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은 소강상태에서 변화가 없었다. 유성룡은 새 경략 고양겸에게 회보(回報)하는 차부에서 선조 27년(1594)의 전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 경략에게 회보하는 치부」
금년 정월부터 적의 형세는 전년과는 좀 달라졌습니다. 비록 적은 전처럼 서생포 · 기장 · 동래 · 부산 · 김해 · 웅천 · 거제 등에 머물러 버티고 있으나 약탈은 좀 줄었습니다. 오직 적의 괴수 가등청정의 부하로 임랑포에 있던 자가 경주를 빼앗으려다가 우리 병사들에게 단번에 쫓겨 갔을 뿐입니다.
휴전 비슷한 상태였다. 언제 다시 전쟁이 격화될지는 알 수 없었다.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겸임한 유성룡은 이 소강상태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조선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둘인데 국방력 강화와 민생 안정이었다. 사실 이 둘은 하나다. 민생이 안정되어야 국방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유성룡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제승방략체제를 다시 진관체제로 바꾸어야 했다. 임란 발발 6개월 전에 유성룡이 주장한 진관체제 복귀가 무산되면서 유성룡의 예견대로 조선은 ‘토붕와해의 지경’ 에 이르렀다. 유성룡은 진관체제로 다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관제도를 재정비하여 거행하도록 청하는 계」
가령 경상도를 말하자면, 동래진에 소속된 10여 읍의 군사를 공사천과 잡류를 논할 것 없이 모두 동원하여 군사를 삼으면 그 수가 7, 8만에 이릅니다. 설혹 불행하여 패하더라도 또 대구 진관의 군사가 있어 중간에서 막으며, 경주와 진주의 군사가 좌우의 날개가 되어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 적이 비록 한 겹을 뚫더라도 또 한 겹이 있으니, 어떻게 열흘 사이에 천 리를 횡행하여 도성에 곧바로 나아가 무인지경을 밟는 것같이 하는 데 이르겠습니까?
유성룡의 말대로 진관체제는 동래가 패하면 대구에서 막고, 대구도 패하면 상주에서 막을 수 있는 체제다. 유성룡은 이 계사에서 “제승방략은 처음으로 을묘왜변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한때의 위급함을 구하는 계책으로 적은 수의 적을 대응하는 데만 겨우 쓰일 뿐이고 대적을 방어할 술책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명종 10년(1555) 왜구들이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를 공격한 것을 을묘왜변이라 부르는데, 이때 이준경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를 격퇴하고,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삼았다. 을묘왜변 같은 국지전에는 제승방략체제가 효과적이다. 많은 병력을 특정 전투지역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에는 큰 결함이 있는 군사체제다. 유성룡은 “중세 이후에 좋은 법과 제도가 모두 폐지되고 떨어져서, 사대부는 다만 문장의 화려함을 다듬고 헛된 말만 꾸미기에 힘쓸 뿐 세상을 다스릴 생각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라며 “각 도에 명하여 진관제도를 더 닦게 하소서” 라고 진관제도 부활을 주청했다. 《선조실록》 27년(1594) 3월 29일조는 유성룡의 계사를 받은 선조가 “지극한 말이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진관체제가 뒤늦게 복귀된 것이다.
진관체제가 부활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제승방략이든 진관이든 군사가 있어야 실시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조선은 군사가 없었다. 일반 백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는 면제되었다. 일반 양인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정병(正兵)과 봉족으로 구성되는 병역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노비들도 천인이란 이유로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유성룡은 이 부분에 손을 대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에 손을 대는 것이라 극심한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전란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성룡은 이 부분을 과감하게 개혁했다.
속오군이 그중 하나다.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따라 중앙에는 훈련도감, 지방에는 속오군을 설치했는데, 속오군에는 양인뿐만 아니라 천민과 양반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비변사에서 선조 30년 11월 16일에, “속오군에 … 천인뿐만 아니라 양반 · 유사 · 아전의 무리로 토목의 역사를 견디지 못하는 자까지도 그 속에 섞여 있습니다” 라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양반과 천인이 한 부대 내에 섞여 있다는 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양반은 신분상의 특권을 이유로, 천인은 양반들의 사유물이란 이유로 모두 병역의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혀 다른 이유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이었다. 유성룡은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우려 했다. 반발이 거셀 것은 불문가지였다. 선조 28년(1595) 11월 26일, 유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을 보내 양반과 천인을 막론하고 모두 속오군에 편입시키라고 지시했다.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
병졸을 교련시키는 한 가지 일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니 출신(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 · 양반 · 서얼 · 향리 · 공천 · 사천을 논할 것 없이 장정으로 실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사목(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군대)로 편성하여 그 부근의 각 리에 거처하도록 하고, 각각 묶어 몇 대가 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병기를 조치 준비하여 새로 훈련을 하도록 하라.
