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서애 유성룡 - 9장 - 강화 회담

구름위 2013. 5. 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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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에서 대패하고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다급해졌다. 마음대로 서울 근교를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으므로 자칫하면 한양성에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다. 조명연합군 본대가 남하하고 사방에서 의병이 봉기한다면 한양성은 공동묘지가 될 판국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조선과 명에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강화를 거부했으나 명군 총사령관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은 재빠르게 강화회담에 응했다. 일본에서는 소서행장이 대표로 나섰는데, 문제는 두 대표 모두 본국의 훈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명나라의 주요 요구는 대략 세 가지였다.

 

☞ 일본은 점령지를 전부 반환할 것
☞ 포로로 잡힌 임해군 · 순화군 등 두 왕자와 조선 고관들을 석방할 것
☞ 풍신수길이 사과할 것

 

그 대가로 명나라는 풍신수길을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명나라 점령을 꿈꾸는 풍신수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선에 나와 있는 송응창과 이여송, 소서행장이 모두 본국을 속여서라도 협상을 타결 짓기로 마음먹으면서 회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명군의 속셈을 간파한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화친은 부당한 계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미 화친 쪽으로 마음이 기운 이여송은 유성룡을 비롯한 조선 측의 강력한 반대가 협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유격 척금과 전세정을 동파로 보내 유성룡을 설득했다. 유성룡이 완강히 거절하자 전세정이 화를 내며 따졌다.

 

“그렇다면 그대 나라의 국왕은 어찌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소?”

 

유성룡은 흥분하지 않았다.

 

“수도를 옮기는 것도 나라를 보존하는 한 방법이오.”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다시 서신을 보냈다.

 

“이제 종묘는 불타버렸고, 왕릉은 파헤쳐졌으니,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될 것이다. 수치를 안고 원한을 풀어 적들과 함께 살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공격하다가 노야의 법에 저촉되어 죽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파헤쳐진 왕릉이란 선릉과 정릉을 뜻한다. 유성룡은 두 능이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재상들과 만월대에 올라 망곡한 터였다. 그러나 두 나라는 조선을 제쳐두고 강화회담을 강행했다. 서울 용산에서 1차 회담을 진행한 데 이어 선조 26년(1593) 5월에는 일본의 나고야성에서 2차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때 풍신수길이 명나라에 전한 국서는 명나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 명나라 공주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 명은 일본과 교역할 것
☞ 명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서약할 것
☞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줄 것
☞ 조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삼을 것
☞ 작년에 생포한 두 왕자는 반환할 것
☞ 조선왕과 대신은 앞으로 변심하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서약할 것

 

명나라의 요구와 풍신수길의 요구 사이의 접점은 ‘두 왕자의 반환’ 뿐이었다. 이런 국서를 가지고 돌아가면 크게 곤욕을 치를 것으로 생각한 명나라 심유경은 풍신수길의 국서를 변조했다. 그래서 풍신수길의 국서는 자신의 일본 국왕 책봉을 요청하는 국서로 바뀌게 된다. 명의 요구사항은 모두 들어준다는 내용이었다. 소서행장의 부하 소서여안(고니시 죠안)이 변조된 국서를 명나라 신종에게 바치자 신종이 힐문했다.

 

“왜 일본군이 아직도 조선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가?”

 

“조선에 남아 있는 군사는 즉시 철수시키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명나라 조정은 환호했으나 이는 소서여안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두 나라 조정을 속여 가며 진행한 강화회담은 이후 전쟁 종결에 큰 장애물이 된다.

