정보를 끝내 무시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출진을 독촉하자 원균은 선조 30년(1597) 6월 18일 조선 수군의 전력(全力)인 2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를 출항해 일본 수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 수군의 상대가 못 되었다. 보성 군수 안홍국이 머리에 총탄을 맞아 전사했으며, 원균 자신도 거제군 칠천도로 퇴각했다가 겨우 한산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조정과 도체찰사 이원익 · 도원수 권율은 재출전을 강하게 지시하면서 선조에게 원균이 출진을 기피한다고 보고했다. 선조는 크게 화를 냈다.

 

“원균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전하라.”

 

공격당하는 대상이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뀐 셈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던 원균은 7월 14일 600여 척의 선단이 입항해 있는 부산의 일본군 본영을 공격해 결판을 내기로 결정했다. 7월 14일 새벽 삼도 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 원균은 휘하의 전라 좌수영 군과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군, 배설의 경상 우수영 군, 최호의 충청 수영군 등을 이끌고 견내량과 가덕도를 거쳐 부산으로 출항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 절영도 근해에 도착했을 때 일본 수군은 이미 이 사실을 탐지하고 있었다. 이날 전투의 상황을 《징비록》은 이렇게 전한다.

 

《징비록》
원균의 배가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일고 물결이 일어났는데, 날은 벌써 저물었으며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었다. 바라보니 왜적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나타났다 숨었다 하므로 원균은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군사들은 한산도에서부터 하루 종일 노를 저어왔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를 못하였으며 또 기갈에 시달리고 피곤해서 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왜적들은 우리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우리 배 가까이 왔다가 갑자기 배회하고 피하면서 교전하지 않았다. 밤은 깊고 바람은 세찬데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내려갔으며 갈 방향을 알지 못했다.

 

원균은 거제도의 영등포로 퇴각하려 했으나 영등포는 일본군이 선점하고 있었다. 영등포에 상륙하려던 조선 수군은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원균은 겨우 거제도 칠천량에 상륙했다. 그러나 패전 소식에 격분한 권율이 그를 소환했다.

 

《징비록》
고성에 있던 권율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고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와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으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 일을 의논하고자 해도 만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습격했다. 조선 수군은 전열도 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원균은 탈출하다가 도진의홍(시마즈 요시히로) 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전사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징비록》
배설은 그전부터 원균이 반드시 패전할 거라고 생각해 여러 번 간했으며, 이날도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 진을 치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전혀 듣지 않았다. 배설은 가만히 자기가 거느린 배들과 은밀히 약속하고 엄중히 경계하면서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가 적병이 내습하는 것을 보자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군사는 홀로 보존되었다.

 

이때 배설이 거느린 배가 12척이었다. 조선 수군은 이렇게 궤멸했다. 이순신이 체포된 지 불과 5개월 만이었다. 조선 수군의 궤멸은 전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일본군은 드디어 임진년 이후의 숙원인 제해권을 장악했다. 안정적인 보급도 자연히 확보하게 되었다. 삼도 수군이 모두 궤멸했으므로 영 · 호남을 막론하고 어느 한 곳 안전하지 못했다. 조정은 다급해졌다.

 

도원수 권율의 군관 이덕필 등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의 숙소를 찾아온 것은 조선 수군 궤멸 사흘 뒤인 7월 18일 새벽이었다. 삼도 수군의 궤멸 소식을 듣자 이순신은 통곡했다. 잠시 후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을 방문했다. 이순신 외에는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7월 22일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로 재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도성이 재함락될 판국이므로 자존심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는 조선 수군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8월 15일자에 “선전관 박천봉이 8월 7일 작성된 국왕의 유지(宥旨)를 가져왔다. 즉시 회신 장계를 작성한 후에 과음했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라고 적었다. 이 날짜 일기에는 “영의정(유성룡)은 경기도 지방을 순찰 중이라고 한다” 는 내용도 있다. 이순신은 박천봉에게 선조의 유지 내용에 유성룡도 동의했는지 물었는데, 지방 순찰 중이어서 몰랐다는 내용이 함축된 것이다.

 

이순신을 과음하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한 선조의 유지는 수군을 철폐하니 이순신을 육군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라는 장계를 작성한다.

