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제도 못지않은 조선의 문제점은 조세제도의 불균등이었다. 가난한 양민들일수록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유성룡은 일찍부터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32세 때인 선조 6년(1573) 홍문관 수찬 유성룡은 조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밭둑을 잇대어 많은 전지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대부분 세력이 강하여 공부(세금)를 내지 않는 무리이고, 소민(小民)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공부를 바치는 전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특진관 첨지 유희춘이 말을 받았다.
“전결(세금을 납부하는 토지)의 공부를 강한 세력을 믿고 바치지 않는 자는 세상에 드뭅니다. 다만 부유하지만 어질지 않은 자는 이웃 전지를 겸병(병합)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침탈하여 억지로 사들이니, 이들이 바로 미워하여 다스려야 할 자입니다.”
유성룡이 세도가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반면 세금을 내는 소민들의 토지는 점점 줄어든다고 말하자 유희춘은 세금을 내지 않는 자는 적지만 남의 땅을 겸병하려는 자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좌상 등이 번갈아 나아가 말하다가 말이 왕수인이 꺼림 없이 스스로 훌륭한 체하며 주자(朱子)를 헐뜯자 중국의 성급한 자들이 부화뇌동하였다” 는 쪽으로 변하면서 왕수인과 주희에 대한 사변적 논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전세(토지세)에 한정하면 유희춘이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은 적다고 말한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공납 부분으로 세금문제를 확대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조선 후기에는 국가수입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지닌 세원(稅源)이 되었다.
공납은 많은 폐단이 있었다. 그 종류가 수천 가지에 달했으며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이 경우 먼 생산지까지 가서 사다가 납부해야 했다.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는 시기도 문제였다.
공납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납은 먼저 군현과 마을 단위로 부과되고, 마을에서는 이를 가호(家戶) 단위로 다시 분배하는데, 각 군현과 마을의 크기가 다른데도 공납부과대장인 ‘공안(貢案)’ 액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인구가 적은 군현 · 마을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호 단위 부과 기준도 문제다.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소작인)나 드넓은 토지를 지닌 전주(지주)나 비슷한 액수를 부담했다. 때로는 가난한 전호가 더 많은 공납을 부과받았다. 관아와 통하기 마련인 양반가의 농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납의 폐단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공물을 대신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방납인데, ‘놓일 방’ 자가 아니라 ‘막을 방’ 자를 쓰는 이유는 방납업자들이 농민들의 공납을 막기 때문이다. 경아문의 관리와 아전들은 농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공물은 퇴짜놓았다. 방납업자들이 파는 공물을 사서 납품해야 받아주었다. 방납업자들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부담지웠는데, 이것이 족징(族徵)이다.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대신 부담지우는 인징(隣徵)으로 닦달하니 마을 전체가 도망가 텅 비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납의 폐단을 시정해야 했다. 시정방법은 간단했다. 수많은 가짓수의 공납을 쌀 한 가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가호에서 토지 면적의 다과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많은 토지를 가진 양반 사대부들은 소유한 토지만큼 세금을 내고, 송곳 꽂을 땅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면제되는 것이다.
공납을 쌀로 통일하고 부과 단위를 토지 소유로 바꾸는 것은 군역개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세제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런 방안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중종 때의 개혁정치가 조광조다. 그러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사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런 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이도 이를 주장했는데, 그것이 ‘공납 대신에 쌀로 받는 법’ 이란 뜻의 대공수미법이다. 그러나 이이의 주장도 주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양반 전주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사실 양반 사대부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에서 이 법의 시행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조 27년(1594) 영의정 유성룡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시무를 아뢰는 차자」
또한 신이 들으니, 난리를 다스려서 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비록 군사와 군량이 넉넉한 데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서 함께 휴식할 뿐입니다.
국가의 전세(토지세)는 십일세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외에 공물과 방물(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는 특산물) 때문에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 전결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배정하지 않아서 크고 작은 고을마다 큰 차이가 납니다. 1결의 공물 값이 혹 쌀 1, 2말을 내는 자도 있고, 혹 쌀 7, 8말을 내는 자도 있으며, 혹 10말을 내는 자도 있습니다. 백성들의 부역이 이처럼 고르지 못한 데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덧붙이며, 각사에서 받을 때는 간사한 아전들이 저자 시세를 조종 농간하여 비용으로 백 배나 더 받습니다. 그렇지만 관가로 들어오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문으로 돌아갑니다.
진상하는 폐단에 이르러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이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지만 실시한 지 100년 동안에 사기가 많이 불어나고 폐단이 수없이 생겼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마이 없으며, 나라 저축도 쌓아 둘 길이 없습니다.