 

두 나라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갑자기 강경 주전론자로 돌변했다. 도주하기 바빴던 그는 갑자기 강경주전론자가 되어 전투를 독려했다. 선조는 재위 26년(1593) 3월 7일 숙천의 숙녕관에서 이여송을 직접 만났다. 이때 선조가, “우리나라가 양초(식량과 말먹이)를 이어대지 못하여 대인으로 하여금 밖에서 오랫동안 노고를 치르게 하였으니, 지은 죄가 실로 많소” 라고 말하자 이여송은 “전번에 양초를 이어대지 못하여 군사가 후퇴할 수밖에 없어 끝내 왜적을 다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현왕(선조)을 뵙기에 무척 부끄럽습니다” 라고 답했다. 군량 부족이 왜적을 다 섬멸하지 못한 이유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이여송은 선조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번 걸음에 나의 군병이 3만여 명인데, 후속 군병이 또 5만이 올 것이고, 군량도 14만 석이 벌써 운반되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적추(일본군 우두머리)를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왕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현왕께서 만약 왕자를 되찾고 싶으시다면 강화해야 되겠지만 반드시 정벌하시겠다면 마땅히 진격하여 토벌해야 할 것입니다.”

 

강화를 해서 두 왕자를 되찾을지, 전쟁을 계속할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26년 3월 7일

상이 말했다.

 

“왜적은 우리나라의 신민이 만세를 두고라도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므로 죽기를 다할 뿐, 강화하지 않을 것이오.”

 

제독이 말했다.

 

“평양 싸움에 진격까지 한 내가 이제 와서 어찌 그들과 강화하려 하겠습니까. 경략께 이 뜻을 간곡히 말씀하십시오.”

 

자신은 싸우려고 하지만 경략 송응창이 강화하려고 하므로 그에게 말하라고 한 것인데, 이는 이여송의 단골 수법이었다. 이여송은 3월 23일 평양 대동관에서 선조를 다시 만났을 때도 큰소리쳤지만 내용은 강화하라는 권유였다.

 

“당신 나라(조선)가 반드시 원수를 갚고 싶다면 진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진격하여 다 섬멸하지 못하고 행여 반이라도 남겨둔다면 몇 년 안 되어 반드시 다시 군사를 이끌고 올 텐데, 당신 나라가 그때마다 천조(명나라)에 청병할 수 있겠소. 그러나 국왕이 만약 반드시 진격하여 토벌하고자 한다면 진격하겠소.”

 

자신의 호언대로 진격해서 토벌하면 끝나는 전쟁을 이여송은 말로만 ‘진격’ 운운하면서 강화에 응하라고 권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본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선조는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가등청정은 조선의 반을 떼어달라는 할지론을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 국왕이 둘이 되는 셈이니 선조는 강화할 수 없었다. 선조가 눈물을 머금고 “이 적이 남의 종사를 인멸하고 선대의 무덤을 파헤쳤으니, 만약 이 원수를 갚는다면 만 번 죽은들 무슨 후회가 있겠소” 라고 말하자 이여송은 이렇게 답했다.

 

“이미 국왕의 뜻을 이해하였으나, 전곡을 아끼고 장사를 보전하라는 것 역시 성상(명나라 신종)의 뜻이오. 그리고 나도 남에게 제재를 받고 있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경략에게 자문을 띄워야겠소.”

 

이여송은 경략 송응창의 명령이라며 군사를 진군시키지 않았고, 송응창은 선조가 면담을 요청했는데도 거부하고 있었다. 잘 짜인 각본이었다. 이여송은 일본군을 서울에서 철수시키고 자신이 귀환하는 것을 최고의 계책으로 삼았다. 명 조정의 목표는 일본군의 조선전역 철수였으나 이여송의 목표는 일본군의 서울 철수였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강화회담이 아니라 전투를 통해 서울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투를 벌여 서울을 탈환하면 일본군은 극도로 사기가 전하되는 반면 전국의 조선군과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할 것이고, 이는 전쟁을 승리로 종결짓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었다.

 

유성룡은 선조 26년(1593) 2월 26일의 치계에서 서울 공략 계획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신은 재차 권율을 독려하여 돌아가 행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싶었으나 목책과 영루가 모두 타버려 군사들이 웅거할 고이 없어 부득이 임시로 파주 뒷산에 머물러 이빈 · 고언백 등에게 고기비늘처럼 진을 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임진강 이남 지역을 굳게 지키는 한편 기회를 보아 서울의 동서를 습격하여 공취할 계획입니다.”

