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왜장들은 재차 공격에 나서고자 했지만 16일 싸움에서 희생도 많았고 이순신이 똑 같은 방식으로 막아선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도 남단을 돌아 서쪽으로 진입하더라도 같은 원리로 막아선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데 왜장들의 생각이었다. 또 동 · 서 양쪽으로 동시에 진입한다는 것은 조류의 흐름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조선 함대를 그대로 두고 서해→강화도→한강→한성으로 진격해 간다면 퇴로가 차단될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수송선단은 모두 울돌목 근해에서 불타고 말 것이다.
이 같은 염려는 왜의 육군 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이 무렵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북상한 왜군들은 보급품이 바닥난 상황에서 조 · 명 연합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복권된 이순신 때문에 울돌목 통과가 불가능하다” 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왜군들은 ‘도대체 지난 여러 해 동안 이순신을 이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온 일본국의 연합 함대가 어째서 12척의 배밖에 없는 이순신도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하는 의문도 품어보고 한탄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기에 허탈했다.
재해권이 넘어간 상황에서는 비록 자신들이 한성을 다시 탈환하더라도 얼마 지켜내지 못할 것이란 점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순신이 수군력을 보강해서 여수→순천→사천을 수복하고 거기에 명나라 수군까지 합세한다면, 자신들의 퇴로까지 차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당포, 한산도, 안골포 등지에 머물러 있는 수송선단의 안위도 장담할 수가 없었는데, 수송선단이 불타버리고 나면 본국으로의 귀환에도 차질이 생기므로 왜군들은 북상을 단념하고 서둘러 부산과 남해안 일대의 왜성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7일 ※
맑다.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무려 3백여 척의 피난선이 와 있었다. 이들은 우리 수군이 크게 승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양식들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주의 진사 임선, 임환, 임업 등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피난 어선 3백여 척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1척당 20명이면 피난민은 모두 6천 명이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8일 ※
맑다. 어외도에서 머물렀다. (울돌목해전 때)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노비 계생이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박영남, 박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순신의 기함에서 총탄에 의해 2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함이 왜군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경미한 손실만 입은 셈인데, 이는 방탄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며, 방탄을 강화한 것은 기함뿐 아니라 12척의 병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손실 정도로 보아 이번에도 해전 시간은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19일 ※
맑다. 일찍 떠나 배를 저어 갔다. 바람도 부드럽고 물결도 순하여 무사히 칠산(영광군 낙월면)에 이르니 흉악한 왜적들이 육지로 와서 인가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가 진 후 홍농(영광군 홍농면)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육지 쪽은 전라북도 일대가 왜군들에 의해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깊은 산중이나 신안 앞바다의 인근 섬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왜군들은 약탈할 것이 없었다. 이 점이 임진년 북상 때와 달랐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20일 ※
맑다. 새벽에 떠나 바로 위도(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이광축, 이지화 부자가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이 무렵부터 조선 수군은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피난민들은 조선 수군의 보호 아래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는 등 군민 합동 경영 시대를 열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21일 ※
맑다.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목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 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일찍 출발해서 전북 옥구 지방까지 갔는데 병력과 전선, 그리고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라도의 제해권을 확보해서 왜군들이 도서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 《난중일기》 1597년 9월 ※
22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 목사 배응경, 무장 현감 이람이 찾아왔다.
23일. 맑다. 승첩 장계의 초안을 수정했다. 정희열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24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끙끙 앓았다. 김홍달이 찾아와서 만났다.
25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26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토록 나가지 않았다.
27일. 맑다. 송한, 김국, 배세춘 등에게 승첩 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가게 하였다. 정제는 부체찰사에게 보내는 공문을 가지고 충청수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28일. 맑다. 송한, 정제 등은 바람이 막혀서 다시 돌아왔다.
29일. 맑다. 장계를 가지고 송한 등과 정제가 다시 올라갔다.