혁명적 세제개혁안에 시동을 건 것이다. 유성룡은 공납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쌀 1~2말을 내는 자는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이고, 7~10말을 내는 자는 가난한 농민들이기 십상이었다. 여기에 ‘간사한 아전들이 저자 시세를 조종 농간하여 비용으로 백 배나 더 받는’ 폐단에 대해서 유성룡은 정통했다. 유성룡은 곧바로 변통, 곧 전면적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 이 없다고 판단했다.
「시무를 아뢰는 차자」
신은 항상 생각건대, 공물의 처치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장부에 기재된 수)가 얼마인지 총계를 내고, 또 도내 전결 수를 계산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며,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 가지로 마련해야 합니다. 만일 갑읍에서 1결에 한 말을 냈다면 을읍 · 병읍에서도 한 말을 내고, 만일 두 말을 냈다면 도내의 모든 고을이 두 말을 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평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 백성들은 방물(方物)이 있는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도내의 토지 면적을 계산해서 면적 단위로 부과하면 세부담이 균등해지리라는 것이다.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면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같은 차자에서 유성룡은 “오늘날의 급무도 말을 많이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성에게 편의한 정사를 급히 실시하여 사방에서 그 소문을 듣고 환하게 재생(再生)의 기대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시무를 아뢰는 차자」
지금 백성은 이미 극도로 궁하고 사세는 위급하니, 도탄에 빠지고 거꾸로 매달린 고통은 족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의 건의가 만약 실시된다면 나라에는 남은 축적이 있고 백성은 여력이 있어서, 수년 뒤에는 기세가 촉진되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밖에 자질구레한 절목은 그 실마리가 매우 많으나 지금 감히 일일이 열거하지 못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국가 수치를 아직 갚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기소서. 그래서 민심의 만회에 골똘히 노력하는 것으로 영명을 하늘에 비는 근본으로 삼아 하루 이틀이라도 재물을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킬 계책을 생각하여 나쁜 옷과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노심초사하소서.
백성이 살아나야 나라도 소생할 수 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편한 정사를 해야 했다. 이때는 선조도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임란 와중에 최초로 대동법이 시행되는데, 시행 당시에는 작미법이라고 불렀다. 대동법 · 작미법 · 대공수미법은 모두 같은 것으로 잡다한 공납을 폐하고 쌀로 통일해 내는 법을 뜻한다. 백성들은 이제 수많은 가짓수의 공납 대신 쌀로 납부하면 되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토지 보유의 다과(多寡)가 부과 기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된 것이다.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방납의 폐단도 없어졌으니 농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되었다. 위화도 회군 후 단행한 과전법 이래 최대의 개혁입법이었다.
영의정에다 도체찰사까지 겸임한 유성룡이 밀어붙이면서 대동법은 시행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사대부들이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각 도의 감사와 각 고을의 수령들까지도 모두 반대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기 곤란하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표출할 창구를 갖고 있지 못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이른바 ‘민심’ 운운하며 반대해도 자신들의 견해를 표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양바 사대부들의 속내와 농민들의 민심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올린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 곧 「공물 작미의」 에서 이런 반대 논리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쳤다.
“이보다 앞서 각 고을에서 공물을 미곡으로 바꾸어 바치게 하니 민간에서 내는 것이 2말보다 몇 배나 더 됐지만 반대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제 호조에서 이를 더 줄여서 2말로 결정했으니 내는 것이 더 가벼워졌는데도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고 반대하고 있는데, 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유성룡의 주장으로 대공수미법, 곧 대동법을 처음 실시했을 때는 2말보다 몇 배를 더 냈으나 백성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공납의 부담이 컸다는 말이다. 유성룡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결에 2말만 납부하는 것으로 부담을 대폭 경감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이 들리는데 자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상시 여러 군읍의 공물 중 전결에서 약간의 토지를 덜어내 ‘관중제역(관에서 사용하는 면세지)’ 이라고 부르면서 관아에서 소용되는 일체의 잡물을 여기에 의지해 변통해 사용해왔습니다. 지금 전결의 원수에 따라 각 2말씩을 거두어 나라의 비용으로 쓰게 되자 수령들은 여기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수령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유성룡은 각 관아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수령들은 ‘관중제역’ 이라는 일종의 면세전을 조성해 그 소출로 관아의 비용과 개인적 비용으로 사용했는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예외 없이 2말 씩을 징수하므로 이것이 없어진 것이다. 대동법을 반대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수령들이라는 것이다. ‘관중제역’ 이 없어져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백성들이 싫어한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각 도의 감사와 병사(兵使)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물작미의」
감영과 병영에서 매달 초하루마다 받던 종이의 수량이 매우 많았는데 이것 또한 공사에 쓰이는 것으로 없앨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상공(항상 바치는 공물)의 규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호조에서 2말을 한도로 거두어들이자 종이를 거두어들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감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종이를 받지 못하게 되자 감사와 병사들이 반대한다는 것이다. 반대론에는 힘 있는 백성들도 가세했다. 유성룡은 이들이 대동법을 반대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공물작미의」
공물 배정에는 수량이 가볍고 무거운 것과 수송에 힘들고 쉬운 것이 있는데, 힘 있는 백성들은 번번이 가볍고 싼 것만 배정받고, 가난한 빈민이나 힘없는 하호들은 무겁고 괴로운 것만 치우쳐 배정받은 것입니다. 이제 이런 구별 없이 똑같이 배정해서 숨기거나 회피하는 편법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아전들도 반대론에 가세했다. 유성룡은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꿰뚫고 있었다.