 

또한 유성룡은 선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여러 왜적들이 합세하기 전, 우리 측의 군량이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을 때 대군을 다시 전진시킨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도 잇따라 중신을 보내 지성으로 간청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소서.”

 

명군만 움직이면 서울을 탈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명군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3월 4일에 올린 보고는 서울을 눈앞에 두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잘 말해준다.

 

“명군이 개성으로 퇴주한 뒤부터 서울이 지척인데도 아직까지 수복하지 못하니 통분하여 죽고 싶습니다. … 마침 행주의 싸움에서 우리 군대가 큰 승리를 거두어 적군의 기세가 더욱 꺾였으므로 참으로 기회를 탈 수 있었습니다. … 연일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명장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으나, 만전을 기하여 출병하여야 한다는 말만 하고 진병하려 들지 않으니 더욱 마음 아프고 민망합니다. 적의 형세가 대체로 쇠퇴해졌으므로 우리 군대가 진영을 연결하여 점점 죄어들어가 형세를 크게 떨치는 한편, 정예군을 나누어 보내 곳곳에서 공격하여 적을 뒤흔들어 불안하게 만든다면 반드시 성을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유성룡의 보고는 정확했다. 조명연합군의 상황과 일본군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현실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해 3월 9일 비변사의 장계가 이를 말해준다.

 

《선조실록》 26년 3월 9일

비변사가 아뢰었다.

 

“도체찰사 유성룡의 장계를 보니, 적을 토벌하는 형세를 의논한 것이 극히 소상하고, 또 모두 형편에 잘 맞습니다. 이런 계획을 다 시행할 것 같으면 흉적들은 격파할 것도 못 됩니다. … 그러나 명장이 들어 줄지의 여부는 모를 일인데 경략이 근일 여기에 도착한다고 하니 간곡히 진술하여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러면서 비변사는 군령을 유성룡에게 통일시켜달라고 건의했다.

 

“심수경이 비록 건의 대장으로 의병을 절제하라는 명령을 받들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먼 곳에 있어 그 호령이 번번이 기회에 맞기를 기필할 수 없으니, 서울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은 유성룡이 함께 절제하도록 명하소서.”

 

서울 근교의 의병은 유성룡에게 명령권을 주어 서울을 탈환하도록 하자는 건의였다. 그러나 선조의 생각은 달랐다.

 

“조정은 이미 심수경에게 의병을 절제케 하였는데, 이제 또 유성룡으로 하여금 절제케 한다면 호령이 온당치 못할 듯하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군권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선조에게 유성룡은 여전히 정적(政敵)이었다. 파천과 요동내부에 반대한 주전론자인 데다 군사전략에도 능한 유성룡을 백성들은 물론 비변사까지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엉뚱한 일을 꼬투리 잡아 유성룡을 공격했다. 유성룡은 선조 26년(1593) 3월 27일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에 관한 정보를 보고했다. 조선인 역관 김선경이 입수한 명의 심유경과 소서행장 · 가등청정의 대화내용을 토대로 양측 모두 강화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단순한 정보보고에 선조는 엉뚱하게 대응했다.

 

“유성룡의 사람됨은 내가 자세히 아는데 적을 헤아려 승리로 이끌어가는 것은 그의 장기가 아니다. 처음에 군량을 담당하는 대신으로서 곤외(장수)의 직임을 전보받았는데, 요사이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한 나라의 곤수가 되어 강화한다는 말을 듣고 한 번도 적을 치고 원수를 갚자고 언급하거나 명장 앞에서 머리를 부수며 쟁변하는 일이 전혀 없고 강화의 말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임무를 받은 뒤로 한 번도 기이한 계책을 세워 적을 격파한 적이 없으니 아마도 끝내는 실패할 듯하다. 나의 생각에는 권율 · 고언백 · 조호익 등 몇몇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이 족할 듯하다. … 싸움에 임하여 장수를 바꾸는 일의 염려스러움은 말하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다.”

