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무공행록》 ※
진린은 사납고 오만하여 위(임금과 조정)에서 미리 걱정하여 공에게 분부를 써 내리기를 “두터이 대접하고 도독을 노엽게 하지 말도록 하라” 고 하였다.
도독의 군사들이 처음 와서 자못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고통스러워했다.
어느 날 공은 군중에 명령을 내려 크고 작은 모든 막집들을 한꺼번에 헐게 하고 공도 자기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운반하게 하였다. 도독이 곳곳에서 집들을 헐어내는 것을 바라보고 이상히 여겨서 하인을 보내어 공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작은 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이 귀국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바라보듯 했는데, 이제 귀국 군사들을 견딜 도리가 없어 모두 피해서 달아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대장의 몸으로 혼자 여기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이라고 여쭈어라” 고 하였다.
하인이 돌아가 그대로 보고하자 도독이 깜짝 놀라 곤두박질치며 달려와서 공의 손을 잡고 만류하는 한편, 하인을 시켜서 공의 옷과 이부자리를 도로 실어 올리며 간절히 애걸하므로, 공은 “대인이 만일 내 말대로 한다면 그렇게 하겠소이다” 고 하였더니, 도독도 “어찌 안 들을 리가 있겠소” 하므로,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귀국 군사들이 우리들을 속국 신하로만 알고 조금도 꺼림이 없소. 그러니 만일 방편상 내게 그것을 금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신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겠소마는…”
그러자 도독이 “그렇게 하지요” 하고 승낙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도독의 군사들로서 군율을 범하는 자가 있기만 하면 공이 법 규정대로 징치(懲治)하니, 명나라 군사들도 공을 도독보다 더 무서워하게 되어 온 군중이 편안해졌다.
개국 초부터 수군을 중시해 온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동안 조선에서의 해전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이순신이 만고의 수군 명장임을 알고 있었다. 진린은 여기에 더하여 자신의 함대가 이순신의 병참과 작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진을 파하고 떠나겠다는 소식을 듣자 기겁을 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 《이충무공행록》 ※
7월 18일, 적선 100여 척이 녹도를 침범해 온다고 하므로 공과 도독이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장흥군)에 이르니 다만 적선 2척이 우리를 보고 달아날 뿐이므로 공과 도독은 하룻밤을 지내고 이내 돌아왔다. 공은 녹도 만호 송여종을 남겨두어 배 8척으로 절이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에서 복병하도록 하고 도독도 30척을 남겨두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24일, 공은 도독을 위하여 운주당에 술자리를 베풀어 한창 취했을 때, 도독의 부하로서 전총 벼슬에 있는 어떤 장수가 절이도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적을 만났는데 조선 수군이 모조리 다 잡고 명나라 군사들은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고 하였다.
도독이 크게 성을 내며 “저 자를 끌어내라!” 고 호령하며, 또 술잔을 던지는 등 안색이 달라지므로, 공은 그 뜻을 알고 노함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대인께서는 명나라의 대장으로서 해적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여기에 오셨으니, 이곳 진중의 모든 승첩이 바로 대인의 승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들을 전부 대인에게 드릴 터이니, 대인이 여기 온 지 몇 날도 안 되어 귀국 황제에게 이 같은 공로를 아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에 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공의 손을 잡고서 “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는데 과연 허명(虛名)이 아니었습니다” 고 하며 종일토록 취하여 즐기었다.
그날 송여종이 바친 배가 6척이요, 적의 머리는 69개인데 모두 도독에게 보내고 그대로 장계를 올렸더니, 위에서도 공이 진린 도독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것을 가상히 여기시는 유서를 내리시었다.
배 6척과 수급 69개는 매우 큰 전과였다. 진린 도독과 생산적인 파트너십을 원했던 이순신은 진린을 위하여 주저 없이 전공을 양보했다.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의 심성과 사려 깊음에 탄복했고, 조정에서는 사나운 진린의 심성을 잘 다독이고 있는 이순신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는 유서를 보내왔다.
명나라 함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진린은 이순신의 진영으로 오는 내내 대국의 수군 제독다운 위엄과 오만함을 갖추고 의기양양한 위세를 과시했다. 그런데 조선 측이 군량미를 제대로 공급해 주지 않자 담당 관리의 곤장을 치게 했는데, 이것이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진린을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진린의 입장에서 보면 군량미 공급에 문제를 일으킨 죄는 군법으로 다스려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진린이 군량 담당 관리에게 벌을 준 행위는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에 오자마자 군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고금도에 와서는 전혀 뜻밖의 상황을 접한 진린으로서는 이순신의 탁월한 군량미 조달 행정에 탄복했다. 또 전공을 선뜻 자신에게 양보한 것은 천자의 나라인 명나라의 권위를 세워주려는 것이었기에 이순신의 깊은 도량에 더 한층 감격했다. 이러한 사연들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깊은 우정과 신뢰, 의리의 관계로 발전해 갔다.
