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는 이순신 관련 서적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알려진 소설 작품이다. 또 방송용 드라마, 만화 등의 원작으로 활용되는 등 그 영향력 또한 크기 때문에, 비록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소설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을 조명해 보는 것은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정유년 늦가을 나는 교서를 받들고 우수영에 부임했다. 우수영은 진도와 마주보는 해남 쪽 바닷가 언덕이었다.
‘부임’ 이라 임명을 받고 임지로 가는 것이므로 김억추 수사에게나 해당되는 표현이다. 즉, 통제사 이순신은 부임한 것이 아니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것’ 이다. 이순신은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있던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를 받고 두치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여 8월 29일에 벽파진에 도착하였고, 9월 15일날 명량 해전 하루 전에야 벽파진에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 것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 거제 현령 안위, 미로항 첨사 김응함, 녹도 만호 송여종, 경상우수사 배설들도 우수영 관하로 들어와 엎드려 있었다.
‘전선 12척’ 에서 1척당 160명이면 2,880명이다. 그런데 이들 병력은 제외하고 120명만 군사로 인정하고 있다. ‘미로항’ 이 아니라 ‘미조항(彌助項)’ 이다. 배설은 9월 2일 벽파진에서 도망갔고, 우수영에는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배설의 알리바이는 조작되었다.
※ 《칼의 노래》 김훈 ※
우수영에 부임하던 첫날, 장졸들을 수루에 모아놓고 교서에 절가지 했다. 지방 수령과 수사, 여러 읍진의 만호들은 누각 위에 앉았고 병졸들은 누각 아래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앉았다. 제주에서 보내온 소 3마리를 잡고 술 10말을 풀었다.
‘부임’ 하지도 않았고, 이 같은 부임식도 없었다. 병졸들이 누각 아래에 앉았다고 했는데, 이 병졸들에는 12척에 타고 있던 2,880명의 병졸들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말이 안 되는 병력집계 방식이다. 그리고 소설에서의 부임식 광경은 마치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의 생일잔치를 연상시키는 광경으로 지나친 허구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제주도에서 보내온 소 5마리를 잡아서 군사들을 먹인 것은 명절인 9월 9일 중양절 날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칠천량 전투 때 배설은 원균의 휘하였다. 조선 수군의 일자진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는 전선 10처과 수졸들을 포위망에서 빼내 진도로 물러섰다. 이 전선은 아직 나에게 인계되지 않고 있었다. 칠천량에서 물러설 때 그는 적들의 상륙이 임박한 한산 통제영에 불을 질렀다.
칠천량에서 원균 함대가 포위될 때는 일자진이 아니라 포구에 밀집하여 정박해 있을 때였다. 이때 배설이 몰래 빠져나와 숨겨두었던 전선들이 ‘아직 나에게 인계되지 않고 있다’ 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순신이 12척에 승선한 것은 8월 18일 회령포에서이며, 8월 28일에는 배설과 함께 어란포해전을 치렀다.
그 후 이순신과 배설의 12척 함대는 8월 29일 벽파진에 도착했고, 9월 2일 배설이 도망을 갔다. 9월 7일, 12척 함대는 벽파진해전을 치렀고, 9월 15일에는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그럼에도 ‘아직 나에게 인계되지 않고 있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김훈은 《난중일기》조차 자세히 읽지 않았던 것 같다.
※ 《칼의 노래》 김훈 ※
그날 밤 경상 우수사 배설은 탈영을 해서 도주했다. … 진도에 군사를 풀어서 모든 연안 갯벌을 뒤졌다. 그가 감추어둔 전선 10척을 수습했다. 노가 몇 개 부러져 있을 뿐 배들은 온전했다.
군사를 풀어서 모든 연안 갯벌을 뒤져서 감추어둔 12척 가운데 10척을 수습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조차 없다.
※ 《칼의 노래》 김훈 ※
적들은 아침에 왔다. … 명량까지는 일렬종대로 나아가서, 거기서 적의 주력 정면에 일자 횡렬진으로 펼칠 것이었다. 중군장 김응함이 선두로 나아갔다. 안위가 뒤따랐다. 나는 대열의 한가운데서 여섯 번째로 나아갔다.
이물에 덤비는 역류의 물결은 사나웠다. 물결은 길길이 뛰면서 앞 쪽으로 달려들었다.
또 일자진이 등장하고 있다.
