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6년(1593) 6월, 유성룡은 병이 조금 낫자 군사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영남지역으로 내려갔다. 이때 유성룡은 전후 처음으로 고향 안동에 들렀다. 형 유운룡이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신했다가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임란 이후 처음 만나는 어머니이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과 원지 정사는 작년 7월 일본군이 안동에 들어오면서 불타 없어졌다. 수많은 서적도 함께 불탔는데, 웬일인지 《양명집》 몇 권은 온전했다.
《양명집》 뒤에 쓰다
임진년 7월에 왜국가 안동에 들어와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에 간직해둔 서적은 모두 없어져버렸는데, 오직 이 몇 권만이 수풀 사이에 있어 온전하였다.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행장과 함께 가지고 제천에 도착하여 사실의 대강을 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여 다시는 유실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이때 양명학 서적을 다시 보고 ‘불각 중에 눈물’ 을 흘렸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양명집》을 처음 접한 때부터 35년이 흘렀다. 유성룡은 《양명집》을 처음 본 순간의 흥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역시 놀라운 주장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전습록》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지만물로 일체를 삼으니 온 세상의 사람에 대해 내외원근의 구별을 두지 않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친자식으로 여기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가르치고 부양하고 그 만물일체의 생각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다.
《대학문》
대인(大人)은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 자다. 그는 천하를 일가(一家)같이 여긴다. … 대인이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인(仁)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됨은 어찌 대인만이 그러하겠는가? 비록 소인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소인은 스스로 그 마음을 작게 할 뿐이다.
성인이나 대인은 모두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 귀천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글들에서 유성룡은 망국 직전의 나라를 되살리는 중요한 계시를 얻었다. 임진왜란으로 이미 과거의 조선은 멸망했다. 양반 사대부만이 특권을 독점하던 조선은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울 때 이미 불타버린 것이다. 궁궐을 불태운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불러 모으지 않으면 조선이란 나라는 재건될 수 없었다.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개국정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도전과 조광조가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하고, 이이가 공납의 폐단을 혁신하고 천민들도 군사로 종군시켜 면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성룡이 영남으로 내려간 직후 선조는 서둘러 올라오라고 전교했다.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병이 차도가 있으면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하였는데, 그곳에는 이미 도원수 등 여러 장수가 있으니 풍원 부원군이 남쪽으로 가더라도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곳으로 불러 올라오게 하려는데 비변사에게 이를 물어보라.”
비변사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비변사는 전략 · 전술에 능한 유성룡이 꼭 필요했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수하 군사들에게 이런 전술을 지시한 적이 있다.
“창릉과 경릉(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사이에 매복하여, 각각 자기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적군을 초격(抄擊)하되, 적병이 많이 나오면 피하여 싸우지 말고, 조금 나오면 곳곳에서 맞아 치게 하였더니, 이로부터 적군은 성 밖으로 나와서 땔나무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말이 수없이 죽었다.”
이는 유격전의 천재라 부르는 모택동의 16자결과 그 원리가 같다. 모택동의 16자결은 적진아퇴, 적주아요, 적피아타, 적퇴아박으로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후퇴하고, 적이 주둔해 있으면 우리는 교란시키고,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하는 전술이다. 모택동보다 350여 년 전에 조선의 문신 유성룡은 유격전술의 핵심을 이미 꿰고 있던 것이다. 선조는 8월 6일 승정원에 전교해 유성룡을 부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가 유성룡을 다시 부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경략 송응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투보다는 모사에 능한 경략 송응창은 선조가 계속 강화를 반대하자 선조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세자 광해군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송응창은 광해군에게 영남 · 호남 · 호서의 하삼도를 맡기라는 ‘하삼도 경리안’ 을 요구했다.
“지금 듣건대 왕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 영웅의 풍채에 위인의 기상으로 준수하고 온화하며 어린 나이지만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니, 제 생각에는 나라의 기업을 새로 회복하는 이때에 광해군으로 하여금 전라 · 경상 · 충청도를 차례로 순찰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그의 결재를 받도록 하여 군병을 선발할 때 반드시 친히 검열하게 하면 연약한 자가 감히 끌려와서 섞이지 않을 것이며, 성지(城地)를 수리하거나 설치할 때 반드시 친히 답사하게 하면 공인(工人)과 재목을 모으는 자가 감히 게을리 못할 것이며…”
세자 광해군에게 하삼도를 맡기라는 요구다. 선조는 이것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시도라고 여겼다. 그는 이에 맞서 전가의 보고를 꺼내들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을 약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다. 전일 옥당에 내린 비답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 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 지금은 흉적이 물러갔고 옛 강토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가 강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것이다. 이 비망기에서 선조는 광병 · 목병 · 비병 · 습병 · 풍병 · 한병 등 온갖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이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조정은 또 한 번 소모적 정치놀음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영중추부사 심수경 · 좌의정 윤두수 · 우의정 유홍이 2품 이상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 광해군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곧바로 예궐하여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명을 환수하도록 요청해야 했다.