아래는 송여종의 비명(碑銘)에서이다.
※ 《비명》 ※
무술년 7월에 이공(이순신)이 또 공(송여종)에게 명령하여 몽충함(거북선) 6척을 거느리고 나가 바닷길을 파수하라고 하므로, 공(송여종)은 곧 출발하여 녹도 앞바다에 숨어 정박하고 있었는데, 적선 10척이 안개를 타고 몰래 접근해 왔다. 공(송여종)은 적이 곧 야습할 계획임을 알아차리고 돛을 달고 곧장 나아가 남김없이 다 무찌르고 돌아왔다. 이공(이순신)은 곧 포창하는 장계를 올렸고 명나라 장수도 역시 은호와 포목 등 후한 상을 주었다.
11월에 이공(이순신)이 수군을 크게 모아 노량에서 몰아쳐 적병이 크게 패하여 바닷물이 붉게 보였다. 나라를 다시 일으킨 전공은 이것으로 으뜸을 삼았으며, 공(송여종)의 공로 또한 여러 장수들보다 앞섰다.
‘몽충선’ 은 중국의 옛 병선으로 충돌용 전선을 말한다. 그러나 거북선의 별칭 또한 몽충선이다. 거북선 6척과 판옥선단이 녹도 근해(여수 근해) 요소요소에 잠복해 있다가 출몰하는 왜선들을 소탕한 해전인데, 말하자면 여수 근해를 수복한 해전이다.
※ 《이충무공행록》 ※
도독은 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공이 호령하고 지휘하는 범절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배가 비록 많다고 해도 적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매번 전쟁이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 판옥선을 타고 공의 지휘 받기를 원하였고, 모든 호령과 지휘를 모두 공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또 반드시 공을 ‘이 대인(大人)’ 이라고 부르며 “공은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은 아니오!” 라고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라고 권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명나라의 수군 제독으로서 진린은 그동안 조선에서의 해전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인물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순신의 활약상도 알게 되었고, 이순신으로부터 그간의 해전 관련 설명을 듣게 되자 이순신이 ‘신산(神算)의 명장’ 임을 알아 보았다.
러 · 일 해전의 승장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또한 이순신이 만고의 명장임을 알아본 인물이었지만, 진린은 이순신과 동고동락까지 했던 터인지라 이순신의 무훈과 인품, 더 나아가 이순신의 성자(聖者) 같은 모습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 같은 심경에서 진린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통하는 제갈량을 다른 사람, 그것도 다른 나라의 인물과 견준다는 것은 중화(中華)를 자처하던 중국인의 자존심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산도에 있는 진린의 묘비문에는 이순신에 대한 진린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 《진린 도독의 묘비문》 ※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인사를 살폈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 가니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공이 어찌 이를 모른다 하겠소. 어찌하여 무후(제갈량)의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나는 충성심이 무후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모두 무후만 못하니,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이튿날 과연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 《징비록》 ※
얼마 있다가 명나라 도독 진린이 나와서 남쪽 고금도로 내려와 이순신과 함께 군사를 합세하게 되었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 보낼 때 (남대문 밖) 청파동의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유성룡)는 진린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꺼리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주도록 하라고 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함께 앉아 있던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할 것 같습니다. 진린과 함께 진중에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억눌리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을 것이며, 그는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침탈하고 군사들을 마음대로 학대할 것입니다. 이를 거스르면 더욱 성을 낼 것이고, 그대로 따라주면 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고 말하며 서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이순신은 장차 진린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들로 하여금 크게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게 하였는데 사슴, 산돼지, 바닷고기 등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로써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올 때 이순신은 군대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멀리까지 나가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진린이 도착하자 그 군사를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들 이하 모두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 군사들은 서로 이야기하기를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다” 고 하였으며, 진린 또한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오래지 않아 왜적의 배가 가까운 성을 침범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쳐부수고, 적의 머리 40급을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어 그의 공으로 삼게 하니, 진린은 바라던 것보다 더 후한 대접인지라 더욱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일은 일체 이순신에게 물어서 처결하였으며, 밖으로 나갈 때면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고 감히 앞서 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드디어 진린과 약속하여 명나라 군사와 자기 군사를 구별하지 않고 백성들의 조그만 물건이라도 빼앗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매를 치게 하니,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서 섬 안은 조용하였다.