우수영 앞바다에서 명량 입구까지는 조류의 흐름과 관계없이 바다는 호수처럼 조용하다. 그런데 ‘물결이 사납고 길길이 뛰었다’ 고 한 것을 보면 김훈은 현장답사도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수영 앞바다는 바로 앞에 있는 양도가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항상 호수처럼 고요하다.
※ 《칼의 노래》 김훈 ※
명량 어귀에서 북소리는 난타로 바뀌었다. 격군들의 몸이 북소리를 받아내지 못했다. 역류로 달려드는 물결과 앞으로 내모는 북소리 사이에서 격군들의 몸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배는 밀리면서 겨우 나아갔다. 후미의 전선들은 세 마장 이상 처져 있었다. … 명량 어귀에서 격군 전원을 교대시켰다.
-일자진을 펼쳐라.
왜선단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왜 일자진으로 거친 물살의 명량 해협을 막아서서 힘을 빼고 있었다는 것일까? 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군사들을 기진맥진하게 하고서 어떻게 싸울 수 있으며, 또한 배 위에서 격군을 전원 교대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예비 군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인데, 앞뒤가 모순된다.
※ 《칼의 노래》 김훈 ※
진도 쪽 봉우리에서 봉화는 계속 올랐다. 적들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횡렬 일자진의 배 간 간격은 한 마장, 중심은 내가 탄 대장선이었다. 물길의 중앙부에는 배가 머물 수 없었다. 일자진의 가운데 두 마장을 비워놓았다. 거기는 명량의 서쪽 어귀였다. … 역류 위에서 떠밀려 내려가지 않으려면 격군들은 나아가지 않더라도 노를 저어야 했다.
‘적들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 했으면서 공연히 일자진으로 막아서서 계속 힘을 빼고 있다. ‘횡렬 일자진의 배 간의 간격은 한 마장’ 이라고 했는데, 1마장=393m이다. 진도대교 전체의 폭이 1마장 정도인데 김훈은 1마장을 몇 미터로 알고 있는 것을까? ‘일자진의 가운데 두 마장을 비워놓았다’ 고 했는데, 그렇다면 일자진의 가운데서는 배와 배 사이의 거리가 780m 이상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명량 해협의 전체 폭이 평균 500m를 넘지 않는다.
※ 《칼의 노래》 김훈 ※
사부들에게는 아직 화약과 화살이 지급되지 않았다. 흔히 겁에 질린 사부들은 적선이 눈에 띄면 아득히 먼 적들을 향해 쏘아댔다.
도망해 온 12척의 병사들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화살과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아득히 먼 적을 향해서 쏘아대는 일’ 은 없었을 것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명량 어귀에서 나는 외가닥 일자진으로 물결을 버텨가며 기다렸다. 명량의 서쪽 어귀였다. 나의 사지(死地)는 내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잘 죽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너무 멀어서 끝은 보이지 않았다. 물결은 우우우 울며 내달았고, 이물은 솟고 또 곤두박질쳤다.
적들은 아직 멀리 있는데 계속해서 일자진으로 막아선 채 힘을 빼고 있다. 이쯤 되면 격군들은 싸움도 하기 전에 파김치가 되었을 것이고, 이런 상태에서 맞붙어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칼의 노래》 김훈 ※
일자진은 다시 뒤로 흘렀다. 적은 명량 깊숙이 달려들었다. 적의 날개를 피해서 물러선 만큼 적들은 달려들었고, 끌어들인 만큼 다시 걷어내야 할 것이었다. 명량의 동쪽 어귀에서 서쪽 어귀에 이르는 예순 마장의 물길에 적의 대열은 온전히 들어와 있었다.
명량 해협의 총길이가 60마장×393m=23,580m(=23,58km)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말씀이 안 되는 거리 감각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는 두 마장 정도 뒤로 물러서서 다만 고요한 바다에 떠 있었다. 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베어야 했으나 배를 돌릴 수 없었다.
‘두 마장’ 정도 물러난 것은 김억추의 기함이다. 김응함과 안위는 이순신과 김억추 사이(두 마장 정도의 거리 중간쯤, 약 1마장)에 있었을 것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적의 날개는 연안 쪽에서 빠르게 좁혀들고 있었다. 초요기를 세웠다. 김응함이 겨우 다가왔다. 김응함이 내 배로 건너왔다. 김응함의 배 좌현에서 적탄에 맞은 사부 2명이 물 속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김응함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응함아, 여기는 사지다. 내 칼에 죽느니 나아가서 적의 칼에 죽어라.”