선조는 물론 신하들도 송응창의 요구가 강화에 반대하는 선조의 기세를 꺾기 위한 술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절충안을 마련했다. 세자가 병이 있어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윤근수는 기고 장구경에게 세자가 위증과 담증을 앓아 하삼도로 내려갈 수 없으니 경략 송응창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구경은 간단하게 답했다.
“만약 병이 다 나았다면 가야 되지만, 아직 다 낫지 않았다면 능력 있는 배신을 먼저 보내고 세자는 병이 다 나은 뒤에 가시오.”
광해군이 내려가는 것이 그리 급하지 않다는 뜻이다. 선조는 안도했지만 당장 선위령을 철수할 수는 없었다. 선조는 계속 선위를 고집했고, 그때마다 광해군과 대신들은 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했다. 결말이 뻔히 예상되는 지루한 실랑이 끝에 선조는 9월 8일 드디어 선위 명령을 거두겠다고 선언했다.
이때는 선위소동으로 지새울 때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굶어죽고 있었고, 명군은 일본군을 조선 남부에 방치한 채 손을 놓고 있었다. 선조 26년(1593) 9월 24일,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은 유병군 1만 6천여 명을 남겨놓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전투는 거부하며 군량만 낭비하는 1만 6천여 명의 명군이 혹처럼 존재했다. 조선군의 단독 역량으로는 일본군을 몰아낼 수 없으니 명군에게 철수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10월 1일 아침 벽제역을 출발하여 미륵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정릉동 행궁(덕수궁)으로 들어갔다.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지 1년 반, 조명연합군이 서울에 입성한 지 무려 6개월 만이었다.
환도 다음 날 선조는 영의정 최흥원을 꾸짖는 전교를 내렸다. 자신이 입성할 때 기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곡식을 들여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성룡의 「훈련도감」 조는 선조가 귀경하던 날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계사년(선조 26년)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다 남은 너저분한 것들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다가 길가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서로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니, 냄새가 지독하고 더러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먹어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덩어리가 낭자하였다.
상이 용산창에 거둥하시어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방민(坊民)에게 흩어주었는데, 곡식은 적고 백성은 많으므로 겨우 한 줌의 곡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어공미를 삭감하여 구휼하기 위해 동 · 서에 진제장을 설치했으나 겨우 만분의 일도 구제하지 못했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비겁한 임금이 아니라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귀환한 자비로운 임금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어긋났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유성룡을 복귀시켜야만 했다. 경략 송응창은 자신을 흔들고 있었고, 비변사 역시 도주에 급급했던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광해군에게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유성룡은 때로 정적같이 느껴졌지만 자신을 버리고 광해군에게 붙을 무원칙한 인물은 아니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유성룡은 사직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성룡도 운명이라고 여겼다. 국난 극복의 책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이런 점에서 고향에서 《양명집》을 보고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방안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조 26년(1593) 10월 27일, 이렇게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영의정 유성룡의 무게는 다른 인물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도체찰사를 겸하는 영의정 유성룡은 정국을 실제로 주도할 수 있는 역량과 무게가 있는 것이다.
영의정이 되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략 송응창이 계속 세자의 하삼도 경리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선조의 양위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커다란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경략 송응창은 명나라 조정을 움직여 하삼도 경리안을 국서(國書)에도 명시시켰다. 선조는 바짝 긴장했다. 자칫 실제로 양위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선조는 세자가 와병 중이란 이유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세자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선조 스스로 세자의 병세를 언급했을 뿐이다.
“동공이 인후증으로 지난 25일 침을 맞았다고 한다. 증세만 이럴 뿐이 아니라 원기가 이미 약해졌기 때문에 이런 겨울철에 내가 차마 남쪽으로 보낼 수가 없다. 지난번 자문(세자를 남으로 보내라는 신종의 국서)을 보고서는 혼자서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국사가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사생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동궁은 내려가더라도 일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호령(號令)을 시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더라도 별로 하는 일이 없다. 내 생각은 내가 세자를 대신하여 남쪽에 내려가 전주 근처에 주차하여 제반 일을 책응(策應)하고, 일대의 형편을 보아 호남 백성들을 진무하다가 사세를 보아서 돌아오고 싶다. 의논해서 아뢰라.”