‘출신 · 양반 · 서얼 · 향리 · 공천 · 사천을 논할 것 없이’ 라는 말은 일체의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두 군적에 포함시키라는 뜻으로 이는 조선 군사제도의 혁명적 변화였다.
개국 초에는 양반들도 병역의무를 졌다. 그런데 중기까지 전쟁이 없는 평화 시대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관아에서는 백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대신에 포(무명이나 베)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주는 편법을 선호했다. 관아에서는 납부받은 포보다 낮은 가격에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역의무를 지우면서 중간 차액을 다른 곳에 사용했다. 이를 ‘방군수포제’ 라고 하는데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방 관아에서 암묵적으로 시행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추세가 되어 중종 36년(1541)에는 군적수포제란 명칭으로 합법화되었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이 합법적으로 군역에서 면제되었다는 점이다. 중인들은 따로 신역이 있었으므로 결국 일반 농민들만 병역의무를 져야 했다. 군역의무에서 면제된 양반들은 군포 납부의 의무도 없었다. 더구나 군적수포제가 실시된 후에는 군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일반 양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군역의무에서 면제된 양반이 사회의 지배층이 되는 가치관 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니 농민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다. 군역 명부에는 등재되어 있어도 막상 전쟁이 터지자 모두 도망간 것은 이 때문이다.
유성룡이 양반 종군을 밀어붙이자 양반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노비들의 종군까지 밀어붙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은 물론 노비들의 병역의무도 반대했다. 노비들은 자신들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양반 종군과 천인 종군은 방식이 달라야 했다. 양반 종군은 당연한 의무지만 천인 종군은 반대급부가 따라야 했다. 가장 큰 반대급부는 면천(천인 신분에서 면제되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면천을 조건으로 군사를 모집하면 천인들이 대거 입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라는 군사 수를 늘려서 좋고 노비들은 면천되어서 좋은 일거양득의 방안이었다. 노비 충군 방안은 임란 전인 선조 6년(1573)에 율곡 이이가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양인 부친과 천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모두 천인이 됨으로써 군정(병적에 있는 장정)이 날로 줄어든다며 신분법을 개정해 양인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혁신적 주장은 《선조수정실록》 6년 9월 1일조에 “끝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라고 전하는 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물론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천인을 양인으로 만들어 군정을 늘리려던 시도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이는 선조 16년(1583) 병조판서로 있을 때도 여진족이 경원부를 함락시키자 다시 서얼이나 공 · 사 천인들에게 신분상승을 조건으로 국경 방어에 나서게 하자고 주장했다. 여진족과 싸우는 최전선인 육진 근무를 자원할 경우 만 3년 근무하면 ‘서얼은 과거에 응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공 · 사천은 종량하되, 사천인 경우에는 공천으로 대신 충급하자’ 고 주장한 것이다. ‘사천은 공천으로 충급한다’ 는 것은 사노비가 근무를 자원할 경우 공노비로 그 주인에게 보상해주자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양사(兩司)를 비롯한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북방에서 전운이 감도는데 양반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 보호에만 신경 쓴 것이다.
이때의 여진족 문제는 국지전이기 때문에 노비를 충군시키지 않아도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유성룡은 양반 종군과 노비 충군을 실현하지 못하면 개국 이래 최대의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방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자리를 걸고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근폭집》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서장」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데, 공사천인 · 아전 · 서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 국가에서는 그들의 처자를 유달리 위안하며, 무기와 말과 식량을 주어 용맹스러운 장수에게 배치하소서. 그 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금군에 소속시켜 그들을 흥기시키고 꺼려 피하는 마음을 없게 하며 상시로 훈련해야 합니다. 만약 변란이 일어났다 하면 즉시 출동하여 싸움터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공사천인 · 아전 · 서자 등을 모두 군사로 선발하자는 주장이다. ‘그들의 처자를 유달리 위안’ 하자는 말은 가솔들의 숙식을 국가에서 돌보자는 뜻이다. 나아가 군공을 세우면 벼슬도 주고, 국왕 경호부대인 금군에도 소속시켜 자부심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유성룡의 주장대로 시행됐다면 조선의 국방력은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분제에도 혁명적 변화가 일었을 것이다. 양민의 숫자는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천인 중에서 군공을 세워 벼슬하는 경우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천인 종량은 노비에 대한 양반의 사적 지배를 국가의 공적 지배로 전환하는 것이니 임금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선조는 재위 26년(1593) 6월 14일 이 문제에 대해 하교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무략(武略)이 강하지 못하고 병력도 미약하다. 대체로 공 · 사천은 그 수가 군정보다 많을 터인데, 이름이 병적에 오르지 않았다. 공천(공노비)은 그래도 공가(관가)에서 부역하지만 사천은 유사(관리)도 감히 어쩌지 못하여 국내의 일종인(一種人=특별한 존재)이 되었으니, 이는 고금 천하에 없던 일이다. … 공 · 사천에게도 삼의사(제생원 · 전의감 · 혜민국)가 잡과를 보는 것처럼 무재를 시험해 입격한 자는 즉시 양민으로 삼아 우림위(국왕 경호부대)에 예속시킨다. 사천은 그 주인이 유생이면 벼슬을 제수하고 서얼은 허통하고, 공천이면 모두 양민이 되게 한다. … 이와 같이 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독려하거나 권장하지 않아도 온나라의 공 · 사천이 모두 무술을 익혀 정병이 될 것이다. … 어떠할지 자세하게 상의하여 아뢰라.”