 

유성룡의 도체찰사 직을 박탈하겠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단 한번도 강화를 주장한 적이 없다. 강화는커녕 선조가 도주하느라 바쁠 때 몇 차례나 결전하자고 주장한 주전론자였다. 이번 보고 내용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보고지 강화해야 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첨부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유성룡은 오히려 명나라에 합동 군사작전을 펼쳐 서울을 탈환하자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선조 26년(1593) 3월, 유성룡은 「유격 왕필적에게 답하는 글」 에서 이렇게 건의했다.

 

“적은 서울에 웅거한 뒤에 험한 것만 믿고 그 뒤를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한강 이남부터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연로에 왕래하고 있는 좌우의 고을에 우리 군대가 있으니, 만일 중국 군사가 강화로 해서 남쪽으로 나와 불시를 틈타서 단번에 공격해 적의 머리와 꼬리를 단절하면 서울에 있는 적은 비록 쇠붙이로 성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형세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군이 강화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조선군과 서울 남부를 끊으면 뱀의 머리와 꼬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형국이 되리라는 뜻이다.

 

“지금 충청도 수군절도사 정걸 · 경기 수군절도사 이빈 · 의병장 김천일이 각각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를 따라 한강의 하류로 진군해서 용산의 적을 맞아 진로를 끊으니, 적의 형세가 이미 위축되었습니다. 중국 군사는 배를 타고 하루 이틀이 못 되어 통진 등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쪽 지방이 조금 넉넉하며 군량도 쉽게 얻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잃어서는 안 될 좋은 기회입니다.”

 

일본군은 명군이 북쪽에 있는 줄만 알고 있다가 갑자기 남쪽에 나타나서 공격할 경우 당황해서 대응하지 못할 것이란 주장이다. 유성룡은 이 전략의 성공을 확신했다.

 

“삼가 바라건대, 이 일을 극력 주장하시어 의심 없이 계책을 결정하시면 며칠이 못 되어 큰 공을 이룰 것입니다. … 비유컨대 병든 사람이 조금이라도 원기가 있을 때는 약을 쓰더라도 효력이 있지만, 원기가 다하면 비록 만금의 좋은 약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도 오늘에 달려 있고 망하지 않는 것도 오늘에 달려 있으니, 뒷날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유성룡이 주장하는 서울 공격 시기는 바로 그때, 선조가 유성룡을 체직시키려고 하는 1593년 3월이었다. 비변사는 유성룡이 강화론자가 아니라 주전론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조는 도주에 급급했던 자신의 전력을 주전론자 유성룡을 강화론자로 몰아 제거함으로써 씻으려 한 것이다.

 

비변사에서 유성룡의 체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체찰사 유성룡이 … 강화의논에 쟁변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창졸간에 일어나 그랬을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 일로 대신의 병권을 가벼이 체직한다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더구나 서울과 경기의 백성들은 날마다 관군이 구제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불의에 체직한다면 불안과 실망이 전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비변사의 체직 반대 이유는 문제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백성들은 이미 선조를 버린 지 오래였다. 백성들이 믿는 사람은 선조가 아니라 유성룡이고, 권율이고, 이순신이다. 비변사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판국에 유성룡을 체직시킬 수는 없었다. 선조의 계획은 비변사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명군과 협상을 통해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고 그해 4월 서울에서 철수했다. 유성룡은 4월 20일 조명연합군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근 1년 만의 귀경이나 전투를 해서 되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 무렵 유성룡은 명군 장수들과 강화문제 때문에 자주 충돌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파주에서 부딪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기패를 앞세우고 남하하던 명군은 유성룡에게 고두례(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를 행하라고 요구했다. 기(旗)는 명나라의 국기이며, 패(牌)는 경략 송응창의 명령서인데, 모두 황제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조선 신하는 고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거절했다.

 

“기패에 고두례를 올리는 것은 감히 사양할 수 없으나 이것은 단지 적중(賊中)으로 가는 기패인데 우리들이 어떻게 먼저 고두례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일본과 강화하러 가는 기패이므로 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자 참장 주홍모 등이 크게 성을 내며 재촉했다. 유성룡은 끝내 들어가지 않고 다투면서 패문을 먼저 보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송응창이 준 패문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구절이 있었다.