세자 대신 자신이 내려가겠다는 대답이었다. 자칫 세자를 내려 보냈다가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한 것이다. 유성룡은 선조도, 세자도 내려가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다.
“송 경략에게는 ‘세자가 병이 있지만 병을 무릅쓰고 해주에서 내려오고 있다’ 고 답하고, 세자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서울로 돌아와 사세를 보아 가면서 점차 내려가도록 도모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 고 곧바로 재가했다. 자신은 물론 세자도 내려보내고 싶지 않은 속내와 같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경략 송응창과 조선의 대결이라고 판단했다. 송응창이 조선 내부를 분열시켜 일본과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평소 자신에게 포의적인 총병 척금을 만나 사태를 해결해보라고 지시했다. 유성룡은 척금을 만나 전황을 설명했다.
“왜적이 바닷가에 둔취해 있는데도 이 사정을 중국 조정에 주달하기 어렵습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 주둔해 있는데도 송응창이 모두 철수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으니 사실을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척금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매우 옳소. 다만 송 경략이 이미 조정에 그런 식으로 보고 했으니 그의 몸이 죽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어찌 언어로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척금은, “송 경략 자기의 생사가 달린 일인데 어찌 뜻을 돌릴 수 있겠는가” 라고까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행인 사헌이 사신으로 다시 왔다. 그런데 총병 척금은 사헌이 오는 목적이 ‘광해군과 윤두수에게 3조를 총독하게 해서 군사 훈련을 하게 하는 일’ 이라고 전해주었다. 3조는 ‘병조 · 공조 · 호조’ 로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에게 전쟁을 총괄시키려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략 송응창이 급사중 위학증을 시켜 명 조정에 올리려던 주본이 윤근수를 통해 드러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이 이미 제대로 왜적을 막지 못하여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분할하여 두셋으로 나눈 뒤 왜적을 막아내는 형편을 보아 나라를 맡겨 조치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울타리가 되도록 하소서.”
나라를 두셋으로 나누어 잘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삼자는 것이다. 광해군의 하삼도 경리안이 나라를 둘로 가르려는 의도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당황한 선조는 초경(오후 7시~9시)에 편전에서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했다.
《선조실록》 26년 윤11월 12일
상이 유성룡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글 하나를 보이니 유성룡이 아뢰었다.
“이 글이 윤근수가 바친 것입니까? 말이 흉참할 뿐만 아니라 땅을 베어 남에게 주려고까지 한다는 말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상이 일렀다.
“내가 바라던 대로 다 되었다. 오늘 영상(領相)과 더불어 사퇴를 청하겠다. 내가 비록 미혹하기는 하나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았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이처럼 나라 일이 위급할 때에 신과 같은 자가 대신의 자리를 무릅쓰고 차지하고 있으니 먼저 파출하고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을 소환하는 것이 옳습니다.”
상이 일렀다.
“옛말에 ‘영웅이 낭사(헛되이 죽음) 한다’ 더니, 경 같은 학문과 재지(才智)로 불행히도 이런 때에 나왔다…”
“오늘 영상과 더불어 사퇴를 청하겠다” 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유성룡을 끌어들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유성룡이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모두 신의 죄입니다” 라고 말하자 선조가 이렇게 답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 않다. 옛사람 중에도 자사(子思)가 위(衛)나라에 있었으나 위나라의 영토가 깎이고 쇠약해짐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제갈공명도 제대로 한실을 흥복시키지 못하였다. 어찌 일률적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선조수정실록》은 또 유성룡이 선조가 명 사신 앞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절대 표하지 말라고 적극 당부했다고 적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6년 11월 1일
한 주발의 술을 하사해 마시도록 일렀다.
“이것으로 서로 결별한다. 내일은 내가 명나라 사신 앞에서 사위할 것이다.”
유성룡이 울면서 아뢰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우리나라가 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칙지에 권면하고 책려한다는 뜻이 아닌 것이 없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동요하지 마소서. 내일은 정말 그와 같이 해서는 안 되니 부디 참작하소서.”