● 충무공행록으로 보는 명량 해전
※ 《충무공행록》 ※
9월 16일 이른 아침, 적이 바다에 깔려 명량을 거쳐 우리 진을 향해 올라오므로 공(公)은 모든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가 막았다. 적은 열 겹으로 에워싸고 패를 갈라 차례로 싸웠는데 공은 닻을 내리고 배를 멈추었다.
적이 대장선인 줄 알고 마침내 333척이 나와 에워쌌는데 그 형세가 몹시 급해지자 여러 장수들은 공을 다시 구해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각각 1리(393m) 쯤이나 물러나므로 공은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매어 달고 지휘 독려하며 진군하였다.
‘닻을 내리고’ 라고 하였는데,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격군들까지 전투병으로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위 등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류에 떠내려갔다.
※ 《충무공행록》 ※
첨사 김응함이 배를 돌려 들어오고, 거제 현령 안위도 또한 다가오므로 공이 일어나 뱃머리에 서서 큰 소리로 안위를 부르며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라고 하였고, 다시 또 불러 “안위야, 정말로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물러간다고 살 듯 싶으냐!” 고 하자, 안위도 황급히 “예, 어찌 감히 죽기를 마다 하겠습니까” 라고 돌진해 들어가 싸웠다.
이에 적의 배 3척이 안위의 배에 달라붙어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으므로 공은 자기 배를 돌려 들어가 안위의 배를 구출하자 안위도 죽기로 싸웠는데, 적선 2척이 무찔러지자 적의 기운이 조금 꺾이면서 잠깐 사이에 적선 30척이 연달아 깨졌으며, 죽는 자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2척… 30척이 연달아 깨졌다’ 고 하였는바, 화력이 절대 우세였음을 알 수 있다. 화력이 우세였던 이유는,
첫째,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왜군들은 조총과 일본도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이순신은 왜장과 그 호위선단이 12시~2시 사이에 전면 공격에 나설 것임을 예상했고, 이에 대비해서 대포, 발화탄, 질려탄 및 기타 인화성 물질들을 많이 준비해 놓고 있었다.
셋째, 닻을 내리고 격군들까지 전투에 가담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이러한 조건들로 왜군 지휘부와 호위선단이 해전 초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자 왜군 함대는 전의를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충무공행록》 ※
공이 한산도에 있었을 때 왜인 준사라는 자가 안골포 적진에서 죄를 짓고 항복해 와서 우리 진중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날도 준사가 공이 타고 있는 배에 같이 있다가 바다에 떠 있는 적의 시체들 속에 있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있는 것을 굽어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안골포의 왜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요!” 하고 외쳤다.
공이 갈고리로 뱃머리로 끌어올리게 하고 보니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준사가 좋아라고 날뛰며 “맞아, 이 자가 바로 마다시요!” 하므로 공은 그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구루시마를 죽여서 왜군들에게 토막 난 사령관의 시체를 확인시켜 준 것이 해전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 《충무공행록》 ※
그날 피난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적선이 들어오는 것을 3백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몰랐다. 그 큰 바다가 꽉 차고 바닷물이 안 보일 지경이었는데 우리 배는 다만 10여 척이라 마치 바위로 계란을 누르는 것 같았을 뿐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막 패전한 뒤에 갑자기 큰 적을 만났기 때문에 기가 죽고 혼이 빠져 모두들 달아나려고만 할 뿐이었다. 다만 공만이 죽겠다는 결심으로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자 이내 적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니 마치 구름과 안개 속에 파묻힌 것과 같이 되었는데 시퍼런 칼날이 공중에 번뜩이고 대포와 우레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피난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고 통곡하며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다만 통제사 대감만 믿고 온 것인데, 이제 이렇게 되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나는데 공이 탄 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적도 다시 패를 갈라 차례로 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 하였고, 결국에는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로부터 남쪽 백성들의 공을 의지하는 마음은 더욱 더 두터워졌다.
‘종일토록’ 이라고 하였는데, 아침 전투 준비 때부터 해전 종료 시점인 오후 3시 이후 전리품 수거단계까지를 포함하면 ‘종일’ 이 된다.