 

“임진년으로부터 5, 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 수가 적다해도 미신(微臣)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며’,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 고 반대하는데 수군을 폐지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없어질 수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본군 부산 본영의 선박만 600여 척이었다. 12척의 배로는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순신을 죽이려는 선조 쪽이나 반대파 쪽에서는 이순신이 전투 도중 전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선 남부에는 약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본토에서 12만여 명이 더 증원되어 일본군은 모두 14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순신을 제거하고 원균을 패퇴시킨 일본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조선 수군이 궤멸함에 따라 일본군은 숙원인 호남 지역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1593년 8월 3일, 일본군 총대장 소조천융경은 일본군을 좌 · 우 2개 군으로 나누어 우희다수가를 좌군대장, 모리수원을 우군대장으로 삼고 전주를 목표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고성 → 사천 → 구례 → 남원을 거쳐 전주에 도착했으며,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거창 → 안의 → 진안을 거쳐 전주로 진군하도록 했다. 수군 여기 하동에 상륙해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군하도록 했다. 수군이 없어진 호남은 무인지경이라 여기는 듯했다.

 

좌군대장 우희다수가와 그 선봉 소서행장은 고성 · 사천 · 하동을 경유해 전주로 향했으며, 우군대장 모리수원과 그 선봉 가등청정은 서생포 · 밀양 · 초계를 거쳐 전주로 향했다.

 

조선의 도체찰사 이원익이 선산의 금오산성에, 도원수 권율이 성주와 김천 사이를 지키고 있었고,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합천에 방어막을 쳤으나 길목을 지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명군들도 충주 · 전주 · 성주를 지키고 있었으나 제해권까지 장악한 일본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영남을 휩쓸고 호남으로 진격했다. 선조와 유성룡의 반대파들이 아군으로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던 소서행장은 일본 좌군을 이끌고 고성 · 사천 · 하동을 거쳐 8월 7일에는 구례를 점령했다. 소서행장의 빠른 북상에 조선 조정은 경악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8월 12일, 소서행장은 남원성을 포위 공격했다.

 

남원성은 명군 부총병 양원과 조선의 접반사 정기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5만여 명의 대군이 몰려오자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 병사 이복남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전라 병사 이복남과 구례 현감 이원춘은 1천여 명을 이끌고 달려왔으나 진우충은 끝내 외면했다. 명군 3천여 명과 조선군 1천여 명은 5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공세를 한 차례 격퇴하고 다시 진우충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또 외면했다. 고립된 조명연합군은 사력을 다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끝까지 항장한 전라 병사 이복남, 구례 현감 이원춘과 명군의 중군 이신방, 천총 장표 등이 전사했으며 부총병 양원만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전주 부윤 박경신과 명군 유격장 진우충이 공주로 달아나면서 일본군은 전주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소서행장은 이순신을 제거한 공이 있으니 임란 이후 최고의 성가(聲價)를 구가했다. 가등청정이 이끄는 일본 우군도 안음 현감 곽준과 함양 군수 조종도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로 합류했다.

 

일본군은 전주에서 좌 · 우군의 역할을 재조정해서 우군은 충청도 지방으로 북상하고, 좌군은 전라도 지역 점령을 강화하는 한편 해로를 차단해 조선군 각 부대의 연결을 막기도 했다.

 

선조 30년(1597) 8월 29일,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 우군은 전주를 출발해 충청도로 진격했다. 9월 3일에 공주를 무혈점령한 일본군은 연기와 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했다. 일본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했다는 소식에 선조는 경악했고, 도성 사람들은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연보》는 일본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한 선조 30년(1597) 8월 말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연보》

당시에 제독 마귀가 서울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마귀에게 참소했다.

 

“유모(유성룡)가 지금 가속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다.”

 

마귀는 그 말을 믿고 군문 형개에게 말하여 주문 가운데 기재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유언비어가 궁중까지 들어가 어수선한 의혹을 만 가지나 불어넣었다. 얼마 후에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오자, 상이 중전으로 하여금 나가서 피난하게 하자 양사에서 이를 극력 반대했다. 그러자 상이 말했다.

 

“들으니 대신도 가속을 먼저 내보낸 자가 있는데 대간이 이를 논박하지 못하고 도리어 중전만 논박하니, 그렇다면 대신이 더 권한이 있단 말인가.”

 

대신은 대개 선생(유성룡)을 가리킨 것이다.