제 배로 건너간 김응함은 격군을 질타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안위가 다가왔다. 대장선으로 건너와서 안위는 갑판에 꿇어 앉았다. 나는 말했다.
“안위야, 너를 죽여서 길을 열겠다. 네가 군법에 죽겠느냐? 물러서면 살 듯 싶으냐?”
안위가 몸을 떨었다. 안위는 제 배로 건너갔다. 안위의 배가 앞으로 나아갔다.
김응함과 안위가 이순신의 기함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두 배가 가까워져서 깃발 신호로서가 아니라 갑판 위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육성으로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한테 야단을 맞은 것이다.
※ 《칼의 노래》 김훈 ※
나는 일자진으로 밀어붙였다. 노가 부러진 적선들이 물살 위에서 가랑잎처럼 맴돌며 위로 밀렸다. … 명량 서쪽 어귀에서 아직도 온전한 적의 후미는 이물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추격할 수 없었고, 화살을 보낼 수도 없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일자진’ 이 아니라 학이 날개를 접은 모습의 학익진(鶴翼陣)이다. ‘날이 저물 때’ 가 아니라 유속이 최고 속도에 달하는 오후 3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승기를 잡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일 ※
맑다. 아들 회를 보내어 저의 어미도 보고 집안사람들의 생사도 알아보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심사가 너무 불편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졸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전하기를, 아산 집이 적들에게 분탕질을 당하여 거덜났다고 하였다.
이순신의 두 형이 일찍 타계했기에 이순신의 부인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며 아산 집을 지키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2일 ※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으나 잘 갔는지 모르겠다. 내 심정을 어찌 말하랴.
맏아들 회는 울돌목해전에 참전해 있다가 아산 고향이 분탕질을 당했다는 소식에 배편으로 아산에 올라갔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
3일. 맑다. 새벽에 떠나 다시 법성포로 돌아왔다.
4일.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5일.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어 촌가로 내려가서 잤다.
6일. 흐리다. 눈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7일. 바람이 순조롭지 않고,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들으니 호남 안팎으로 적의 자취가 전혀 없다고 한다.
8일. 맑다. 출발하여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러 잤다.
9일. 맑다. 일찍 떠나서 우수영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또 인적(人跡)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초저녁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 등이 찾아와서 만났다.
전라우수영이 피난민과 왜군들에 의해 약탈을 당했다. 한편, 울돌목에 막개와 쇠사슬이 있었다면, 쇠는 당시 대단히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약탈 등을 우려해서라도 해전이 끝난 후 즉시 철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0일 ※
비가 뿌리고 북풍이 세게 불었다. 밤 10시경에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전하기를, 해남에 있는 적들이 급히 물러나고 있는 조짐이 현저하다고 하였다. 이희급의 아비가 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애걸하여 풀려 나왔다고 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며 밤을 새웠다.
우도 우후 이정충이 배에 왔다는데도 찾아와 보지 않는 것은 외도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후 이정충이 도망가 있었던 이유는 이억기 함대의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우수영을 떠나 있었거나,아니면 울돌목해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1일 ※
맑다. 새벽 2시에 바람기가 조금 자는 것 같으므로 닻을 들고 바다 가운데 이르러 정탐할 사람으로 이순, 박담동, 박수환, 태귀생 등을 해남으로 보냈더니,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라고 하였다. 틀림없이 적도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리라.
정오에 발음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였다.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서 멀리 바라볼 수 없었으나,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의 월출산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비금도로 통하여 시야가 확 틔어 있었다. 얼마 있다가 중군장(김응함)과 우치적이 올라오고, 조효남, 안위, 우수도 이어서 왔다. 날이 저물어 산에서 내려와 해안 언덕에 앉았는데 조계종이 와서 왜적의 정황을 말하고, 또 왜적이 수군을 몹시 겁낸다고 하였다.
이희급의 아비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포로로 잡혀간 경위를 말하는데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따뜻하기가 마치 봄날 같아서 아지랑이가 하늘에 아른거리고 비가 내릴 징조가 많이 있었다.