※ 《충무공행록》 ※
그때(칠천량해전 때) 다 쓰러진 뒤에 임명을 받아서 지치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았지만, 군량이나 무기 등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다가 철 또한 늦은 가을이어서 해상의 날씨가 무척 찼기 때문에 공이 그것을 걱정하다가 문득 몇 백 척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난선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영을 내려 물어보았다.
“큰 적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여기에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은 다만 대감님만 바라보고 여기에 있습니다” 고 하였다. 공은 다시 영을 내려 물어보았다.
“너희들이 내 명령대로 한다면 내가 너희들의 살 길을 가리켜 주겠지만, 만일 따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다.”
이에 모두들 말하였다. “어찌 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은 다시 영을 내리기를 “지금 군사들이 배도 고프고 옷도 없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찌 적을 막아주기를 바라느냐. 너희들이 만일 여벌옷이나 양식을 내어서 우리 군사들을 도와준다면 이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공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그대로 실행하여 마침내 양식을 얻어 여러 배에 갈라 싣고 왔으며, 또 군사들도 옷을 입지 않은 자가 없었기에 승첩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민 합동 경영이 자리잡고 시작했고, 이 같은 합동 체제는 전란이 끝날 때까지 조선 수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 《충무공행록》 ※
이보다 앞서 공은 피난민들에게 명령하기를 “적들을 피해서 배를 옮겨 가라!” 고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공을 버리고 떠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량 싸움에서 공은 그 모든 배들로 하여금 먼 바다에 늘여 서서 마치 후원하는 배처럼 꾸미게 했다. 그리고 공은 앞으로 나아가 힘써 싸웠으므로 적들이 크게 패했으며, 또 우리 수군이 아직도 건재해 있다고 생각하여 감히 다시는 침범하지 못했다.
전선으로 위장한 어선들에 관한 기록이다.
※ 《징비록》 ※
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을 진도의 벽파정에서 쳐부수고 왜장수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잡아 죽였다.
처음에 이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보니 배가 10여 척에 불과했다. 이때 해안가의 백성들로 배를 타고 피난길에 나섰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순신이 여러 길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을 군(軍)의 뒤에 늘어서 있게 하여 싸움을 돕는 형세를 취하도록 했다.
왜적의 장수 마다시는 해전을 잘한다고 이름났는데 그는 전선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침범하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거느린 군사와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서로 만났다. 이때 이순신은 12척의 배에 대포를 싣고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니 왜적들은 패하여 달아나버렸다. 이에 이순신이 거느린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8천여 명이 있어서 고금도에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식량이 궁핍할 것을 근심하여 해로 통행첩을 만들어 명령하기를 “3도(경상 · 전라 · 충청도)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사(公私) 선박으로서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선으로 인정하고 통행할 수 없게 하겠다” 고 선포하였다.
이에 난을 피하여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와서 통행첩을 받아갔다. 이순신은 그 배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쌀을 바치게 한 후 통행첩을 발급해 주었는데,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으로 정했다. 이때 피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왔기 때문에 곡식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통행을 금지당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섬을 확보하였다. 이순신은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 쇠를 거두어 모아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만드는 등 모든 일이 잘 추진되었다. 이때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병화(兵禍)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다 이순신에게 와서 의지하였으며,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이들을 성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순신은 늘 이 같은 경영에 노력했기 때문에 평소에도 강한 수군력을 유지했고, 울돌목해전을 전후해서는 수군력을 조기 회복시킨 것은 물론 백성들의 생업도 조기에 안정시켰다.
● 명량에서 불가능의 목을 치다!
울돌목해전은 이순신 스스로도 천행(天幸)이라고 했을 만큼 극적인 해전이었지만, 이순신은 처음부터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3척 대 333척이라는 불가능한 전쟁.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대결이었기 때문에 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설들이 등장했으며,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논란 중에 있다.
아래는 KBS 역사스페셜이 다루었던 명량대첩의 ‘쇠사슬론’ 에 대한 가설이다.