‘만일 적에게 보복을 가하여 사건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하겠다.’

 

유성룡은 분개했다.

 

“이 패문은 우리 병사들로 하여금 왜적을 죽이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 명을 받을 수 없다.”

유성룡은 조선의 장수들과 함께 그 부당성을 역설했다.

 

“우리나라가 만약 왜노와 강화하려고 했다면 오늘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초 왜노가 우리나라에 강화를 요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그러나 우리나라는 왜노가 중국에게 불공한 말을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천하의 대의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치욕을 당하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왜적은 종묘와 사직을 불태웠고 능침을 파헤쳤으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여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패문으로 다시 복수를 못하게 금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백성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해서 명령을 받을 수 없는 이유다.”

 

유성룡은 송응창의 패문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종묘에 나가 통곡하고, 이여송에게 가서 군대를 내어 적을 추격하도록 요청했다. 이여송은 한강에 배가 없어서 추격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이여송의 그간 행태로 이런 핑계를 예상한 유성룡은 이미 경기 좌감사 성영과 수사 이빈에게 적이 후퇴하는 즉시 한강에 있는 배를 모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한강에는 80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유성룡이 배가 준비되었다고 말하자 이여송은 할 수 없이 동생인 영장 이여백을 파견했다. 이여백은 군사 만여 명을 인솔하고 한강을 반쯤 건너다가 갑자기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되돌아왔다.

 

유성룡은 1년 간 서울을 유린한 일본군이 꽃놀이왔다가 돌아가듯이 후퇴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도체찰사의 권한으로 조선의 여러 장수들에게 일본군 격살을 명했다. 고언백 · 이시언 · 김응서 등은 동쪽으로 강을 건너 이천 부사 변응성과 합세하게 하고, 권율 · 이빈 등은 서쪽으로 강을 건너 전라 병사 선거이와 경기 좌도의 관군 · 의병과 합세해 일본군을 습격하라고 명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모든 고을에도 통문(通文)을 돌려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조선군을 저지하고 심지어 이빈 등 여러 장수들을 구금했다. 이시언 · 정희현 · 변응성 등은 샛길을 따라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나머지는 명군의 제지를 받아 눈물을 삼켜야 했다.

 

분통 터지는 일이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심상했기 때문인지 유성룡은 4월 23일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6월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사이 여러 차례 사경을 헤맸다.

 

경략 송응창은 선조의 면담 요청을 계속 거부해왔다. 강화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조의 면담 요청에 응한 것은 선조 26년 6월 5일 안주의 안흥관에서였다. 상견례가 끝나자 송응창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선조실록》 26년 6월 5일

경략이 말했다.

 

“제독의 보첩에 의하면 귀국이 부산을 분할하여 왜적에게 내주고 또 계패(경계를 표시하는 팻말)까지 세웠다던데 사실입니까?”

 

상이 말했다.

 

“부산은 동래와 연결된 땅인데 우리나라가 어찌 원수 왜적에게 떼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면 마침내 나라가 보존될 리 없으니 우리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그런 것조차 알지 못하겠습니까.”

 

“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부산을 일본에게 주기로 약조한 것이 아니냐는 송응창의 힐난에 선조는 변명하기 급급했다. 선조는 심희수에게, “경략의 의심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듯하니 상세히 변명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라면서 다시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는데, 송응창의 계략에 완전히 말려든 것이다. 송응창은 선조를 강화주범으로 몰고 자신을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선조실록》 26년 6월 5일

경략이 또 말했다.

 

“나는 이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서야 귀국하겠습니다. 왜노가 하루를 떠나지 않으면 나도 하루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제독(이여송)도 철회하지 못할 것이니 왜노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일에 왜노를 죽이지 말라 한 것도 깊은 뜻이 있어서였으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상이 말했다.