노비들을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해 합격한 자는 양민으로 삼아 우림위에 예속시키고, 노비 주인들이 반대할 것이므로 주인들에게도 벼슬 등의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 비변사는 대체적으로 찬성하면서 더욱 자세한 규정을 만들자고 회계했다. 도체찰사 유성룡의 방안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족의 집에는 노복이 천 명 또는 백 명이 있는데 관병은 날로 축소되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오래된 풍속으로 졸지에 변경할 수 없다고는 하나 이들을 군적에 포함시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공 · 사천을 막론하고, 삼의사의 잡과와 같은 예로서 설과하여, 뽑힌 자는 즉시 양인으로 삼아 우림위에 예속시키라는 것은 바로 위급한 때를 구제하는 거사로서 지당합니다.”
선조가 동조하자 유성룡은 노비들에게 과거를 실시해 합격하면 양인으로 상승시켜 우림위에 예속시키는 방안을 비롯한 노비 충군 방안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노비 주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노비는 군사가 될 수 없다는 사대부들의 극단적 계급 이기주의였다.
《선조실록》 27년 2월 12일
상이 일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병사를 기르지 말자는 말이 어찌 입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유성룡이 아뢰었다.
“다른 일은 돌아보지 말고 병사를 기르고 식량을 비축하는 것만을 10여 년만 집중하면 왜적을 방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에는 공 · 사천은 병사가 될 수 없었지만 오늘날은 적병이 날뛰니 공 · 사천도 병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일이 인정에 끌리니 사천은 병사가 되기 어려울 듯하다.”
“상께서 만약 하신다면 어찌 이 지경에야 이르겠습니까. 낙 참장도 우리나라 공 · 사천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상이 일렀다.
“우리나라가 일을 일답게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삼경에 파하고 나갔다.
선조가 ‘사천은 병사가 되기 어려울 듯하다’ 라고 한 걸음 물러서자 유성룡은 명나라 참장 낙상지의 말까지 언급하며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일이었다. 노비가 양인이 되면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다. 노비는 양인이 되어서 좋고, 국가는 재정이 튼튼해지고 국방력을 강화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이는 신분제의 완화를 바라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았다. 선조는 사노비 충군에서는 한발 물러나려고 했지만 유성룡은 사노비가 배제된 노비 충군은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노비는 국가에서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사노비가 충군되어야 국방력이 강화되고 신분제에도 획기적 변화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유성룡은 다시 사노비 충군론을 제기했다.
《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유성룡이 아뢰었다.
“공천 · 사천을 막론하고 모두 군사로 편입시켜야 됩니다.”
상이 일렀다.
“적이 물러간 다음 그 주인이 찾아간다면 훈련도감의 호령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적이 물러간 뒤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상이 일렀다.
“이미 노주(노비와 주인)의 분의(分義)가 있으니 그 상전이 잘 조처하여야 할 것이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어찌 사람마다 좋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처첩까지도 항오(군대)에 편입해야 할 때입니다. 국초에 김종서는 대간으로 있다가 하향한 사람까지도 군역을 정하고자 했다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노주를 따지겠습니까.”
지금도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들을 노비 주인들이 데려간다는 뜻이다. 이 경우 조선의 법은 노비 주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찌 사람마다 좋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국익과 노주의 이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종서는 대간으로 있다가 하향한 사대부들까지 군역에 넣자고 했는데, 어찌 그 노비를 충군시키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유성룡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양반 종군과 노비 충군을 밀어붙였다. 그래서 유성룡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실제로 천인들이 벼슬에 등용되었다. 유성룡은 먼저 군사를 뽑는 방법을 지시했다.
“병졸을 교련하는 일은 반드시 먼저 초관을 골라 뽑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기총을 골라 뽑도록 하며, 기총은 대총을 정하고, 대총은 군사를 뽑도록 한다.”