※ 《역사스페셜》 ※
그러나 울돌목에서는 학익진법도 소용이 없었다. 잘못하다간 빠른 물살에 배가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울돌목 현지 주민들에게는 이순신이 어떻게 싸웠는지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가장 폭이 좁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쇠줄을 연결해서 당겨 왜적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과 10년 전까지도 쇠사슬을 묶었던 고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물살이 빨라서 학익진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12시~2시 경에는 학익진법을 펼칠 수 있었다. 울돌목의 물살 속도와 학익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고 했고, 곧 쇠사슬에 얽힌 전설을 소개했다.
※ 《역사스페셜》 ※
이순신 장군의 무용담을 뒷받침하는 기록을 전남 강진의 금강사라는 곳에서 찾았다. 명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싸운 김억추 장군을 기리는 이 사당에 오래된 책이 한 권 전한다.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라는 기록이 보인다.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 는 내용이다. 어떻게 철쇄로 배를 걸어 깨뜨릴 수 있었을까?
목포 해양방어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배를 끌어당길 때 이런 막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썼을 것이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M 안팎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M 안팎의 쇠사슬이 필요했을 것이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면 4톤 안팎일 것으로 보인다.
‘배를 끌어당길 때(인양할 때) 쓰는 막개’ 는 지렛대의 원리이고, 또 연자방아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쇠사슬의 무게가 4t이라면 과학적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울돌목해전 당시 왜군들은 조선 함대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게다가 안위, 김응함, 이순신의 선봉 함대가 왜선단 속에서 백병전에 가까운 혼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쇠사슬 작전이 가능했을까?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 은 임진왜란 후 어느 수사(水使)에 의해서 제시되었거나, 혹은 임진란 때 있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난중일기》와 《이충무공행록》에 그 기록이 없는 것이다.
※ 《역사스페셜》 ※
수중 철쇄는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을 것이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일본 대선단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전선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그러나 일본 수군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도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면서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부어대며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라고 했는데, 만약 왜군 선두가 쇠사슬에 걸렸다면 뒤를 따르던 왜선들은 물살이 약한 해협의 가장자리로 비껴 설 수도 있고, 제 자리에서 후진해 돌아갈 수도 있다. 또 일본 사무라이들이 육지로 올라가 막개 초소를 공격했다면 막개 수비병들이 무슨 재주로 버틸 수 있었겠는가.
※ 《역사스페셜》 ※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일본 수군은 극도로 사기가 떨어진다. 조선 함선은 떠내려 가는 일본 수군을 화포로 쏘며 추격해 완전히 섬멸해버린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등으로 해전 때의 조류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오후 1시경, 물길이 바뀌는 시점 전후의 1시간 정도는 유속이 완만하기에 조 · 왜 어느 쪽이든 조류가 주는 영향은 적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스페셜>에서는 과장되게 설명했다.
한편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함대의 벽파진 도착은 8월 29일이다. 야습에 대한 우려 속에 9월 14일까지 벽파진에 머물렀으며 실제 왜군들의 야습도 있었다. 만약 쇠사슬이 있었다면 함대를 우수영 앞바다로 옮겨서 보다 안전하게 지내지 않겠는가.
9월 15일이 되어서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는데, 이순신은 옮긴 이유를 ‘몇 척 안 되는 전선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리고 진을 옮긴 후, 장병들에게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한다” 고 했고, 9월 16일에는 그렇게 실천해서 승리했다. 즉, 쇠사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또 ‘거북선+학익진의 원리’ 로 조명해 보면 이미 20세기 세계 수군들은 이 같은 해전원리를 이어받아 그 위력을 충분히 검증해 주었다. 쇠사슬과 막개가 있었다면 이는 전라우수영의 시설이므로 그에 대한 정비와 지휘는 김억추 우수사의 소관이다. 그렇다면 김억추는 해전 때 후군이 아닌 선봉을 맡았어야 했다. 그러나 2마장이나 떠내려 간 김억추가 멀리 있는 쇠사슬과 막개, 그리고 장졸들을 어떻게 지휘했겠는가.