밤 8시경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서 혼자 선실 창 옆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났다. 밤 10시경에 식은땀이 나서 온몸을 다 적셨다. 자정 때쯤부터 비가 내렸다. 이날 우수사(김억추)가 군량선에 있는 뱃사람들을 곤장으로 무릎을 쳤다고 한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인근 왜군들의 동향을 확인해 가면서 해남을 수복하고 있다. 무릎 뼈를 치는 것은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2일 ※
비.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절하고 그 부하들의 무릎 뼈 때린 죄를 사과하였다. 가리포(첨사 이응표), 장흥(부사 전봉)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종일토록 이야기하였다. 탐후선이 나흘이나 되어도 오지 않으니 걱정스러우나 아마 흉측한 적도들이 멀리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쫓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우수사가 부하들의 무릎 뼈 때린 일로 사죄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
맑다. 배 조방장(배흥립)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찾아와 보았다. 얼마 있으니 탐후선이 임준영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으로 들어와서 틀어 앉아 있던 적들이 초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11일에 모두 급히 도망갔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적진 속으로 들어가서 왜놈들을 끌고 와서는 지방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고 하였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곧 순천 부사 우치적, 금갑도 만호 이정표, 제포 만호 주의수, 당포 만호 안이명, 조라포 만호 정공청과 군관 임계형, 정상면, 봉좌 태귀생, 박수환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늦게 조방장(배흥립)과 장흥 부사 전봉 등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이날 우수영 우후 이정충이 싸울 때 뒤떨어져 있었던 죄로 매를 때렸다. 저녁에 중군장 김응함에게서 들으니, 섬 안에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산골짜기에 숨어 살면서 소나 말을 잡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황득중과 우수 등을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해남 지방으로 갔던 탐후선이 돌아와 소식들을 전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
맑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물 속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끝에는 아들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해주었는데, 열어 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어내고 그 속의 편지봉투를 보니 겉에 열(둘째 아들)의 글씨가 보였는데, ‘통곡(痛哭)’ 이란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몰래 간담이 떨어져 소리를 내어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어찌 이런 괴상한 이치가 다 있단 말이냐!
천지가 캄캄해지고 해조차도 빛이 바래는구나. 아, 슬프구나, 내 아들아! 나를 버려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남 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으려 한 것인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그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이 세상에 살아 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이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은 한다마는, 이미 속은 죽고 껍데기만 살아있는 셈이니, 그저 울부짖으며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았다. 이날 밤 10시경에 비가 내렸다.
‘괴상한 이치’ 에서의 ‘이치’ 는 격물 · 치지에서 말하는 ‘이치’ 이다. 막내아들 면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충무공행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 《이충무공행록》 ※
10월 14일 공이 우수영에 있다가 아들 면이 죽었다는 기별을 들었는데, 면은 공의 막내아들로서 용기와 지혜가 있고 또 말 타기 활쏘기에도 능하여 공은 늘 자기를 닮았다고 사랑해 왔던 것이다. (면은) 그해 9월에 어머님을 모시고 아산 본가에 가있다가 왜적들이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싸우다가 복병의 칼에 찔려 길에서 죽은 것이다.
공은 그 기별을 듣고 너무 애통해 한 나머지 그 후부터 정신이 날마다 쇠약해져 갔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5일 ※
15일. 하루 종일 비바람이 불었다. 누워 있기도 하고 앉아있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몸을 뒤척거렸다. 여러 장수들이 찾아와서 위문하였으나 얼굴을 들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임중형, 박신 등이 적정을 정탐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흥양, 순천 등지의 바다로 갔다.
16일. 맑다. 우수사(김억추)과 미조항 첨사(김응함)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 현감 유형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 죽은 소식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도 여태 마음 놓고 통곡할 수 없었으므로, 섬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밤 10시경에 순천 부사(우치적), 우후 이정충, 금갑도(이정표), 제포(주의수) 등이 해남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왜적의 머리 13개와 적진에 투항에 들어갔던 송언봉 등의 머리를 베어왔다.
강막지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곡을 하며 막내아들의 혼령을 위로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
17일. 맑다. 새벽에 아들을 위해 상복을 입고 통곡하며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우수사가 와서 보았다.
18일. 맑다. 바람도 자는 것 같았다. 우수사는 배를 부릴 수 없어서 바깥 바다에서 잤다. 강막지가 와서 보았다. 임계형과 임준영이 들어왔다.