 

선조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북상하기도 전인 6월 말부터 중전을 피신시키겠다고 나섰다. 그 후 자신이 뒤따라가려는 속셈이었다. 임진년 때의 고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중전을 먼저 피신시키고 여차하면 자신도 뒤따라갈 요량이었다. 유성룡은 백성들이 심하게 동요할 것이라며 중전의 피신에 반대했다.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이 가속을 피신시켰다는 말을 듣고 유성룡을 공격했다. 유성룡은 사직 차자를 올리면서 가속을 피신시켰다는 소문은 모두 낭설임을 밝혔다. 선조가 대답했다.

 

“차자를 살펴보고 경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이다. 요즘 도성 사람들 대부분이 가속을 피난시켰는데 여론이 모두 내 탓이라 하면서 못하는 말이 없기에 나는 참으로 개인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논핵하는 자가 또 단지 몇 사람을 예로 들어 책임을 메우려 하고 그때 마침 대신이 가속을 피난시킨다는 말이 전파되어 모르는 자가 없으므로 논계할 적에 우연히 언급한 것인데 그 뒤에 대간의 계사를 보고 과연 이것이 와전된 것임을 알았다. 한번 웃어버릴 일을 가지고 어찌 사직하려 하는가.”

 

‘도성 사람들 대부분이 가속을 피난시켰는데 여론이 모두 내 탓이라 하면서 못 하는 말이 없었다’ 는 말은 도성 사람들이 가속을 피난시키면서 모두 선조의 핑계를 댔다는 뜻이다. 선조가 중전을 먼저 피신시키니 우리들도 가속들을 피난시키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 뒤에 대간의 계사를 보고서 과연 이것이 와전된 것임을 알았다” 는 말은 선조가 대간을 시켜 유성룡이 가속들을 피신시켰는지 조사하게 했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뜻이다.

 

유성룡의 가속 피난설은 유언비어로 판명되었으나 그렇다고 도성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선조실록》 30년 8월 27일조는 비변사에서 “국사가 위급한 이때에 내외 관원들이 앞다투어 밤중에 도망하여 목숨만 구차하게 보존하려는 자가 많으니 인신(人臣)의 의리가 땅을 쓴 듯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법조를 분명하게 세워 더욱 엄금하지 않으면 수일 안으로 도성이 모두 비게 될 우려가 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라면서 도망간 관리들과 아전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건의했다. 그러자 선조는 “직임을 버리고 도피한 수령에 대해 효수(목을 베어 게시하는 것)의 중률로 다스리라” 는 전교를 내렸다. 자신은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주할 계획이면서도 도피하는 다른 수령은 모두 효수하라는 명령이다. 비변사는 이렇게 건의했다.

 

“수령으로서 직임을 버리고 도피하는 것은 지극히 가슴 아픈 일이니, 그중에서 정범이 더욱 심한 자는 효수의 중률로 다스려 대중을 경계시키라고 각 도의 순찰사와 도원수 · 도체찰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정황을 살펴 심한 경우에만 효수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관원들이 앞다투어 도주하는 상황을 종결지은 인물도 유성룡이다. 《연보》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연보》

당시에 적의 형세는 날마다 급박하고 인심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성안의 백성들과 각사의 전복들은 산산이 흩어져 거의 없었다. 이에 선생이 관할하던 4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서울을 호위하게 하였더니, 이르러 온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경기도 군사들에게는 상하의 여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황해도 등의 군사들에게는 성첩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으며, 금위의 수직과 명군을 이바지하는 일도 역시 다 여기에 힘입어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 선생이 4도와 약속하여 군사들을 조련시켜 군사 대오는 씩씩하고 가지런하며 법령은 밝고 엄숙하였다. 변란에 임해 징발한 적에는 감히 앞서거나 뒤에 처진 자가 없었고, 이미 다 이른 뒤에도 한 사람도 도피한 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유성룡은 휘하 군사들을 강하게 조련한 것이다. 4도의 군사를 동원해 지키면서 도성은 점차 안정되었고, 조명연합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반격에 나서 전황의 역전을 꾀하게 된다.

 

비록 제해권은 상실했지만 조선군도 임진년 같지는 않았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일본군의 재침을 예견하고 군사를 맹훈련시켰으며, 명나라도 선조 30년(1597) 3월 6만 대군의 동정군을 파견했다. 재파병된 명군은 병부좌시랑 형기가 경략, 산동 우참정 양호가 경리, 마귀가 제독, 양원 등이 부총병이었다.