김억추가 지휘하지 않았다면 이순신이 지휘했겠지만, 그러나 《난중일기》와 《이충무공행록》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쇠사슬과 막개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중요 역할을 했다면 왜 기록이 없겠는가.
정조대왕의 왕명에 의해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된 것은 1795년이다. 이 책을 읽은 강진(康津)의 유림들이 충무공의 울돌목해전과 고하도 · 고금도 시절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금강사(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파리)를 세웠다. 당시의 고금도는 강진군 소속(오늘날은 완도군 소속)으로 김억추 수사의 관내인 전라우수영 소속 고을이었다. 그래서 금강사에는 김억추 장군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울돌목해전에서의 승첩 비결이 ‘쇠사슬론’ 에 있었다면 《난중일기》에는 왜 그와 같은 언급이 전혀 없을까? 또 쇠사슬론을 수용한다면 《난중일기》에 기록된 백병전에 가까웠던 해전 내용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총사령관이 남긴 《난중일기》를 부인하고 부사령관이 남겼다는 《현무공실기》를 수용한다는 얘기인데, 참으로 듣기 민망한 주장이다.
《난중일기》와 《현무공실기》의 내용이 이렇듯 서로 상충 · 상반되어 있는 현실이다 보니 오늘날까지 울돌목해전의 신비는 여전히 해독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울돌목해전의 원리를 이순신 해전 원리의 진수로 본다면 그 진수가 아직도 해독이 안 되고 있음인데, 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 자산의 실체를 아직도 규명하지 못해서 세계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역시 민망스러운 일이다.
※ 《임진왜란 해전사》 ※
다음으로 명량 해협의 철쇄 가설 여부를 살펴보면, 우선 조성도는 앞 논문에서 “철쇄를 설치하여 일본 전서을 격침시켰다는 설이 전해온다” 고 소개하면서, 사실 여부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조원래는 이에 대해 사실로 확정하는 언급은 없었지만, 긍정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그는 좌수영에 철쇄를 가설한 사실과 일본 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저서 《조선침략전쟁의 일한 사적》의 관련 내용 등을 소개하면서 명량 해협에 철쇄가 가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성도, 조원래 등은 철쇄 가설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입장인 듯하다. 이들 학자들은 ‘쇠사슬론’ 의 규명에 앞서서 먼저 ‘직충(直衝) · 우충(又衝) · 이금(而今)’ 에 대한 오역을 바로잡고, 또 20세기 세계 수군들의 충무공 연구사를 참조해서 《난중일기》에 기록된 ‘거북선+학익진’ 의 과학적인 해독을 위해 노력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쇠사슬론’ 에 막연히 끌려다니는 감을 느끼게 한다.
※ 《임진왜란 해전사》 ※
그러나 앞에서 본 정황으로 볼 때 이순신이 함대를 인수한 후 명량해전 이전까지 철쇄가 가설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명량해전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이를 증명할 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좌수영의 철쇄는 이곳 명량 해협의 철쇄와는 무관한 것으로 서로 연결시켜 볼 어떤 이유도 없다.
만약 철쇄 가설이 승리의 원인이라면 당시 사료나 공식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도 부정적인 판단을 갖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 해전의 결과로 일본 전선 31척을 격침하고 수백 명을 사살했다는 《실록》의 기록 외에는 철쇄를 이용한 전과 내용에 관한 그 어떤 기록도 당시 사료나 공식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순신이 통제사에 재임명된 것은 1597년 8월 3일 진주에서이다. 같은 무렵 김억추는 이억기의 후임으로 전라우수사에 임명되었다. 김억추가 소수의 수병(水兵)을 이끌고 이순신과 처음 만난 것은 1597년 8월 26일 어란포에서다.