초관은 기총을 뽑고, 기총은 대총을 뽑고, 대총은 일반 군사를 뽑아 부대가 일체감을 갖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유성룡이 작성한 《진관관병편오책》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변화가 눈에 띈다. 노비 출신들이 군적에 등록되어 있는 것은 물론 군의 하급 간부인 대총에 임명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영장 군자 주부 최준 휘하의 여러 기총들과 대총들, 일반 군사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1기총 박덕남 산하에는 3개의 대총이 있는데, 2대총 송이와 3대총 춘복이 모두 종 출신이다. 종 출신이 하급 간부가 된 것이다. 1대총 산하 11명의 병사 중에는 종 출신이 무려 8명이었다. 2대총은 5명, 3대총도 8명이 종 출신이다. 전체 33명의 병사 중에 종 출신이 무려 22명이나 되는 것이다. 2기총도 마찬가지여서 2대총 영수가 종 출신이었다. 2기총 33명의 병사 중에도 종 출신이 21명이나 되었다. 유성룡이 작성한 이 편성표는 노비 출신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란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유성룡의 천인 충군론은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유성룡이 임란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인데도 훗날 반대 당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쫓겨난 배경에는 바로 노비 충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유성룡이 노비 충군론으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서인 영수이자 병조판서인 이이가 선조 6년과 16년에 제기한 것이 천인 충군론이고, 남인 영수이자 영의정 · 도체찰사인 유성룡이 전란 중에 제기한 것도 천인 충군론이다. 계급적 이해와 당파를 떠나서 바라본 세상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이해와 당파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성룡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에 손을 댄 사대부 계급의 적일 뿐이다.
선조 28년(1595) 전 형조참의 유조인이 상소를 올려 유성룡의 군사정책 전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유조인의 상소는 남아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가 남아 있어 대략의 전모를 알 수 있다.
“… 유조인이 상소하여 시폐를 전달하였는데, 그 성의는 칭찬할 만하며, 그 가운데는 쓸 만한 말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포수와 살수는 우리나라의 장기가 아니므로 전진(戰陣)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과 아울러 사천까지 병사로 뽑는 것은 실책이라고 힘을 다하여 진달한 것에는 신이 원래부터 다른 소견을 갖고 있습니다.”
유조인의 상소에 대해 유성룡이 반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조인이 조선군에는 포수(대포와 조총을 쏘는 병사)와 살수(긴 창을 쓰는 병사)가 필요 없다고 말한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을 병사로 뽑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사실 이 둘은 같은 문제다. 훈련도감에는 많은 노비들이 소속되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유조인의 상소는 훈련도감과 노비 충군의 동시 혁파를 바라는 사대부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유조인은 신무기를 쓰지 말고 옛날처럼 활과 화살만 쓰자고 주장했다. 유성룡이, “그가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벼슬을 한 지식층과 일반 민간인들까지 포수와 살수를 가리켜, 한바탕 웃음거리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과연 그러한 실정입니다” 라고 말한 대로 많은 사대부들은 유성룡의 신무기 도입에 저항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근폭집》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지금 국사가 파멸(破滅)된 후에는 마땅히 지난날을 경계하여 뒷날에 닥쳐올 화란을 조심하고, 무너진 체제를 아주 새롭게 하여 밤낮으로 병기를 제작하고, 군신과 상하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서로 손바닥을 치면서 국사를 의논하고, 짧은 시간을 아껴서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기 위해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도, 유조인은 도리어,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으니 여기서 또한 그의 말이 세상일에 어둡고 시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조 28년의 상황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 중이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물러간 것이 아니라 남해안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조명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한 저의에는 사대부들의 소유인 노비들을 군사로 충당하는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는 것이다. 유성룡은 이런 논리에 강하게 반발했다.
《근폭집》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사천을 군사로 만드는 데 따르는 폐단에 대해서 현재까지의 관습으로 논한다면 이런 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천하 일반 사회의 도리로 말한다면 사천만은 유독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원래 지역이 협소한 데다 그 사이를 양반과 상인으로 나누어, 귀천의 구분이 있으니 이른바 사천이란 것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번성하여 천만의 무리를 이루었으나 한 사람도 군역에 종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양민들은 각종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살아갈 수가 없어 달아나고 흩어져 졸지에 서울과 지방의 양민들은 모두 개인의 사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공후(양반 사대부)들의 집은 모두 공봉을 받지만 공실(국가나 관아)에는 백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 이런 까닭에 선현들도 전지를 제한하고 노비를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려고 하였으니, 그 생각은 먼 앞일을 염려한 것입니다.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전지와 노비를 제한하려 한 선현’ 들이다. 중종 14년(1519) 사형당한 조광조가 76년 만에 살아 돌아온 셈이었다. 평소 타인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던 유성룡답지 않게 이 문제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근폭집》 「유조인의 상소에 대한 회계」
지금의 실정은 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 어려운 걱정이 눈앞에 가득하여 뜻이 있는 인사는 눈물을 흘려야 할 터인데도, 무식한 무리들은 이따금 그의 노복이 병역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입을 벌려 이의 선동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당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장순과 허원이 수양성을 지킬 때 장순은 자기의 애첩을 죽여서 삶고, 허원도 아끼는 노복을 죽여서 그 고기를 군사들에게 먹였다” 고 하는데, 두 장수는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은 어진 군자들인데도, 유독 사랑하는 첩과 노복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 일이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날 자기의 몇 사람 안 되는 노복을 아껴 국가의 큰 계책을 그르치려고 하는 사람과 비교해본다면, 누가 어질고 누가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만약 천인들은 사적(벼슬)에 등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한(漢)나라 때 위청은 노복에서 발탁되어 출세했고, 김일제는 항복한 부로(흉노)에서 발탁되었지만 후세에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인재가 많았다고 일컫던 때이니 이는 또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자치통감》 「당기」 에 따르면 장순과 허원은 강회의 요충지인 수양성을 지킬 때 양식이 떨어지자 다지를 먹다가, 이것이 떨어지자 군마를 잡아먹고, 이것도 없어지자 새와 쥐를 잡아먹었다. 그마저 떨어지자 장순은 애첩을 죽이고, 허원은 노복을 죽여서 군사를 먹이고, 그 후에는 성안의 부인과 노약자를 찾아내 군사를 먹였다는 기사다. 유성룡은 자신의 애첩과 노복을 죽여서 군사를 먹인 당나라 지배층과 노복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조선의 지배층 중 누가 올바른지 물은 것이다.