 

충청 방어사 박명현은 일본군을 여산 · 은진에서 요격하고, 충청 병사 이시언도 회덕 · 한산 방면으로 진출하는 적군을 요격했다. 9월 7일에는 명군과 일본군이 직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제독 마귀 휘하의 명군도 6차례의 대접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했다. 직산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사기를 단번에 저하시킨 반면 명군과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여기에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난중일기》에 이때의 이순신의 동태와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난중일기》

8월 3일(신유)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장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한다. …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한다.”

 

8월 5일(계해) “맑다. 옥과(곡성군 옥과읍)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하다.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 옥과 현감 홍요좌는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자 그제야 나와서 봤다.”

 

8월 9일(정묘) “일찍 떠나 낙안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와 오리까지나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겁을 먹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기에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고 답했다. 군청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와서 봤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 리쯤 오니, 늙은 노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8월 27일(정축) “경상 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도망가려고만 하시오’ 라고 말했다.”

 

8월 28일(병술)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쳐들어왔다. 여러 배들은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우수사 배설은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갈두(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왔다.”

 

9월 2일(경인) “오늘 새벽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9월 7일(을미)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우리 수군을 공격하려는 것 같다’ 고 보고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 엄중히 일러 경계했는데, 포시(오후 3~5시)에 적선 13척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하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났다. … 오늘밤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각 배에 경계하라고 일렀다. 이경(오후 9~11)에 적선이 포를 쏘며 야습해왔다. 우리 배들이 겁을 먹은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자정에 물러갔다.”

 

9월 8일(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한갓 만호감으로나 맞을까 대장의 재목은 못 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다정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으니 한탄스럽다.”

 

이순신이 자리를 비운 다섯 달 사이에 조선 수군은 쑥대밭이 되었다. 전선의 상황만 변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심경도 변했다. 선조가 보낸 통제사 임명장을 받고,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라는 건조한 표현이 이를 말해준다. 이순신은 고문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선조가 충성을 바칠 군주가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호감에 지나지 않는 김억추 같은 인물을 수사로 보내는 조정의 당파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을 싸우게 하는 것은 다시 돌아온 그를 보려고 오 리나 줄지어선 백성들이고, 나라에 대한 그 자신의 충성이었다. 그리고 운명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그 백성들을 위해서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몇 차례 적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국지전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둔 것이다.

 

궤멸된 것으로 여긴 조선 수군이 저항하자 일본 수군은 총공세를 퍼붓기로 결정했다. 조선 수군을 무너뜨리고 수륙(水陸)병진 작전으로 서울로 쳐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명량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중일기》
9월 15일(계묘)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해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고, 도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라고 말했다. …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고 말해주었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음을 느낀 이순신은 휘하 전 장수들을 불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고 결의를 북돋웠다. 이순신은 천험의 지형에 급조류가 흐르는 명량해협을 결전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중에 한 척이 더 보강되었다고 해봐야 총 13척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선단이었다. 이순신은 지형과 해류를 이용해 수가 적은 약점을 상쇄하려 했다. 울돌목으로 일본 수군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급조료가 암초에 부딪히며 커다란 굉음을 내기 때문에 명암이라고도 부르는 울돌목으로 일본 수군을 끌어들이면 이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9월 16일이 결전의 날인데, 김육의 「이순신 신도비」 는 “호남의 피난선 100여 척이 여러 섬에 흩어져 있었는데, 공이 그들과 약속한 다음 뒤에다 늘여 세워 응원케 했다” 고 기록했다. 전선의 열세를 보강하기 위해 피난선을 뒤에다 세워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탈출한 김중걸은 일본 수군이 이미 이순신의 전선이 10여 척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일본군을 혼란케 하는 효과는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피난선을 늘어놓은 것이다. 9월 16일 아침 별망군이 와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곧장 우리 전선을 향하여 옵니다’ 라고 보고하면서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이민서가 찬한 「이 충무공 명량대첩 비문」 은 ‘함대가 바다의 좁은 입구에 도착하자 전선을 펼친 후 닻을 내려 바닷물을 가로막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울돌목이다. 「이 충무공 명량대첩 비문」 은 ‘적들은 상류에서 조류를 타고 바다를 가렸으니 그 기세는 산을 누르는 것 같았다’ 고 전한다. 배수진이다. 이순신의 설명에 따라 명량해전의 현장으로 가보자.