「공물작미의」
서울 각 관사의 하리들은 지방의 공물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을 세습 사업처럼 여기면서, 10배 혹은 100배의 이익을 노려왔습니다. … 이것이 방납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협잡하여 이익을 취해왔기 때문에 백성들의 곤궁함은 날로 심했는데, 지금 공물이 모두 국용(國用)으로 들어가게 되자 예전 방납업자들이 이익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각 관사의 전복(하리나 노복)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심지어 지방 수령들이나 아전들은 반대를 넘어 대동법에 대한 조세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공물작미의」
명령이 나가는 것이 조금 늦어지고 공문의 전달 시일이 지체되었는데도, 수령들은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의로 일을 뒤로 미루면서 즉시 거행하지 않고 있으며, 벼 · 쌀의 납부 시기도 추수 후 곡식값이 떨어지는 때에 하지 않고, 백성들이 곤궁하게 지내는 봄철에 독촉해서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딱한 사정을 부르짖는 것은 이런 형세 때문이지 토지 1결에 2말을 내는 것을 과중하게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세부담자가 아니라 조세징수자가 조세에 저항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감사 · 병사 · 수령 · 아전들과 힘 있는 백성들이 모두 대동법에 저항했다. 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인물들은 모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성룡은 대동법 징수 시기를 법제화하는 것으로 이들에게 맞섰다.
“이제 곧 과조(세부 규칙)를 제정해 백성들의 추수기를 기다려 여력이 있을 때 쌀 2말을 바치게 해야 합니다. 이후에는 한 해 동안 다시 독촉받지 않게 될 것이니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가장 여유로운 가을 추수기에 한 번 납부하면 일체 추가 징수를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유성룡은 백성들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물작미의」
먼저 1말만 바치도록 하고, 기한을 조금 늦추어 주기도 하고 혹은 보리로 대신 바치도록 하는 식으로 될 수 있는 한 백성들에게 편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상납할 때에도 수로와 육로로 운송하는 뱃삯과 말의 품삯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탐욕스런 관원과 교활한 아전이 중간에서 수간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의 형편으로 백삯과 말의 품삯을 더 내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2말 중에서 일부를 덜어내 뱃삯과 말의 품삯을 치르도록 하고 작지(문서를 꾸미는 데 드는 가격)와 인정(관련자에게 주는 웃돈)까지 모두 제하고 내도록 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성룡은 국난 극복의 첩경은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벼슬아치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들에게 백성들은 여전히 착취대상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백성들은 잇속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했다. 유성룡은 관리들과 아전들의 중간 착복을 막아야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난리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기요람》 「대동작공」 에는 “중종 때 조광조가 공안 개정을 건의했고, 선조 때 이이는 수미법을 제의했으며, 임란 때 유성룡도 수미법의 편리함을 말했으나 모두 실시되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유성룡이 제안한 대동법, 곧 대공수미법은 임란 때 실시되었다. 「공물작미의」 에서 유성룡은 분명히 ‘각 고을에서 공물을 미곡으로 바꾸어 바치게 했다’ 는 것과 ‘호조에서 이를 줄여서 2말로 결정했다’ 고 말했다. 그 숱한 반대론은 대동법을 실시한 결과에 대한 반대론인 것이다.
대동법은 유성룡이 영의정 · 도체찰사로 있던 때에 실시되었다가 그가 실각한 후 반대파들의 기세에 밀려 다시 폐지된다. 유성룡은 「공물작미의」 뒤에 해설을 붙이면서 대동법의 실시와 폐지 경위를 밝혔다.
“지난날에 이익만을 탐내 방납하던 무리들이 온갖 꾀를 써서 이를 방해하였으며, 사대부 중에서도 식견 없는 자들이 이를 좇아 부화뇌동하는 바람에 다시 그 법이 폐지되었다.”