 

“감격스럽기 그지없이 무엇이라 사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송응창은 ‘적을 죽이면 참형에 처한다’ 는 자신의 패문도 ‘깊은 뜻’ 에서 나온 것이라며 조선을 배제한 채 진행한 모든 강화회담을 합리화했다. 선조는 한마디도 따지지 못하고 그저 사례를 표하고 나왔다.

 

그러나 송응창의 호언이 허언(虛言)으로 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달 20일 7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 대부대가 진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6월 21일 진주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22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등이 군민들을 이끌고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28일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면서 29일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때 유성룡은 명군에게 진주성을 구원하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명군은 관망만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소서여안이 일본의 납관사 심유경의 안내를 받아 서울을 경유해 명나라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선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할지론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경략 송응창이 명나라 조정을 속이고 있다고 간파했다. 명 조정의 강화조건은 일본군의 전원 철수였으나 송응창은 일본군이 조선 남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쟁을 마치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황진을 주청사로 보내 송응창이 명 조정의 훈령과 달리 행동하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동을 장악한 송응창은 황진이 북경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거듭 사신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송응창은 사신의 북경행을 저지했다.

 

명나라 군대 자체가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싸우지는 않으면서 군량만 축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반이 곤란한 것’ 이라며 조선에 군량을 대달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봉급도 요구했다. 비변사에서는 명군 ‘한 사람당 월급과 월량(식량)으로 은 1냥 5전, 행량(이동 중에 먹을 양식)과 염체대(반찬값)로 은 1냥 5전, 의화대(옷과 신발)로 3전, 호상(위로비)으로 3전, 도합 3냥 6전을 지급해야 한다’ 고 보고했는데, 이쯤 되면 구원군이 아니라 용병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략 송응창은 무려 2만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겠다고 요청했다.

 

《선조실록》 26년 8월 10일

만약 경략의 말대로 2만 명을 유병(주둔)시킨다면 우리나라는 종묘사직의 제사도 궐하고 상공도 없애고 관원의 녹도 주지 않고 온 나라의 전재를 다 털어 오로지 중국 군사만을 먹인다 할지라도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결코 5천명 이상은 청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렵 대사헌 김응남은 도성 백성들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하루에 죽는 백성이 얼마인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썩은 살점이 냇물을 막고 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도깨비 같은 몰골이 되어 스스로 마침내 다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해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애는 끌고 줄지어 도성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굶어죽고 있는데, 전투를 회피하는 명군은 막대한 식량만 축냈다. 영남 주둔 중국 장수들이 군량이 떨어졌다고 보고하자 격분한 송응창은 호남과 영남의 관량관 조신도와 임발영을 잡아가기도 했다.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은 명군의 횡포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중국 군사가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행패를 부리며 작란하는 작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쇄마(관용말 이용비)를 요구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겁을 줍니다. 수령 이하 사람들은 목을 매어 끌고 다니기까지 하는데 주포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의 노여움을 풀 수가 없으며 군량도 외람되이 받아다가 매매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을 조금만 거역하면 몽둥이와 돌멩이로 무수히 난타당하는데, 요즈음 맞아 죽은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밖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형상은 하도 비참하여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유성룡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조선의 군사력을 기르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훈련도감 설치안이다.

 

명군이 전투는 거부하고 식량은 한없이 축내면서도 큰소리친 것은 조선에 군사가 없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강력한 중앙군이 없었다. 형식상 오위가 있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그래서 정예군사들로 구성된 훈련도감 설치안이 나온 것이다. 훈련도감 설치는 누구의 구상일까? 《선조실록》은 국왕 선조인 것처럼 기록했다.

 

《선조실록》 26년 8월 19일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오늘의 적세가 매우 염려되는데 전부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완되어 적의 난리를 겪는 2년 동안 군사 한 명을 훈련시키거나 기계 하나를 수리한 것 없이, 중국군만을 바라보며 적이 제 발로 물러가기 만을 기다렸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전일에 군대를 훈련시키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말이 시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세월만 보내면서 망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산릉도감도 이미 일이 다 끝났으니 내 생각에는 따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합당한 인원을 차출해 장정을 뽑아 날마다 활을 익히기도 하고 포를 쏘기도 하여 모든 무예를 훈련시키도록 하고 싶으니, 의논하여 처리하라.”