여기에서 유성룡이 ‘천인들도 사적에 등용할 수 있다’ 면서 한나라의 위청과 김일제를 예로 든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천인들을 종량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벼슬까지 주려 했기 때문이다. 노비를 인간이 아니라 재산 취급 하던 양반 사대부들의 의식과 비교하면 혁명적 발상이다.
유성룡의 이런 생각은 선조 28년(1595)에 처음 싹튼 것이 아니다. 임란 초기에 이미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명군이 퇴각하여 평양에 주둔한 뒤 군중의 할 일에 대해 아뢴 서장」 에서 이를 제안한 데서 알 수 있다. 명장 이여송이 평양으로 퇴각한 선조 26년(1593) 1월말에서 서울을 수복한 4월 사이에 작성한 서장이다.
《진사록》 「명군이 퇴각하여 평양에 주둔한 뒤 군중의 할 일에 대해 아뢴 서장」
우리나라에는 공사 노비가 너무 많은데, 양민은 날로 줄어들고 군사의 수효도 많지 않으니, 지금 바로 변경하여 시행하소서. 신의 생각으로는 별도로 시상 조문을 만들어 지난날의 예를 따르되 조금 가감하여 양민은 적의 머리를 1급 이상, 서얼은 2급, 공사천인은 3급을 각각 얻으면 과거합격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리 홍패(과거합격증)를 공명고신(이름을 비워둔 관직임명장)처럼 만들어서 원수의 관부에 보냈다가, 적의 머리를 베어온 자는 그 진위를 확인하여 정말 적의 머리가 틀림없고 급수가 차면 곧바로 홍패를 주소서.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불길을 밟더라도 전력을 다해 적을 무찔러 열흘도 채 못 가서 적의 수급이 쌓여 경관(적의 시신을 쌓아놓은 탑)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선무이고 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뭇 인심이 그러하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 양민은 적군을 한 명만 죽이면 과거합격으로 인정하고, 서얼은 두 명, 공사천인은 세 명 이상을 죽이면 과거합격으로 인정해 홍패 같은 공명첩을 주자는 것이다. 공명첩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에 합격한 양반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유성룡의 이런 방안은 군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하는 군공청에 의해서 법제화되기도 했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
군공청이 아뢰었다.
“공천과 사천에 대해서는 적의 참수(목을 벰)가 1급이면 면천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를 시키고, 3급이면 허통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에 제수하는 것이 이미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과 다름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천인이 왜적 한 명의 목을 베면 면천되고 왜적 네 명의 목을 베면 수문장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조치가 내려지자 천인들이 일본군 사냥에 나선 것은 당연했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조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문관)의 정직에 붙인 뒤에 그만두어야 하니 관작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라고 반대하는 구절이 있다. 사노가 왜적의 머리 10~20급을 베면 동반 정직을 주어야 하는데, 벼슬 주는 것이 이처럼 심할 수가 없다는 반발이었다. 왜적의 수급 10~20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비가 어떻게 벼슬을 하느냐는 데 맞춰진 반발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노비도 공을 세우면 벼슬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같은 사료에서 “그뿐 아니라 재인 · 백정 · 장인 · 산척 등의 천류라 하더라도 직급을 뛰어넘어 높은 관직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로 장오돌이 그런 사람인데, 물정이 온당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비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온당하게 여기지 않는 물정’ 이란 물론 양반 사대부들의 여론을 뜻한다.
유성룡이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신분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천인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면서 전세는 바뀌고 있었다.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다. 신분의 한을 풀기위해 싸우는 군사들이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의병 중에 농민 · 천인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유성룡의 이런 정책 때문이다.