상이 답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은 “또 참소하는 말이 있어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 유언비어를 퍼뜨려 중국 조정에서 의문을 갖고 이간하게 하였다’ 했으니 상 역시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라고 부기했다. 선조를 사퇴시키려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선조는 유성룡이 광해군 편에 서면 자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 선조가 최선의 임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성룡은 지금 선조를 사퇴시킬 경우 국가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광해군이 즉위하면 ‘선왕파’ 와 ‘현왕파’ 로 나뉘어 극심한 정쟁이 벌어질 것이다. 경략 송응창이 바라는 게 바로 이것으로 이이제이의 일종이다. 유성룡은 일개 경략의 의도대로 국왕이 물러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은 선조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선조수정실록》 26년 11월 1일
이튿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사신에게 정문(呈文)하여 본국의 사정을 차례로 진술하면서, 왕이 의리를 지키다가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고 잘못한 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다. 유성룡이 또 유격 척금을 통하여 전위하는 일은 매우 불가하다는 점을 은밀히 말하였다. 사신 사헌이 이때부터 상을 대하면서 예의가 상당히 깍듯해졌다.
‘의리를 지키다가 침략을 당하게 된 것’ 이란 말은 명나라를 보호하려다가 전쟁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다. 선조 나이 마흔둘, 물러나서 상왕으로 지내기에는 너무 젊었다. 게다가 재위한 지 26년이나 되는 임금이었다. 성왕 선조를 두고 광해군이 왕 노릇 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선조를 내쫓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것은 파병을 계기로 왕위계승권까지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다. 명 사신 사헌은 유성룡의 능력을 시험해보았다.
《선조실록》 26년 윤11월 15일
“가령 원군 요청을 윤허한다 해도 명나라의 선부 · 대동 · 보정 등에서 징발한 군사가 미처 오기 전에 왜적이 쳐 올라올 텐데, 귀국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유성룡이 글로 써서 답했다.
“명군이 만약 일찍 나오지 않는다면 소방(小邦)에는 다른 방책이 없으니, 살아남은 자를 모아서 죽을 각오로 힘껏 싸워야 할 뿐이다.”
이것 외에 다른 방책은 없었다. ‘죽을 각오로 힘껏 싸우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사헌에게 줄을 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물들이 있었다. 사헌이 선조를 사퇴시킬 것이란 소문이 돌자 그에게 줄을 댄 것이다.
《연보》
하루는 사헌이 집정을 불러 일을 의논하려는데, 선생이 재신 여러 사람과 더불어 들어가니, 사헌이 단독으로 선생을 불러 측근을 물리치고 글을 써서 제시했다.
“당신네 나라에 아무 재신이 일을 주관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오?”
선생이 곧 필답했다.
“이 사람은 저와 한 조정에서 일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난리 중이라 분주한 수고로움은 있으나,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는 바 없습니다.”
사헌이 다시 써서 물었다.
“군자는 편당하지 않는다고 하였거늘 군자도 역시 편당합니까?”
선생은 매우 대답하기가 난처하였으나 곧 답변했다.
“설령 일에 잘잘못이 있다 해도 우리 임금께 말하지 어찌 감히 노야에게 고하겠습니까?”
문제의 본질은 명나라가 파병을 계기로 조선을 실제로 지배하려는 데 있었다. 조정을 둘로 갈라 지배하려는 의도였다. 유성룡은 사헌의 이런 의도를 알아차리고 ‘잘잘못이 있다 해도 우리 임금께 말하지 어찌 노야에게 고하겠습니까’ 라고 물리친 것이다. 이로써 선조의 선위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유성룡은 왕위를 굳건히 한 상태에서 명나라의 광해군 하삼도 경리안도 형식적으로 만족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사신이 서울에 있던 선조 26년(1593) 윤11월 19일 세자를 호남으로 출발시킨 것이다. 선조의 선위와 연관된 하삼도 경리안이면 대단히 소란스러웠겠지만 선조가 건재한 상태이니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체 국사는 선조가 총괄하고, 광해군이 하삼도의 일부 현안을 맡아 처리하는 형식으로 정리된 것이다. 유성룡의 일처리를 지켜본 사헌은 아주 흡족해했다. 그는 선조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선조실록》 26년 윤11월 15일
유성룡 같은 의정은 충성스럽고 남달리 곧으며 인의롭고 독실히 도를 믿으므로 천조의 문관 · 무장이 모두 국왕이 제일 좋은 상신(相臣)을 얻은 것을 경하합니다. 참으로 국정을 들어 이 신하에게 맡긴다면 어찌 국위(國威)를 떨치지 못하고 병기를 드날리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사헌은 유성룡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에도 깊이 감복했다. 사헌이 귀국할 때 유성룡은 벽제까지 따라가 송별했는데, 《연보》에는 이때
“사헌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며 이별의 정을 표하고 떠났다” 고 전한다. 유성룡에게 깊은 신뢰를 느낀 것이다.