 

《난중일기》

나는 곧 여러 배에 명령해서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이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포 · 현자포 같은 여러 총통을 어지럽게 쏘아대니 바람과 우레처럼 나아갔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하게 서서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배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가며 얼굴빛을 잃었는데, 나는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게,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곧장 범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힘을 다하여 적선을 향해 쏘아라” 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으면서 관망하고 진격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함포를 이용해 사격을 가하자 일본 수군이 반격할 기회를 노렸는데, 통제사 이순신이 탄 배만 혼자 적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자칫 이순신의 배가 무너지면 조선 수군이 무너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난중일기》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에게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것이고, 이때 적선이 점점 더 다가오면 일은 아주 낭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곧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기(旗)를 내리고 또 초요기를 올리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 내 배 쪽으로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외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도망간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외쳤다.

 

“너는 중군장으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떻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전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려 한다.”

 

두 배가 곧장 적선으로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세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가 붙듯이 안위의 배에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힘껏 싸웠으나 힘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몽땅 가라앉았는데,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적을 쏘았다.

 

드디어 전세는 이순신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울돌목의 빠른 조류를 이용한 조선 수군이 초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는 이순신의 말대로 힘껏 싸우자 기적 같은 대역전극이 벌어지려 했다. 그야말로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 상황이었다.

 

《난중일기》

안골포에 있는 적의 수군으로 있다가 항복해온 준사는 내 배 위에서 외쳤다.

 

“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적당 마다시다.”

 

나는 김돌손에게 요구(갈고리)를 던져 뱃머리 위로 끌어올리게 했다. 준사는 펄쩍펄쩍 뛰며 “이것이 마다시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마다시의 몸을 토막내게 하자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순신의 배에는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는데, 그가 적장 마다시의 신원을 확인하면서 적세는 더욱 크게 꺾였다. 남원 출신의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내도수(마다시)의 머리를 베어 돛대 꼭대기에 매달자 장병들이 분발하여 적을 추격했다” 고 전한다. 마다시는 일본 수군의 선봉장 내도통총(구루지마 미치후사)인데 그는 임진년(1592) 6월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전사한 내도통지(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이다. 수십 배에 달하는 전선을 믿고 과거를 설욕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다시 패하고 만 것이다.

 

김돌손은 노비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이순신이 그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그가 모든 군사들의 이름을 숙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적장의 머리가 내걸리면서 명량해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난중일기》
우리의 여러 배들이 나아가면서 지자포 · 현자포를 쏘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적선에 불이 나 여러 배가 연소했는데,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차 넘쳤다” 라고 전한다. 일본 수군에게는 통한의 불꽃이지만 조선 수군에게는 환희의 불꽃이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라면서 “전선 수가 적다해도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이순신의 장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는 대단히 중요했다. 빼앗긴 제해권을 다시 되찾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본군은 임진년 때처럼 다시 식량 보급 통로를 빼앗겼다. 또한 일본군의 기본 전략인 수륙병진 작전도 폐기되어야 했다. 일본군의 재침전략은 근본부터 수정되어야 했다.

 

직산과 명량에서의 잇따른 패전으로 전의를 크게 상실한 일본군은 북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등청정의 일본 우군은 추풍령을 통해 경상도로 후퇴해 양상 · 기장 · 서생포 등지로 들어가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었고, 소서행장의 좌군 역시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후퇴해 10월에는 정읍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함에 따라 전라도 장기 주둔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포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서행장의 좌군 역시 전라도를 버리고 사천 · 고성 · 창원 · 김해 등지로 분산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가 오른 조명연합군은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선조 30년(1597) 10월 하순, 대반격에 나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조명연합군은 제독 마귀가 이끄는 명군 4만여 명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만 1,500명으로 구성된 총 5만 1천여 명이었다.

 

12월 23일에 조명연합군은 울산 동쪽에 가등청정이 지키는 도산성을 포위하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것이 제1차 도산성 전투인데, 명 경략 양호가 이끄는 명군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구이 몇 차례 총공세를 퍼부었으나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일본군이 버티는 상황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일본 지원군이 온다는 정보를 들은 양호는 군사를 경주로 철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도산성 전투에서 1,200여 명이 전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했으며, 1백여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명군도 전사자 1천여 명, 부상자 3천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겨우 수성에 성공했으나 명나라 정벌은커녕 조선 남쪽에서 수성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깨닫고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임진년 이듬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임란 초기 기세를 올리던 일본군은 평양성 패전과 수군의 패전을 계기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정유재란도 직산 패전과 명량 패전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조선 남부에 웅거한 일본군은 북상할 수 없었고, 조선도 일본군을 축출할 수 없었다. 국지적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했다. 임란 이듬해(1593)부터 지속된 상황이었다.