진린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통제사는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와 보천욕일지공이 있습니다” 고 하였다. 이는 그가 마음으로부터 감복했기 때문이다.
‘경천위지지재’ 란 하늘을 경륜할 만한 뛰어난 인재라는 뜻이다. 즉 경영의 대가(大家)라는 의미인데,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강태공, 장자방, 제갈량을 가리켜 ‘경천위지지재’ 라고 하였다.
‘보천욕일지공’ 은 국난을 극복해서 국운을 만회한 큰 공로라는 뜻이다. 중국 고사에 여와가 하늘이 쓰러진 것을 돌로 받치고, 의화가 해 열 개를 낳아 감천에서 목욕시켰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진린의 생각처럼 이순신은 ‘군영과 경세제민’ 에 노력해서 조선에 ‘보천욕일’ 하는 공을 세웠던 것이다.
●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에서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울돌목 패전 이후 남해안 일대 왜성에 틀어박혀 장기간 농성에 들어가 있던 왜군들에게는 그토록 기다렸던 ‘본국으로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왜군들은 조 · 명 연합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철수를 위해 속속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왜군들의 철수는 “내가 죽거든 원정군을 철수시키되 전군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나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라” 는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은 곧 조 · 명 연합군 측에도 알려졌으며, 이로써 침략자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한 조 · 명 연합군의 총공세(4로군 전략)와 무사히 철군하기 위한 왜군들의 사활을 건 결전이 바다에서 벌어지게 된다.
※ 《이충무공행록》 ※
9월 15일. “모든 적들이 곧 철거해 돌아가려고 한다” 는 말을 듣고 공과 도독은 수군을 거느리고 떠났다. 19일에 좌수영 앞바다에 이르고 20일에 순천의 왜교성(왜교 신성포)으로 나아가 진을 치니 거기는 바로 적장 평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진 앞이었다. 적이 장도(전남 승주군)에 군량을 쌓아 두었기로 공은 군사를 보내어 빼앗아 오게 하면서 남은 것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적들이 곧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 을 들었기에 왜교성 앞 장도의 왜군기지를 먼저 불태웠다.
※ 《이충무공행록》 ※
9월 21일. 공이 해남 현감 유형 등을 보내어 적진을 공격하게 해서 왜적 여덟 놈을 죽였는데, 조수가 빠져 물이 얕아지므로 곧 돌아왔다. 그날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정병 1만5천 명을 거느리고 왜교 북쪽에 와서 진을 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위인 대마도주의 수군력을 합해서 약 5백여 척의 선단과 1만5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깊은 바다로 따라 나오지 않고 수비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거북선+판옥선의 학익진’ 의 해전 원리가 제대로 펼쳐지기가 어렵다.
또 유정의 1만5천 군으로서 왜교성의 1만5천 명의 왜군을 공격하는 것도 무리였다. 울산성전투 때 5만 명의 조 · 명군은 1만 명의 가토 군을 공격했지만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공성 도중에 왜군 측 구원군의 도착으로 조 · 명군은 패퇴한 바 있었다.
당시 가토 군이 위기에 처했던 것은 식수와 식량 때문이었다. 왜국 제1의 지장 고니시는 가토 군의 이 같은 사례를 참고해서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준비를 했고, 남해안의 인근 왜군 부대들과 상호 비상 구원체제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 《이충무공행록》 ※
9월 24일. 적장 평의지가 정예병 1백여 명을 이끌고 남해로부터 와서 왜교에 이르렀는데, 이는 본국으로 철병하는 것을 행장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 11월 3일, 공은 육군과 협공하기로 약속하고 도독의 수군과 함께 나아가 싸웠다. 싸움의 승패가 나기 전에 사도 첨사 황세득이 적이 쏜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황세득은 공의 처종형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들어가 조문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세득은 나라일로 죽었으니 그 죽임이 영광스러울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유 제독이 나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진 도독은 격분해 하였다.
유정은 1만5천 명의 군사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을 거듭할수록 사상자만 속출할 뿐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유정 군은 자신감을 잃었다.
왜성에 대한 명군의 첫 공성전은 가토 군을 상대로 한 울산 학성전투이다. 명군은 그곳에서 왜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또 난공불락의 사천 왜성 공격 때에는 동일원이 패퇴하여 명나라 황제의 엄한 질책을 받은 적도 있었다. 유정은 이 모든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순천 왜교성은 동 · 남 · 북쪽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에 위치해 잇었다. 공성을 위해서는 서쪽으로만 접근해야 하는데, 접근로의 폭이 좁았기 때문에 성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한 차례 다가갈 수 있는 규모는 기병과 보병을 합해서 1~2천 명 단위로 공격해오는 명군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면 명군의 피해는 심각했을 것이다.