대동법은 영의정 · 도체찰사 유성룡의 강력한 주장으로 임란 때 실시되었다. 그러나 방납모리배들과 양반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로 다시 폐지되고 말았다. 이 법이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유성룡이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일 것이다. 정약용은 《경세유표》 「지관」 조에서, “문충 공 유성룡이 말한 바는 곧 대동법이다. 대동법에 대한 의논은 문충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했다. 유성룡 실각 후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다시 시범 실시되었다가 정확히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대동법의 전국 확대에 100년이나 걸린 것은 양반 전주들과 방납모리배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준다.
대동법이 유성룡 실각과 함께 폐지되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사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대동법은 비단 세제개혁에 머문 것이 아니라 공업과 상업의 발전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상업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었다.
전란으로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했지만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해 곡물이 모자라니 굶어죽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자신들의 책임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방치하기에는 그 참상이 너무 심해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선조실록》 27년 1월 17일
사헌부가 아뢰었다.
“기근이 극심해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의 굶어죽은 시체에도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이런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유성룡이 생각해낸 것이 국제무역이다.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무역시장을 열어 명나라의 곡물과 조선의 면포를 무역하자는 방안이었다. 조선은 ‘농업은 근본이고 상업은 끄트머리’ 라는 농본상말 정책 때문에 상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장시가 확대되면 농민들이 농업 대신 상업으로 몰릴 것이고, 도적도 많아질 것이라는 이유로 상업을 억제했다. 국내 상업도 억제하는 판국에 국제무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사롭게 국제무역에 나섰다가 발각되면 사형까지 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상업금지 정책을 상업장려 정책으로 전환시켜야 나라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성룡은 압록강에 국제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었다.
《잡저》 「중강개시」
압록강 중강진에 시장을 열었다. 그때 흉년이 날로 심하여 굶어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다. 공사 간의 축적한 것이 탕진되어 진휼하려 해도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내가 청하여 요동에 자문을 보내 중강에 시장을 열어 무역을 하도록 하니,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기근이 심한 것을 알고 황제에게 아뢰어 허락하였다. 이에 요동의 왼쪽 지방은 미곡이 많이 유출되므로 우리나라 평안도 백성들이 먼저 그 이점을 취하고 서울백성들 또한 뱃길로 서로 통하게 하니, 여기에 의지하여 수년 사이에 완전히 활기를 되찾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만기요람》 「중강개시」 조는 “선조 계사년(1593)에 국내의 기황(굶주림)으로 상신 유성룡이 건의하여 요동에 자문을 보내 압록강 중강진에 저자를 열어서 교역하게 하니, 이것이 중강개시의 시초다” 라고 전하고 있고, 《증보 문헌비고》는 이 사실과 함께 유성룡의 글 「중강개시」 를 모두 실어 중강개시를 연 인물이 유성룡임을 밝히고 있다.
국제무역으로 굶주림을 해결하고 국부도 키우자는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변화는 거대했다. 《만기요람》 「중강개시」 조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면포(무명) 1필 값이 피곡(겉곡식) 한 말도 되지 않았으나 중강진에서 팔면 쌀 20여 말이 넘었다. 은 · 구리 · 무쇠를 교역하는 자도 10배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요동 왼쪽 지방의 미곡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생활을 온전하게 한 자가 매우 많았다” 라고 적었다.
유성룡은 「중강개시」 조에 “비로소 옛사람들이 통상이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 중요한 일이라고 한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을 알았다” 라고 적었다. 중강개시에서 요동의 곡식이 유입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기근에서 벗어난 것이다.
유성룡은 국제무역뿐만 아니라 국내교역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교역하면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유성룡은 특히 소금에 주목했다.
「소금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는 서장」
신이 지난번에 서울에서 들으니, 군자 부정 윤선민이 소금에 관해 잘 안다고 하기에 불러서 계책을 물었습니다. 윤선민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황해도의 풍천 · 옹진 · 장연 세 고을의 경계에 서너 개의 섬이 있습니다. 섬에는 잡목이 무성하니, 땔감으로 베어 근처의 소금 만드는 사람과 목자들을 불러 모아 소금을 굽게 하면, 하루 한 가마에서 닷 섬은 얻을 수 있습니다. 염관이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을 소금 굽는 백성에게 준다면 관민이 다 구제될 것입니다. 재미를 붙여 만들게 하면 달포 동안에 몇만 섬의 소금을 얻을 수 있으니, 취하여 시행할 만합니다.”