 

다급한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명도 결판을 내야 했다. 소강상태에서도 일본 수군은 가끔 산동반도를 공격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명 영토 내에서 일본군과 여진군 둘을 상대해야 할 판국이었다. 명 조정은 양호를 경질하고 천진순무 만세덕을 신임 경리로 임명하고 군사를 증원했다. 조명연합군은 다시 총공세에 나섰다. 육군은 동로군 · 서로군 · 중로군으로, 수군은 수로군으로 재편했다. 명군의 동로군 제독 마귀는 2만 4천여 명, 서로군 제독 유정은 1만 3,600여 명, 중로군 제독 동일원은 1만 4,500여 명, 수로군 제독 진린은 1만 3,200여 명을 이끌었다. 도합 6만 5,300여 명의 대군이었다.

 

조선도 전력을 기울였다. 동로군의 경상 좌병사 김응서는 5,500여 명, 서로군의 전라 병사 이광악은 1만여 명, 중로군의 경상 우병사 정기룡은 2,300여 명, 수로군의 이순신은 7,300여 명을 이끌었다. 도합 2만 5,100여 명인데, 가장 적어야 할 수군의 숫자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이순신이 그간 수군을 상당한 수준으로 복원시켰음을 말해준다.

 

선조 31년(1598) 8월까지 공세 준비를 완료한 조명연합군은 남하를 시작했다. 도산성 · 사천성 · 왜교성을 한꺼번에 함락시켜 승천하려는 기세였다. 명 제독 마귀와 조선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이끄는 동로군은 가등청정이 지키는 울산 도산성을 공격하고, 제독 동일원과 경상 우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중도군은 도진의홍이 지키는 경상도 사천성을 공격하고, 제독 유정과 전라 병사 이광악이 이끄는 서로군은 소서행장이 지키는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제독 진린과 이순신의 수로군은 육군과 함께 수륙병진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되었다.

 

선조 31년 9월 11일 동로군 선봉장인 명장 해생이 4,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산성을 공격하면서 대공세의 막이 올랐다. 해생은 저항하는 일본군 1천여 명을 격파하고 도산성에서 서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학성산을 점령했으며 김응서는 19일 동래 지역의 일본군을 몰아내고 울산과 부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장악했다. 22일에는 제독 마귀가 2만여 명군을 이끌고 가세하면서 도산성은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등청정이 완강하게 수성하면서 양군은 대치했다. 일본이 대규모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제독 마귀는 군사를 영천으로 철수시켰다. 명군은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소문만 들으면 철수하는 습성이 있었다.

 

사천성 점령도 쉽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이 공격하자 일본군은 사천성을 포기하고 바다에 접해 있는 사천신성으로 이동해 항전했다. 이 와중에 명군의 포 진지에서 화포의 오발로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군중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사이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와 명군을 타격했고, 명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큰 손실을 입은 명군이 합천을 거쳐 상주로 퇴각하면서 사천성 함락작전도 실패했다.

 

여수반도의 왜교성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왜교성 전투에는 제독 유정이 이끄는 명군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에다 수로군까지 합세했다. 그러나 육군 제독 유정과 수군 제독 진린이 수군 지휘권을 둘러싸고 다투는 바람에 수륙병진 작전이 뜻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수로군은 10월 3일에 왜교성 부근에 상륙했으나 유정이 약속을 어기고 제때 군사를 보내지 않아 공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4일에도 수로군은 광양만의 왜교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명 제독 유정이 싸움을 기피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제독 유정은 이미 소서행장에게 매수당한 뒤였다. 유정은 10월 6일 조선군을 먼저 철수시키고, 다음 날에는 명군도 순천 서북방으로 철수시켰다.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는 수로군은 철수 명령에 반발했으나 육군이 철수한 상황에서 단독 작전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0월 6일자에 “도원수 권율이 군관으로 보내 편지를 전했는데, ‘제독 유정이 달아나려 했다’ 고 썼으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라고 썼다.

 

왜교성 함락도 실패함으로써 조명연합군의 당초 목표는 모두 실패했다. 조선 남부의 전황은 대공세 전과 마찬가지였다.

 

일본 내의 정세도 큰 변화가 있었다.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병사한 것이다.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 · 전전이가(마에다 토시이에) · 우희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 · 모리휘원(모리 데루모토) 등 이른바 사대로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사대로는 풍신수길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8월 28일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제 종전이 가까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