유성룡은 직접 천민 출신을 발탁하기도 했다. 신충원이 그런 인물이다. 유성룡은 선조 26년(1593) 8월 도체찰사로 남쪽 시찰에 나섰을 때 조령에 관문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신충원이다.
“내가 계사년(선조 26)에 남도를 왕래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살피고 관문을 설치하려고 했다. 관문 양쪽에 복병을 두어야 적병을 막을 수 있을 텐데 군읍이 모두 파괴되어 이 일을 처리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충주 사람 신충원은 과거 의병으로서 조령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병을 쳐서 목을 베고 사로잡아 그 군공으로 수문장에 임명되었는데, 조령 일대의 길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가 가기를 청하므로 내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선조 27년 10월조는 신충원을 ‘미천한 사람’ 이라고 적고 있고, 선조 34년에는 이항복이 신충원을 ‘그 지방의 지극한 천인’ 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신충원은 천인이다. 군공청의 계사에 ‘적의 목 4급이면 수문장에 제수한다’ 고 했으므로 그 이상의 왜적을 베어 수문장에 오른 것이다. 그런 신충원을 유성룡이 선조에게 직접 천거했다.
“지금 수문장 신충원이란 사람은 충주 사람으로 임진년 여름에 신립의 군사가 패한 뒤 민병과 승군을 모집하여 조령과 단월 사이에 매복하여 적을 많이 죽였고, 또 원신 등과 함께 흥원의 적을 습격하여, 그 군공으로 수문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본고장 사람으로 그곳에 출몰하면서 적을 잡았기 때문에 신이 미처 알지 못한 조령의 형세와 곡절을 아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유성룡이 신충원에게 주목한 것은 그가 조령 방어에 대한 방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령 꼭대기는 길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지킬 수가 없습니다. 고개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10여 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고 가운데에는 계수(계곡물)가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왕래하는 행인들이 횡목을 놓아 다리를 만든 곳이 모두 24군데로 이곳을 응암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 병기를 설치하여 파수를 보다가 적병이 오면 다리를 철거하고 또 시냇물을 가로막아 두 계곡 사이로 큰물이 흐르게 한다면 적군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서 궁노 · 능철 · 화포 등의 병기로 지키면 불과 1백여 경졸로도 조령의 길을 튼튼히 막을 수 있습니다.”
신충원은 또 천류들을 동원해 적군과 싸우는 방안을 제시했다. 천류들을 모아 땅을 주면서 군사로 삼으면 강한 군사가 되리라는 것이다.
“거느린 승군과 산척(심마니)으로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1백여 인은 됩니다. 영풍 읍내와 서면 수회촌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도 지금은 무인지경입니다. 파수군에게 이를 둔전케 하여 농사를 짓게 해서 군량을 만들고, 또 화약이나 총포 등의 병기를 주어 주야로 조련하면 수개월 후에는 정예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유성룡은 신충원을 등용해 조령에 관문을 쌓고 둔전을 개간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조가 동의하자 유성룡은 신충원을 둔전관으로 임명해 임무를 맡겼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선조 27년 6월 23일 이조에서 선조에게 “조령 · 영풍에 둔전관 신충원을 두자 조령 서쪽은 초적이 흩어졌으니, 이는 오늘날 이미 나타난 실효입니다” 라고 아뢴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선조실록》 27년 10월 9일
충청 순찰사 윤승훈이 장계하였다.
“신이 조령에 도착하여 직접 관을 설치하는 곳을 살펴보니 고개 남쪽으로 10리 남짓 되는 곳에 응암이라는 곳이 있는데, 1백 장이나 깎아지른 듯하고 동남쪽이 모두 층층 절벽이며, 그 사이로 길이 하나 있는데 말을 타고는 두 사람이 함께 지날 수 없었습니다. 파절장 신충원이 백성을 모집하여 성을 쌓고 시냇물을 끌어다가 참을 만들었는데, 공역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 형세가 중국의 산해관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도 열 수 없을 곳입니다. … 그리고 죽령의 험하기가 조령보다는 못하지만 관을 설치하여 적을 막을 만합니다. 응암의 축성을 마친 뒤에 신충원에게 또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고 싶으나 물력이 다하여 쉬이 시행하지 못할 듯합니다.”
신충원을 둔전관이자 파절장(파수장)으로 삼아 조령에 관을 설치하게 한 결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해관에 비견할 만한 방어진이 만들어졌다. 신충원이 사람을 모을 수 있었던 힘은 유성룡이 준 공명첩 수십 장에 있었다. 신충원은 공명첩을 가지고, 노비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고, 돈 많은 양민에게 파는 식으로 사람과 돈을 구해 조령에 관문을 설치한 것이다.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들 중에 노비들이 많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들 중에 공천과 사천이 많으므로 관리들과 노복을 잃은 주인들이 비방하는 말을 만드니, 여러 사람의 입에 시끄럽게 오르내렸다.”