김억추가 이순신을 만나기 전에 전라우수영에 들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우수영에 들렀다 하더라도 쇠사슬이 없었다면 맨손인 김억추가 값비싼 쇠사슬을 준비하기에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억기 수사 때 쇠사슬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억기 함대가 칠천량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이 우수영에 전해지자 우수영을 수비하고 있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갔고, 도망가면서 값나가는 물건들은 모두 가지고 갔을 것이다. 막개를 돌리던 소는 끌고 갔을 것이고, 쇠사슬은 토막을 내어 나눠가졌을 것이다. 당시 쇠는 값비싼 물건이었으므로 피난 중에 쇠사슬을 팔아 연명하기 위해서다.
우수영 관내가 이렇듯 텅 비게 되자 다음에는 피난민과 현지 백성들이 들어와서 모든 것을 나눠 가져갔을 것이므로, 이순신과 김억추가 8월 27일 벽파진에 이르렀을 때에는 우수영은 이미 황폐화되어 있었다.
칠천량 패전 후 전라우수영 우후 이몽구는 병장기를 챙기지 않고 달아난 죄로 처형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또 전라우도 우후 이정충도 도망갔기 때문에 곤장을 맞은 바 있고, 무안 현감 · 목포 만호 · 다경포 만호 등도 도망간 죄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갔다. 우수영 관내 지휘 책임자들부터 이렇게 도망간 상황에서 막개와 쇠사슬이 있었다면 과연 온전했겠는가.
※ 《임진왜란 해전사》 ※
18세기의 사료로서 철쇄 기록을 담고 있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는 임란 해전에 관한 기록이 극히 간략할 뿐 아니라 부정확하고, 그가 여러 지방을 돌아보며 현지에서 들은 설화(說話)를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빙성이 부족하다.
《택리지》는 충무공 사후 130년이 지난 영조 시대에 출간되었다. 때문에 이중환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울돌목해전 기록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혹 보았다 하더라도 20세기 세계 열강 수군들의 연구내용을 참조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이중환이나 이중환에게 전설을 전해준 사람들로서는 울돌목해전에 대한 해독이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중환은 실사구시적인 실학자로서 울돌목 현지답사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도 답사 현장에서 막개를 본 것이 아니라 전설을 듣고 기록해 둔 것이다.
※ 《임진왜란 해전사》 ※
한편, 철쇄 가설을 긍정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다른 기록으로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뛰어난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일본 전선을 격침했다는 《호남절의록》과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펴낸 《현무공실기》가 있다.
《현무공실기》는 김억추가 집필한 것이 아니며, 이중환의 《택리지》 이래 전해져 오는 전설들을 오늘날의 후손들이 모아서 엮은 것이다. 청주 김씨 문중과 수군사관학교 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을 것인바, 향후 점 더 자세한 연구가 기대된다.
※ 《임진왜란 해전사》 ※
그러나 이들 자료 역시 후대에 꾸며진 설화를 채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 후자는 최근에 만들어진 전기로서 철쇄 가설을 증명할 만한 사료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철쇄 가설은 당시의 정황이나 관련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사실로 보기 어렵고, 단지 후대에 ‘조상의 전쟁 영웅담’ 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 라고 볼 수 있다.
‘쇠사슬론’ 에 대해서는 이상에서와 같은 이유로 불신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했는데, 《난중일기》와 기존 해석들에 대한 반론이다.
※ 《임진왜란 해전사》 ※
다른 한 가지는 “명량해전의 전장이 기존에 널리 알려진 울돌목일까?” 라는 문제 제기에 있다. 지금까지 명량해전의 전장은 명량의 가장 좁은 곳 근처로 알려졌고, 해전을 설명하는 지도도 이와 같이 작성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해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이곳은 지형이 좁을 뿐 아니라 물살이 가장 빠른 곳이기 때문에 조류가 정지된 순간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은 어느 곳에서 펼쳐졌는가. 그 해답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9월 16일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아침 일찍 별망군이 전한 일본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후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일본의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명량해전의 전장은 우수영 바로 앞바다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곳은 해협을 통과하여 우측으로 구부러진 곳으로 해협의 폭이 보다 넓어지고 유속이 다소 약해지는 곳으로서 해전이 가능한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두 지도로 비교하면 위와 같다.