아래는 유정 군이 조 · 명 연합함대와의 수륙 합동전을 계획하고서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KBS 《역사스페셜》에서의 설명이다.
※ 《역사스페셜》 ※
수군과 육군의 연합 작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은 왜성이 난공불락이었던 점에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의 참전 태도에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화해를 강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에 임하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 당시 전투에 참관한 이덕형의 장계에 잘 나타난다.
“방패차 안에 들어가 곤하게 잠자는 자들이 많았다. 싸우지도 않고 퇴병도 하지 않으니, 유정이라는 자의 태도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선조실록》
유정은 1598년 9월 경 이미 협상한다는 명분으로 고니시를 생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것을 고니시가 알아채고 나오지 않자 그때서야 공격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사실상 전투에서 피를 흘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전공(戰功)을 세우는 선에서 전투를 마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유정은 전열을 가다듬는다는 구실로 퇴각한다.
※ 《이충무공행록》 ※
11월 3일. 공과 도독이 군사를 내보내어 한참 싸우는데, 공은 조수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도독에게 잠깐 배를 돌리자고 했으나 도독은 듣지 않더니 사선(명군 수군의 중형 전선) 19척이 얕은 바닥에 얹혀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그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하면서 배 7척을 내어 무기와 군사들을 많이 싣고 즉시 장수를 보내어 명의 사선을 경계하라고 명령하면서, “적들이 우리 배가 얕은 바닥에 얹히는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기회를 놓칠 새라 한꺼번에 빼앗으려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다만 힘써 싸우기는 하되 스스로를 지키면서 조수를 보아 곧 돌아오도록 하라” 고 하였다. 우리 7척의 배들은 한결같이 그 명령대로 임하여 온전히 다 돌아왔지만, 명나라 사선들은 모조리 함몰당하고 말았다.
조수가 빠지면 바다가 얕아지므로 이때는 가벼운 소형선들만 활약할 수 있다. 중 · 대형선인 명군의 사선은 제 때 물러나오지 못해서 그만 갯벌에 얹히고 말았다. 그러자 왜군 돌격대들이 소형선인 고바야를 타고 명의 사선(沙船)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배 위로 기어 올라가서 명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 《이충무공행록》 ※
11월 6일. 왜국으로 사로잡혀 갔던 변경남이란 자가 적진 속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서 말하기를 “지난 8월에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적의 괴수 평수길은 이미 죽었으며, 여러 두목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는데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적들도 급히 철수해 돌아가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변경남은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을 왜국 현지에서 들었고, 곧 도망쳐서 밀항해 돌아와서 조선 수군에 그 소식을 전했다. 히데요시의 사망설은 그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번에도 헛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왔는데, 변경남이 전하는 소식은 왜국에서 직접 듣고 알려온 것이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보았을 듯하다.
1597년 9월, 왜군들은 대군이 주둔할 수 있는 해안 전진기지의 필요성을 느끼고 순천에 왜교성을 쌓았다. 왜교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1만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축성 3개월 만인 1597년 12월에 입성했는데, 고니시 군은 그로부터 근 1년간 성 안에 틀어박혀 좌절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본국으로부터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에 더욱 초조해진 고니시는 서둘러 본국으로 철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유정 제독의 군대가, 바다에서는 조 · 명 연합 함대가 퇴로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수가 여의치 않았다.
1598년 11월이 되자 철수를 위해 부산에 집결한 왜군 부대들이 철수를 시작했지만 고니시 군만은 왜교성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니시로서는 막다른 길목에서 호랑이를 만난 것이었다.
● 이순신에게 퇴로를 구걸하는 소서행장
일찍이 요시라를 통한 반간계로 이순신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이었기 때문에 고니시는 ‘이제 이순신이 작정을 하고 나를 죽이려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통치자의 죽음으로 일본 정국은 크게 요동칠 것이었지만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다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향후 누가 일본의 패권을 차지할지, 또 자신의 영지와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고니시에게는 하루가 10년 같은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귀국을 서둘러야겠다고 결심한 고니시는 오사카 상인의 아들답게 조 · 명 연합군 수뇌진을 상대로 대대적인 뇌물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선 유정에게는 “싸움 없이 왜교성을 비워줄 것이며, 그 안에 있는 군량과 약탈한 재물, 그리고 상당수의 왜군 수급(사실은 조선인 징용병의 수급)을 베어 넘겨주겠다” 고 하면서 그 조건으로 퇴로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진린에게는 종전교섭을 제의하면서 역시 뇌물공세를 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종전 교섭이지 그것은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는 간곡하고도 애절한 구걸이었다.