후술하겠지만 신충원은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숱한 고초를 겪게 된다. 천류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양반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사대부들은 유성룡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임란으로 이미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임진왜란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사대부 지배체제의 무능함을 목도한 백성들은 왕조 자체를 불신했다. 이제 백성들은 왕조에 직접 저항했다. 선조 27년(1594)에는 송유진이, 선조 29년(1596)에는 이몽학이 조선 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다. 남부에 일본군이 잔류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 왕조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서 개의치 않은 것이다.
송유진은 의병장을 사칭해 세력을 규합했는데, 지리산 · 속리산 · 청계산 등에 은신하고 있던 일당의 수가 2천이 넘었다고 전한다. 송유진은 군량미와 무기까지 비축한 후 선조 27년(1594) 정월 보름에 서울을 점령하기로 거사 계획을 세웠다.
《난중잡록》 조경남
충청도 홍산에 사는 송유진이 반역을 꾀하는 밀서를 전주에 보내,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게 벌주니 실로 탕무에 빛이 되리로다” 라고 운운했다.
어느 사람이 고변하면서 의병장 이산겸이 반역한다고 고하매 이산겸이 전주 무군사에 변명하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
고대 주나라가 은나라를 공격할 때 강태공은 장수가 되어 목야 전투에서 매처럼 활약했다. 처음 출병할 때 백이 ·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는 안 된다” 라고 말렸기 때문에 ‘부끄럼이 있다’ 고 한 것이다. ‘탕무에 빛이 되리로다’ 라는 말은 무왕의 봉기가 백성들에게는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곧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건설해야 백성들에게는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유진의 난은 거사 직전 고변자가 생기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몽학의 난은 실제 거병까지 이루어졌다. 선조 29년 7월 8일 충청도 순찰어사 이시발의 장계를 보내 이몽학의 난을 최초로 보고하면서 조정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이몽학이 홍산현을 공격하려 한다는 장계였는데, 보고 내용이 사실로 입증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시발의 장계가 또 온 것이다.
“6일 새벽에 이몽학이 홍산에 쳐들어와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고, 임천으로 향해 또 군수 박진국을 사로잡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다투어 여기에 붙어 도당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선조는 깜짝 놀라 선전관을 보내는 한편 감사 · 병사 · 어사에게 빨리 진압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이몽학 군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7일 정산을 공격하자 수령 정천경이 달아났고, 8일 청양을 공격하자 수령 윤승저가 또 도망치는 판국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갑진만록》에는 “수일 동안에 무리가 수천에 이르고 시골의 서민들은 산중에 도망가 숨으니 마치 왜란을 피할 때와 같았고, 흉도들의 기세는 대단히 치열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난중잡록》에서 “이때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졌다가 한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 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고 전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이몽학에게 환호했다.
9일에는 대흥을 공격했는데 수령 이질수는 산중으로 도망갔다. 그의 보고서는 경상도 신평과 강원도 대진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이몽학의 군사들이 충청도에서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를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다.
《난중잡록》 조경남
적병이 서울로 간다고 큰소리를 치니 서울이 술렁거리며 두려워하고, 진위 · 수원 땅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리고 있었다. 이때에 반군이 지나는 곳마다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하던 자는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조가 잃어버린 인심은 이몽학 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흥을 점령한 이몽학 군은 곧바로 홍주를 공격했다. 중과부적인 데다 백성들이 이몽학을 따르므로 목사 홍가신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홍주의 관속(아전) 이희수와 신씨가 홍가신에게 계책을 내놓으면서 전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몽학에게 거짓 항복해서 형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두 사람은 광시역으로 가서 노상에 꿇어앉아 있다가 이몽학 군에 합세했다. 홍주성의 아전이 자진해서 투항한 것에 이몽학을 크게 고무되었다. 대흥을 손쉽게 점령한 이몽학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홍주까지 쳐들어가고자 한다.”
이희수와 신씨가 말렸다.
“홍주는 성이 굳건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가서 허실을 살펴본 후에 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이몽학이 이를 받아들여 지체하는 동안 이희수와 신씨의 보고를 들은 홍가신은 홍주성 방비를 굳게 했다. 평소 용맹을 떨치던 무장 박명현이 사람들을 모았다. 때마침 체찰사의 종사관 신경행이 근처 내포에 있다가 달려오고, 충청도 수군절도사 최호를 부르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 또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도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몽학이 홍주성을 공격했을 때는 모든 준비가 끝난 뒤였다. 이몽학이 진을 다섯으로 나누어 한 진에 천여 명씩 배치해 거듭 공격했으나 박명현이 저지했다. 저녁까지 홍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몽학 군의 장수 몇 명이 홍주성 아래로 달려와서 호통쳤다.
“천운이 우리에게 있는데, 성중 사람들은 어찌 나와서 호응하지 않는가?”