이상의 전장 문제는 근거할 만한 문헌 자료가 없는 한계가 있지만, 지형적으로 볼 때 우수영 앞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명량해전이 이상과 같은 쟁점들을 남긴 것은 이 해전이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우리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최악의 순간에 패잔선과 패잔병들만을 거느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에 비해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부족했던 탓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에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려워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길목을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 오늘날의 진도대교가 있는 위치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막아섰다면 ‘쇠사슬론’ 은 더더욱 적용하기 어려워진다.
또 그곳에서 닻을 내렸다면 유속이 상당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버티고 있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왜군의 돌격선인 중간 왜선은 선체와 노의 크기가 작아서 판옥선만큼 버티기가 어려웠겠고, 그 결과 조류가 서쪽으로 흐를 때 몇 척은 서쪽으로 떠내려갔기에 김억추의 후군선단과 어선단의 공격을 받아 깨졌을 것이다.
한편, 조수가 동쪽으로 흐를 때에도 이순신의 판옥선단은 닻을 내린 후 버티고 서서 왜군의 중형선들이 동쪽으로 퇴각해 가기를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순신이 밝혀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한다’ 는 해전 이론이다.
그럼 이민웅 교수가 제시한 ‘우수영 앞바다론’ 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또한 이 이론에 근거하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우수영 앞바다론’ 도 그다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편, 이민웅의 《임진왜란 해전사》에서는 진해 수군사관학교에 기증된 고증이 잘못된 거북선을 모델로 삼았으며, 이 같은 연유에서인지 20세기 세계 수군들의 학익진 승계사도 소개하지 못한 것 같다.
※ 《경제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
장군은 명량을 선택했다. 천혜의 지형과 조류를 활용하기 위해서다. 명량해협의 폭은 평균 500m이지만 해협 양안에 암초가 있어 배가 다닐 수 있는 너비는 평균 400m에 불과하다. 명량해협 중에서도 울돌목은 너비가 120m로 가장 좁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이곳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좁은 곳을 120m로 가정하고 지도를 보면 이순신의 기함이 위치한 곳은 그 정도로 좁아 보인다. 그런데 이 지도는 옛 그림이 아니고 오늘날에 그린 모조품으로 보인다. 만약 모조품이 아닌 진품이라면 국보급 그림이 될 것이다. 아무튼 참고로 삼은 옛 지도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모조품만으로 어떻게 가장 좁은 곳을 120m로 단정하고 이순신의 해전사를 논하겠는가.
※ 《경제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
장군은 12척의 배를 일렬로 정렬시켰다. “적이 비록 1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맞서 싸워라!” 장군은 조선 수군을 독려했다.
‘12척의 배를 일렬로 정렬시켰다’ 는데 이렇게 되면 12척은 따로 따로 포위되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는 왜군들에 의해 각개 격파되고 말았을 것이다. 즉, 안위의 배처럼 포위를 당해도 구원해 주는 이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 《경제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
철쇄를 감아라!
그 순간, 장군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는 급히 깃발을 올렸다. 장군선에서 오른 낯선 깃발, 그것은 장군이 육지로 보내는 신호였다. 그러자 진도와 해남의 양쪽에 숨어 있던 일단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렸다. 그것은 마치 연자방아 같은 기구였다. 양쪽에서 동시에 물레를 돌리자 물레통에는 쇠줄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쇄였다. 명량의 바다를 가로막은 채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쇠줄, 그것이 팽팽해진 것이다. 지금의 진도대교 위치였을 것이다. 왜군의 배는 배 밑바닥이 뾰족하다. 따라서 배의 바닥이 물 속에 비교적 깊이 잠기는 이른바 첨저선(尖底船)이다.