19일. 맑다. 지난밤 12시경에 꿈을 꾸었는데, 새벽에 고향 집의 종 진이 내려왔기에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통곡하는 꿈이었다. 늦게 조방장 및 경상우후(이의득)가 찾아왔다. 백 진사(백진남)가 찾아오고 임계형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김신웅의 아내, 이인세, 정억부를 붙잡아 왔다. 거제 현령(안위), 안골포 만호(우수), 녹도 만호(송여종), 웅천 현감(김충민), 제포 만호(주의수), 조라포 만호(정공청), 당포 만호(안이명), 우 우후(이정충) 등이 찾아왔다. 적을 잡은 공문을 가져와 바쳤다. 윤건 등이 적에게 붙었던 자 2명을 잡아왔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눈물을 흘렸는데, 어찌 말로 다하랴. 이제는 영령이 되었으니, 불효가 이에까지 이를 줄 그가 어찌 알았으랴. 비통하여 가슴이 찢어지듯 함을 이기기 어려웠다.
20일. 맑다. 미조항 첨사(김응함), 해남(유형), 강진 현감(이극신) 등이 해남의 군량을 운반할 일로 보고한 뒤 돌아갔고, 또 안골포만호 우수도 보고하고 돌아갔다. 늦게 김종려, 정수, 백진남 등이 와서 보았다. 또 윤지눌의 못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김종려를 소음도 등 열세 섬의 염장의 소금 굽는 것을 감독하는 총책임자로 뽑아 보냈다.
강진 현감도 전후 복구에 나서고 있고, 각 지역의 염전 경영도 회복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
21일. 비가 오다가 눈이 오다가 하였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서 뱃사람들이 추위에 얼까봐 걱정이 되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정상명이 들어와서 전하기를, 무안 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언상은 본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였는데 자기 몸을 보전하기 위한 사사로운 계책으로 수군에 오지 않고 몸을 산골짜기에 숨긴 지 이미 달포가 넘었다. 그러다가 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까봐 겁이 나서 비로소 와서 얼굴을 내미니, 그 하는 짓이 극히 해괴하다.
22일. 아침에는 눈이 오고 늦게는 개었다. 군기시 직장 선기룡이 임금의 유지와 의정부 방문들을 가지고 왔다. 해남 현감 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자들인 윤해, 김언경 등을 묶어서 올려 보냈기에 단단히 가두어 놓게 하고, 또 무안현감 남언상은 가리포 전선에 가두었다.
23일. 맑다. 윤해, 김언경을 처형했다. 백진남이 찾아와서 보았다. 전마(戰馬)의 편자가 떨어진 것을 고쳐 박았다.
24일. 맑다. 해남에 있던 왜적의 군량 322섬을 실어왔다. 저녁에 선전관 하응서가 유지(諭旨)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우후 이몽구가 여수에서 나올 때 가족들은 피난시키면서 병장기를 버려두고 온 일은 큰 죄였기에 조정에서도 그 죄를 물어왔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24일 ※
그 편에 들으니, 명나라 수군이 강화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밤 10시경에 땀이 흘러 등을 적셨는데 자정이 넘어서야 그쳤다. 새벽 2시경에 또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왔다는 말이 전해졌다. 날이 밝은 뒤에 들어왔는데, 선전관은 권길이었고 금부도사는 홍지수였다. 무안현감(남언상)과 목포(방수경), 다경포만호(윤승남)를 잡아 갈 일로 왔다고 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에 재임명하면서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다가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 군대의 위세를 새로 한 번 떨치게 하라’ 는 어명을 내렸다.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거둔 대 반전, 해남반도 일대에서 펼친 수복활동 등은 이 같은 어명을 실천한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같은 군국 경여에 불참한 수령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10월 ※
25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종 순화가 아산으로부터 배를 타고 왔는데, 그 편에 집안 편지를 받아보았다. 마음이 편치 못하여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혼자 앉아 있었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명나라 수군의 배가 정박하기에 적합한 곳을 생각해서 급히 회답 장계를 올리라는 것이었다. 양희우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충청우후 원유남이 홍시 한 접(100개)을 보내왔다.
26일. 비가 뿌렸다. 조방장 등이 찾아왔다. 김종려, 백진남, 정수 등이 찾아왔다. 이날 밤 10시경에 식은땀으로 몸이 젖었다. 온돌에 불을 너무 많이 땠기 때문이다.
27일. 맑다. 영광군수(전앙)의 아들 전득우가 군관이 되어 와서 신고하였다. 곧 자기 아버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더니 홍시 백 개(한 접)를 가지고 왔다. 밤에는 비가 뿌렸다.
28일. 맑다.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에게 주어 올려 보냈다. 늦게 강막지의 집에서 나와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염장의 도서원(총무) 거질산이 큰 사슴을 잡아 와서 바치기에 군관들에게 주어 나눠 먹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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