성안에서 화포와 불화살로 맞대응했는데 동문 밖 인가가 불타서 화염이 하늘을 밝혔다. 그사이 충청 병사 이시언이 군사를 이끌고 온양에서 출발해 예산 무한성을 지나고 있었고, 어사 이시발도 유구역에서 홍주로 향했고, 중군 이간도 청양에서 홍주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몽학 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이몽학이 물러가면서 외쳤다.
“만약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기 끝에 달 것이다. … 장군 김덕령과 영천 군수 홍계남 등이 다 우리와 공모했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서울로 향할 것이다.”
겸사복(임금의 친위부대) 한현은 이몽학과 함께 봉기를 주모했다.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서 내포로 내려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하면 자신이 내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면천농장에서 성패를 주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향할 것이라는 이몽학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덕산 방면으로 후퇴하자 진중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박명현은 군사를 이끌고 청양까지 추격했다. 전주 판관의 아병 윤계는 부하 군졸들과 이몽학의 진중에 뛰어들어 크게 외쳤다.
“도원수(권율)와 전라 감사, 충용장군(김덕령)이 각가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도착했다. 너희들은 내일이면 남김없이 죽게 될 것이다. 너희 중에 협박 때문에 따른 자들은 장수의 목을 베어오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몽학은 김덕령이 공모했다고 선전해왔는데, 윤계가 거꾸로 김덕령이 토벌군 장수라고 말하자 농민군은 이몽학을 의심했다. 서울로 진군한다더니 덕산으로 퇴각한 것도 의심을 더하게 했다. 김경창 · 임억명 · 태근 등 3명이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쳤고, 수많은 난민들은 흩어져 살길을 찾았다. 이렇게 충청도 일대를 소란케 한 이몽학의 난은 종결되었지만 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서울로 실려온 이몽학의 목은 철물전 길가에 효시되었다가, 각 지방을 돌며 전시되었고, 그의 홍산 가옥은 파헤쳐져 연못이 되었다. 홍산현도 혁파되었다. 한현 등 공모자들도 처벌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자가 33명이며, 현지에서 처형된 자도 1백여 명이 넘었다.
《갑진만록》은 “당시에 혜성이 자미성의 황제 자리를 급히 범했다가 적이 평정되고는 바로 없어졌으니, 천변이 위에서 응함이 이와 같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혜성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난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의병장들의 이름이 나오면서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압수된 이몽학의 문서에 기록된 김 · 최 · 홍씨 성의 사람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의병장들이 연루되기 시작했다. 도원수 권율이 김 · 최 · 홍이 누구냐고 묻자 한현은 ‘김덕령 · 최담령 · 홍계남’ 이라고 대답했다. 나아가 의병장 곽재우와 고언백도 모두 자신의 심복이라고 대답했다.
김덕령은 이몽학 군을 토벌하라는 권율의 명령에 따라 경상도 진주에서 전라도 운봉까지 왔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틈에 광주에 다녀오려고 권율에게 휴가를 신청했으나 도리어 체포되어 진주옥에 갇혔다. 서울로 압송된 김덕령은 8월 초 선조의 친국을 받게 된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상이 일렀다.
“김덕령을 따로 가두어두었는가?”
“사가 한 칸에 가두었습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별처에 가두어두고 병조로 하여금 실한 군사를 더 배정하여 수직하게 해야 할 것이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여러 역적들이 도착한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상이 일렀다.
“옛적부터 역적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본 다음에야 다스린 것은 아니다.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 수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윤두수가 아뢰었다.
“이와 같이 큰 옥사는 비록 뒷날까지 기다리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니 우선 오늘 문초해야 합니다.”
이기와 유영경이 아뢰었다.
“이는 성상께서 재량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만 옥사의 사체로 말하건대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면 우선 후일을 기다렸다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상이 일렀다.
“최담령을 신속히 잡아와야 되니 즉각 선전관을 내보내라.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이빈이 그를 절제하는 장수인데도 또한 죽이려고 했다니 그 죄 역시 크다. 김덕령을 수직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긴밀하게 하라. 자진(자살)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선조는 김덕령을 당장 형신하려고 했으나 유성룡이 다른 역적들이 모두 도착한 다음에 해야 한다면 말린 것이다. 형신에는 가혹한 고문이 따라 웬만한 장사도 한두 차례 고문으로 죽기 일쑤였다. 유성룡은 관련 인물들을 모두 조사해 김덕령의 유 · 무죄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관련 인물들을 조사하면 김덕령의 무고가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선조가 알고 싶은 것은 김덕령의 유 · 무죄 여부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전쟁영웅들을 질시했다. 그는 이런 전쟁영웅들이 올무에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올무에 걸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덕령은 “수백 번의 형장신문에 드디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졌다” 고 《선조수정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숱한 형장을 받았다. 그는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 라고 주청했으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별장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민심은 극도로 분개했다.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남도의 군민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덕령을 죽여버린 이 사건은 전쟁영웅 죽이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김덕령을 죽인 선조의 칼끝은 이제 다른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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