조류를 타고 장군선을 향해 달려들던 왜선의 선두가 쇠줄에 걸렸다. 왜선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마치 암초에 걸린 듯 선두함들이 중심을 잃었다. 연달아 추돌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순식간에 왜군 함대는 진용을 잃고 서로 부딪히며 허우적댔다. 장군이 다시 북을 울렸다. 장군선에서 일제히 화포와 화살이 날았다. 장군선의 화포와 화살은 철쇄에 걸려 허우적대는 왜선을 정확하게 타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해전법인 ‘거북선+판옥선단의 해전법’ 에 대한 해설은 일체 없고, ‘일자진법+쇠사슬론’ 으로 해전을 설명하고 있다.
쇠사슬을 당겨서 왜선들의 접근을 막았다는데, 이 설명대로라면 9월 16일에는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왜선들은 부셔지고 패퇴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는 기록이 있고, 《이충무공행록》에는 ‘적이 대장선인줄 알고 마침내 333척이 나와 에워쌌는데’ 라는 기록이 있다. 즉, 쇠사슬로 왜선단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확인케 해주는 기록들이다. 재차 언급하지만, 만약, 쇠사슬을 당겼다면 《난중일기》와 《이충무공행록》에는 왜 쇠사슬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
※ 《이충무공행록》 ※
장군은 홀로 거의 한 시간을 싸웠다. 철쇄에 걸려 허우적대는 왜선에 대항해 장군선이 선전을 하자 물러나 있던 조선 수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척 두 척 장군선 가까이 다가와 전투에 참여했다. 이제 조선 수군은 대오를 정비했다. 전투는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순신을 돋보이게 설명하려다 보니 ‘장군 홀로 거의 한 시간을 싸웠다’ 고 과장되게 표현하였으나, 이 설명대로라면, 이순신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상대로 사냥하듯이 철쇄에 걸려 허우적대는 왜선을 상대로 홀로 싸운 것이 된다. 이순신의 해전 방식은 전 함대가 왜군 지휘선단을 목표로 일시에 집중타를 가해서 초토화시키는 속공전 방식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기함이 1시간이나 홀로 싸웠다는 것은 이순신이 지향하는 해전 방식과 어긋난다.
또 혼자서 1시간이나 200척을 상대로 싸웠다면 이순신의 기함에는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이다. 더구나 여러 장수들의 배가 멀리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웠고→김응함과 안위가 달려와서 호통을 듣고→돌격 개시까지 1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긴 시간이다.
또 ‘한 척, 두 척 장군선에 가까이 다가와 전투에 참여했다’ 고 했는데, 가까이 다가온 정도가 아니라 안위와 김응함은 사생결단으로 왜선단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 《이순신과 히데요시》 기타노 쓰기오 ※
명량 수로의 조류는 하루 네 번씩 그 방향을 바꾼다. 그것은 예고도 없다. 일본 수군 함선들의 발길이 갑자기 둔해졌다. 아니 역류를 타게 되어 거꾸로 밀려나는 형편이 되었다. 일본 수군의 선대형(船隊形)에 혼란이 왔다.
‘그것은 예고도 없다’ 고 했는데, 하루 4번씩 방향을 바꾼다면 하루 4번 예고된 것이다. 따라서 예고도 없다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선대형에 혼란이 왔다’ 고 했는데, 왜군들은 유속이 완만한 12시 무렵에 울돌목 돌파를 시도했으므로 선대형에 혼란이 온 것이 아니라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이순신과 히데요시》 기타노 쓰기오 ※
이 명량해전의 쾌승으로 원균이 잃은 전라도 해역의 제해권을 회복하고 그 후 일본 수군에게 서해 진출의 야망을 포기시켰던 것이다. 결국 전후 2회에 걸친 전쟁(戰爭)을 통해서 일본 수군이 가장 멀리 서쪽으로 가본 곳이 이 명량이었다. 조선 수군은 뜻하지 않은 승리를 얻었다.
이순신에게는 ‘뜻하지 않은 승리’ 가 아니라 예견된 승리였다. 그래서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 과 ‘필사즉생(必死則生)’ 의 어록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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