 

‘내 생각에는 따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라고 써서 마치 선조가 훈련도감을 처음 설치하자고 제안한 것처럼 기록돼 있다. 도굴된 선릉 등을 재정비하는 산릉도감 역사가 끝났으니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는 식이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훈련도감 사목(세부 규칙)의 세세한 사항까지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옛날 척계광(명나라 장수)이 군사를 가르칠 적에 그 방법이 매우 많았으나,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달리도록 하고 그 모래의 무게를 점점 높이는 것으로 상규를 삼았다” 라고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는 식이다.

 

이런 기록들에 따르면 훈련도감의 설치를 제안하고 주조한 인물은 여지없이 선조다. 《선조실록》은 또 훈련도감의 총책임자인 훈련도감 제조가 훈련절목에 대해 보고한 내용을 싣고 있다.

 

《선조실록》 26년 10월 6일

훈련도감 제조가 아뢰었다.

 

“훈련절목은 《기효신서(척계광의 병법서)》란 책에 지극히 자세하고도 세밀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 일체를 그대로 본떠야 합니다. 다만 그 책의 글과 기계의 명칭에 알기 어려운 데가 있으니 이번에 중국군이 돌아가기 전에 총민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방면으로 따지고 질문하게 하여 환히 의심스러운 데가 없게 된 다음에야 훈련하여 익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일찍이 듣건대, 고려 때 송나라의 상인 이원이 재상 최무선의 종의 집에 와서 머물게 되자 최무선이 매우 후대하면서 이로 인하여 염초로 화약 만드는 방법을 배웠는데, 우리나라에 화약이 있게 된 것은 최무선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 난방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모였으니 그중에는 군사학을 잘 알고 식견과 생각이 해박한 사람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은정으로 접대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아 우리에게 전수해준다면 뒷날에 유익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훈련도감 제조가 훈련도감에서 사용할 교재로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선정하고 명나라 장수 중에 병법에 밝은 인물을 교관으로 초빙해 훈련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기사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훈련도감 제조가 바로 유성룡이다.

 

선조 26년(1593) 10월 설치된 훈련도감의 제조는 유성룡, 유사당상은 이덕형, 대장은 조경이다. 유성룡이 훈련도감 제조까지 맡게 된 것은 훈련도감에 대한 구상부터 설치까지, 대강의 방안부터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은 과거의 군영과는 확연히 달랐다. 과거의 군영과 달리 훈련도감은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하는 직업군인 체제였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의 유성룡 졸기에는 “유성룡은 임진란 후에 임금에게 건의하여 훈련도감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고 적시했다. 《선조실록》도 26년 6월 6일조에는 유성룡이 “중국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진수하며 훈련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을 기록해 비록 ‘훈련도감’ 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유성룡이 훈련도감 설치를 이때 이미 건의했음을 시사해준다.

 

유성룡은 조선은 조선인이 지키는 자주국방체제를 이룩하기 위한 근본대책으로 훈련도감 창설을 고안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 식량만 축내는 명군에 대한 근본대책도 훈련도감을 통한 조선의 군사력 강화밖에 없었다. 명군을 선용하는 길은 그들을 훈련교관으로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명군을 머무르게 하는 일은 반드시 큰 폐단이 되겠으나 적병이 물러가지 않는 한 곤란할 듯싶습니다. … 대저 지금 적을 방어하는 일은 일각이 급하오니 나이 젊고 날쌘 군사를 골라 명장에게 배속시켜, 강남의 기계와 전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마침 낙 참장(낙상지)이 우리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므로 신이 성중에서 70여 명을 모집하였는데, 그중에는 화포를 만드는 장인이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넓은 집을 마련하여 학습하게 하고, 호조에 통지해 왜진에서 버리고 간 쌀을 손질해 100여 섬을 장만해 하루에 2되씩 지급해 굶주림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 이들을 만약 몇 달 안으로 가르쳐 재주를 이루게 하면 각 도로 나누어 보내서 지방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니, 이익이 무궁할 것입니다…

 

신의 병세는 차도는 있으나 원기가 다하여 온종일 땀을 흘리고, 방안에서도 지팡이를 의지해야 일어납니다. 생각건대, 남방의 사세가 대단히 급한데, 도원수 김명원만이 그곳에 있습니다. 만일 기력이 차차 회복되면 병든 몸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겠습니다.