사헌은 유성룡을 통해 사태의 핵심을 파악했다. 송응창과 이여송이 명 조정을 소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사헌은 1593년 12월 명 조정에 들어가서 “왜적은 떠나지 않고 대부분 조선 변경에 있다” 는 내용의 상본을 올렸다고 《선조실록》 27년 2월 21일조는 전한다. 명나라 조정은 사헌의 보고로 비로소 송응창과 이여송이 조정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유성룡이 사헌만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선조와 상의해 김수를 사신으로 보내 일본군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송응창이 물러갔다고 거짓으로 보고한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문제는 송응창이 사신 행렬을 수색해 자신에게 불리한 국서는 빼앗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조는 12월 7일 “이번 적정에 대한 주문은 송(송응창) · 이(이여송)에게 보여서는 안 되니 모쪼록 은밀히 가지고 가라는 내용으로 아울러 비변사에 이르고, 이에 대해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고 전교했다. 유성룡도 묘안을 냈다.
“김수의 사행은 수색당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도 이 점을 우려했기 때문에 앞서 역관에게 뒤떨어져 가지고 가게 하여 경략이 모르게 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계품하여 하서(下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주밀하게 하지 않으면 역시 누설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런 내용으로 다시 김수에게 하유하소서.”
진짜 국서는 사신 김수가 아니라 뒤떨어져 가는 역관에게 보내자는 방안이었다. 송응창 · 이여송이 주목하는 인물은 사신 김수였다. 김수와 함께 가는 역관도 아니고 뒤떨어져 가는 역관이 국서를 휴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실록》은 유성룡의 이 주장에 대해 “상이 따랐다” 고 적어 이 내용이 채택되었음을 말해주고, 《명사》 「조선열전」 은 유성룡의 계획대로 김수 일행이 국서를 빼앗기지 않고 북경까지 가져갔음을 전한다.
《명사》 「조선열전」
22년(1594) 정월, 김수 등을 파견해 방물을 바치고 사은했다. 예부낭중 하교원이 주청했다.
“김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왜구가 창궐하여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칼을 받은 자가 6만여 명이나 됩니다. 왜구의 말이 패만하고 무도한데, 심유경이 왜와 교통하면서 화친이라 하지 않고 도리어 왜가 항복을 애걸한다고 했습니다. … 바라옵건대 급히 칙명을 내리셔서 봉공을 중지케 하소서’ 하였습니다.”
김수는 비밀국서 전달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신이 공식국서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전하면서 운다고 공식국서를 제쳐두고 사신의 주장을 채택할 수는 없었다. 명나라 신종은 병부에서 의논해 처리하라고 말했다. 곧 송응창과 이여송 그리고 그 앞잡이 심유경이 조정을 속인 정상들이 드러났다. 심유경은 명 조정에 풍신수길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했고, 송응창과 이여송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모두 물러갔다고 덧붙인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일강경파가 물러가지도 않은 일본군을 물러갔다고 허위로 보고했다며 그들을 탄핵한 것이다. 광동성 어사 당일봉이 대일강경파 중 한 명이다.
“심유경은 시정의 무뢰한으로 이익만을 꾀하는 자인데 그가 무슨 꺼리는 게 있어 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홀로 괴이한 것은 송응창, 이여송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서 추기(군사 지휘권)를 쥐고 외정(外征)에 나갔으면 몸을 잊고 나라를 섬겨 황상의 안녕을 빌고 종사를 태산같이 해야 마땅하거늘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면서 서로 다투어 기망(속이는 것)을 일삼아 황상으로 하여금 치욕을 사이에 전하게 하고 비방을 후세에 남기도록 하였습니다.”
한번 입이 열리자 송응창 · 이여송과 이들을 두둔한 병부상서 석성에 대한 비판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좌통정 여명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같이 조정에 가득 찬 나라를 위한 공론을 억압하지 마시고 더욱 신장시켜서 왜노의 흉사를 배척하는 정론을 돕게 하소서.”
드디어 송응창과 이여송은 소환되고 계료총독 고양겸이 새 경략이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경략 송응창이 탄핵을 입고 원적지로 돌아갔다. 병부시랑 고양겸이 그를 대신하였는데, 그는 요동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사람을 차견하여 왕래시키기만 하였다” 라고 전한다. 송응창보다는 낫지만 그 역시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의지가 없었다. 결국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재건하는 일은 조선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앞자리에 유성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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