※ 《이충무공행록》 ※
11월 14일. 평행장이 속히 돌아가고 싶어 하였으나 우리 수군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걱정되어 도독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진을 물리어 달라고 청하자 도독도 그것을 들어주려고 하였다. 그날 밤 초저녁에 왜의 소장(小將)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몰래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의 사자(使者)가 또 도독부로 왔고, 16일에는 도독이 그 부하 장수 진문동을 적의 진영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의 물건들을 싣고 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왜의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 주도록 부탁하려고 했다. 그때 공이 말했다.
“대장된 사람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고 하니, 도독이 부끄럽게 여기었다.
왜군들에게 크게 한 맺힌 게 없었던 진린, 그러나 이순신에게 있어서 고니시는 7년간 조선 백성의 절반(약 3백만 명)을 죽게(전사, 아사, 병사) 하고, 강토를 초토화시킨 불공대천(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의 원수였다. 때문에 반드시 잡아서 목을 베거나 한성으로 압송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임금의 명령이기도 했다.
※ 《이충무공행록》 ※
왜의 사자가 또 오자 도독은 “내가 너희 왜인들을 위하여 이미 통제사에게 말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말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행장이 공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총과 칼 등속을 선물로 가지고 와서 매우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것을 물리치며 “임진년 이래로 무수히 많은 왜적들을 잡아서 얻은 총과 칼이 산처럼 높이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이 여기는 뭘 하려고 찾아온단 말이냐” 라고 야단을 치자, 왜적의 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행장이 또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조선 수군은 마땅히 명나라 수군과는 다른 곳에 진을 쳐야 할 터인데 같은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땅에서 진을 치는 것은 우리 마음인데, 네놈들이 알 바가 아니다” 고 하였다.
위기를 절감한 고시니는 이순신과 진린을 회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뇌물을 보내는 등 무사 귀환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원흉은 결코 살려 보낼 수 없다” 는 이순신의 의지를 끝내 꺾을 수는 없었다.
※ 《이충무공행록》 ※
이때 도독은 적의 뇌물을 이미 많이 받은 후여서 놈들에게 빠져나갈 길을 터주려고 하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잠시 이곳의 행장은 내버려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적들을 토벌하러 가고자 합니다.” 고 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였다.
“남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이지 왜적이 아니오!”
도독은 다시 말하기를 “하지만 이미 적에게 붙은 이상 그들 역시 적이오. 이제 그곳으로 가서 토벌한다면 힘도 안 들이고 머리를 많이 벨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귀국 황제께서 적을 무찌르라고 명령하신 것은 작은 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이제 구해 내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귀국 황제의 본의가 아닐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독은 성을 내며 “우리 황제께서 내게 긴 칼을 내려 주셨소!” 하고 위협하였다. 공은 다시 “한 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소.” 하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한참 동안이나 서로 다투었다.
이렇게 분연히 맞섰기 때문에 남해도의 많은 백성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다.
※ 《이충무공행록》 ※
11월 17일. 초저녁에 행장이 봉화(烽火)를 올려서 남해에 있는 적들과 서로 연락을 하였다. 그것은 행장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곤양과 사천의 적들이 노량으로 와서 호응할 것이라고 하므로, 공은 모든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군비를 엄하게 하여 기다리라고 하였다.
● 마지막 난중일기
무술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줄거리를 《이충무공행록》을 통해 살펴보았다.
※ 《난중일기》 1598년 9월 15일 ※
맑다. 진린 도독과 함께 일제히 행군하여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 이르렀다.
9월 15일의 출동은 ‘모든 적들이 곧 철거해 돌아가려고 한다’ 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출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내용이 아주 짧은데 이렇게 기록한 것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난중일기》 1598년 9월 ※
18일. 오후 2시에 행군하여 방답(여천군 돌산면)에 이르렀다.
19일. 맑다.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참담하였다. 자정에 달빛을 받으며 하개도로 옮겨 대었다가 채 밝지 않아서 또 행군하였다.
본영인 고금도를 떠나 나로도→방답→여수를 지나가고 있다. 수색전을 겸하고 있었던 듯하다. 왜군들의 흔적이 없었는지 해전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전쟁..... > 임진왜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비록 - 서설(序說)| (0) | 2013.05.01 |
---|---|
해전기록 - 종장 -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다 (0) | 2013.05.01 |
해전기록 - 51장 - 면사첩 (0) | 2013.05.01 |
해전기록 - 50장 - 승기를 잡다| (0) | 2013.05.01 |
해전기록 - 49장 - 명랑 해전에 대한 가설들 (0) | 201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