 

병석에 누운 유성룡을 문병 온 명장 낙상지와 대화 중에 싹튼 생각이 훈련도감이다. 유성룡은 골칫거리로 변한 명나라 군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그들의 군사지식과 최신 무기 제조법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에 쌀 두 되씩을 주는 조건으로 군사를 모집해서 훈련시키고 그런 다음 이들을 전국으로 나누어 보내 지방 군사들도 훈련시키려 했다.

 

요즈음 낙 참장이 신의 병고를 듣고 매양 역관을 보내 문병하고, 또한 우리나라의 당면 문제에 대하여 무척 성의 있게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대요는 이런 내용입니다.

 

“명군이 돌아가고 적이 다시 침입한다면, 당신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막겠는가. 남병(중국 남쪽 병사)들이 돌아가기 전에 서둘러 훈련해 배워 익히고 화포 · 낭선(끝에 칼이 달린 창) · 장창 그리고 칼 쓰는 법과 조총 등 병기의 사용법을 낱낱이 익혀서 한 사람이 열을, 열 사람이 백을, 백 사람이 천을 잇따라 가르칩니다. 그러면 수년 뒤에는 우수한 병졸이 몇만 명은 되니, 왜적이 다시 침입한다 해도 방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신 나라의 일은 장차 어찌할 수 없소.”

 

그는 말을 매우 많이 했지만, 말끝마다 우리나라를 깊이 염려해서 후환에 대비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으니, 신은 듣고 감격의 눈물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훈련도감은 이처럼 유성룡과 낙상지의 대화 도중 처음 나온 구상이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유성룡이 제안한 사실은 누락한 채 선조의 제안으로 만든 것처럼 기술했다. 유성룡은 《잡저》 「훈련도감」 조에서 자신이 훈련도감을 만든 경위를 기술했다.

 

《잡저》

이때(선조 26년 10월)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하시고, 나를 도제조로 삼았다. 나는 이렇게 청했다.

 

“당속미 1천 석을 꺼내 양식으로 하되 하루 한 사람에게 두 되씩 준다고 군인을 모집하면 응모하는 자가 사방에서 모여들 것입니다.”

 

유성룡의 예견대로 응모자가 쇄도해 대장 조경은 시험을 봐야 했다. 《만기요람》 「훈련도감」 조는 “유성룡이 모집에 응하려는 자는 큰 돌을 들고 한 길 이상 되는 담을 뛰어넘는 자라야 입대를 허가하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게 되어, 파총과 초관을 두어 이를 영솔하게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유성룡은 “어떤 사람은 도감문 밖에서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하다 쓰러져 굶어죽은 자도 있었다” 고 기록했다. 유성룡은 또 “무릇 행차의 거둥이 있을 때는 이들로 호위하니, 민심이 차츰 믿게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포수 · 살수 · 사수의 삼수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은 조선군의 전력을 크게 높였다. 유성룡은 선조 28년(1595)의 한 계사에 훈련도감 훈련 규칙을 기록하기도 했다. 훈련도감의 유사당상은 매일 한두 부대를 대상으로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이 끝나면 전 부대를 대상으로 합격자의 다과를 기준으로 상벌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관들은 다른 부대에 뒤지지 않게 밤낮으로 훈련에 열중했고 정예군사가 된 것이다. 이런 일상적인 훈련을 통해 훈련도감은 조선 제일의 강군이 되어갔다. 훈련도감이 강화되는 만큼 명군에 대한 조선의 예속은 약화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자주국방의 근본방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