유성룡의 구상은 먼저 소금을 만드는 백성들에게 이익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을 굽는 백성들에게 반을 주면 서로 달려와 소금을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유성룡은 국가에서 생산하는 소금인 관염 생산이 줄어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대개 연해 지방 곳곳에는 염호(소금 만드는 집)가 있어 소금을 생산해왔는데, 그 외에도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가혹한 정치가 침해하는 까닭에 염분(소금 만드는 가마)의 수효가 줄어들어 소금이 금같이 귀해져 정부와 백성이 서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산하게 벌여놓은 허다한 일들을 죄다 제거해버리고 염호의 부역을 감면해주어 안심하고 모이도록 하고, 소금 달이는 것을 보아 몇 석은 공염으로 바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가지도록 한다면 1년 동안에 공염은 그 수량을 능히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것입니다.”
소금 굽는 백성들의 다른 부역을 모두 없애고 소금만 굽게 하고 국가에 납품하는 소금 외의 것들은 모두 갖게 하면 생산량이 늘어나 소금이 풍부해질 것이란 뜻이다.
유성룡은 「소금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는 서장」 에서 윤선민의 말을 계속 인용해 소금을 이용해 백성들을 살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소금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는 서장」
윤선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닷가에 숨어 있는 공사 간의 배를 동원하는데 소금으로 값을 치릅니다. 금년에 풍년이 든 호남 · 호서의 바닷가로 많은 양의 소금을 그 배에 싣고 가서 값을 조금 싸게 해서 곡식과 바꾸어 백성들이 기꺼이 호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보리 · 밀 · 메밀 · 대두 · 소두 등의 잡곡은 물론 민가에 있는 것을 다 바꾸어서 한강에 실어와 서울의 백성을 구제하고, 나머지는 개성부의 각 고을에 나누어 봄과 가을의 종자를 삼으면 그 이득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실행하여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 소금의 용도는 곡식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으로는 바닷물을 구워 소금 만드는 것을 우선했으니 진실로 잘 처리한다면 바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무궁할 것입니다. … 현재 보건대, 충주 등의 지방은 굶주림이 갈수록 심하고 또 바닷가와는 먼 곳이라 소금이 황금같이 귀합니다. 곤궁한 백성들이 초근목피를 캘 수는 있으나 끝내 간을 맞출 수 없으므로 제대로 먹지도 못합니다. 이때에 만약 1,000여 섬의 소금을 충주로 실어가 창풍 · 단양 · 제천 · 영춘 · 괴산 · 음성 등에 나누어주면, 백성들 중에 이것을 의지해서 살아날 자가 장차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유성룡은 국가에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소금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 섬에 소금 굽는 사람들을 모을 때 생산물의 반을 준다고 하면 서로 모일 것이며, 나머지 반을 풍년이 든 곡창지대로 가져가 곡식과 바꾸어 서울과 충청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머지는 소금을 생산한 개성부의 종자로 주자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또한 관련자 모두에게 이익이니 국가정책 하나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국부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과거 소금 생산의 이익은 모두 소수의 궁가(왕실)나 권세가들이 독차지했다. 유성룡은 이런 사염을 억제하고 경염을 확대하면 백성들과 나라 모두 이익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성룡은 선조와 조강할 때도 소금 판매 문제를 거듭 주장했다.
“소금이나 쇠로 이익을 내는 일도 할 만합니다. 태공이 제를 다스릴 때 어염의 이익을 내는 일도 할 만합니다. 당나라의 유안도 소금으로 이익을 얻어 그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은을 캐는 일은 수고는 많아도 이익이 적어 할 수 없으나, 소금이라면 그와 달라 팔아서 곡식을 살 수 있고 백성도 편리하게 여깁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상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비답지 못하다며 꺼렸다. 속으로는 거대한 농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계산하면서도 겉으로는 이익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선비연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성들의 삶이 우선이었다.
“이익을 말하는 신하는 군자가 취하지 않으나, 촉의 유비도 이익을 일으켜 나라를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중국은 세입이 매우 많습니다. 한 해 동안에 먹는 것이 8백만 석이나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관염을 사서 먹으므로 그 값이 다 관가에 들어옵니다.”
유성룡의 소금정책은 백성들과 국가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그간 사염으로 배를 불리던 일부 궁가와 권세가들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안이었다.
유성룡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했으며 그 대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체를 조망하는 거시적 안목과 부분에 해박한 미시적 시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였다. 또 전란 극복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실학자였다. 이런 유성룡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면서 조선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위기가 다시 다가왔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쟁이 격화될 조짐이 보인 것이다. 풍신수길은 조선 남부를 달라는 요구조건이 거부되자 재침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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