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징비록 - 서설(序說)|

구름위 2013. 5. 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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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명상(名相)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 임진 국난(國難)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징비록》이란 책 이름은 그의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시경(詩經)》의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 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니, 곧 임진란 중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에는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은 이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동아 전국의 전쟁으로 파악하여, 일본의 이러한 대륙진공적 침략을 조선과 중국이 합세하여 적군을 격퇴시킨 방위전쟁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곧 이러한 관점에서 적군의 침범을 받은 즉시 중국에 사실을 보고하고 구원군을 보내주기를 요청했으며, 구원군이 오기 전에 우리 자체의 힘으로 대항 방위했다. 그는 훗날에 와서 이순신의 한산도해전 승첩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정(評定)했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양까지 뒤따라와서 우리 조정에 글을 보내 ‘일본의 수군 10여 만 명이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이니 대왕(선조)의 행차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 라고 위협했다. 적군은 본시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쳐오려 했는데, 이순신의 이 한산도 한번 싸움에 힘입어 마침내 적군의 한쪽 세력을 꺾었기 때문에 소서행장은 비록 평양을 점거했지만, 형세가 후원이 없어 더 전진하지 못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 · 충청도와 황해도 · 평안도 연해 지역의 전부를 보전하여, 군량을 전선에 보급시키고, 조정의 명령을 각 지방에 전달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루게 된 것이다. 또 중국에서도 요동의 여러 지방이 동요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육로로 나와서 적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한산도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은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上賞)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유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副將)에 불과했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을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 라고 했다.

 

성호 선생의 이 논설은 서애 선생의 가장 큰 공로는 다른 일보다도 충무공을 등용시켜 나라의 위기를 구제한 한 가지 일에 있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징비록》의 맨 끝부분에서는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순신은 그 선대부터 강관, 장령 등의 벼슬을 하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은 강직 불굴한 가풍이 있었다. 이순신은 젊었을 때부터 영특하고 활달하여 어떤 사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았다. 무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권세가에 붙어서 승진하기를 희망하지 않았으며, 정도(正道)에 어긋나면 직속상관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의 수양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간(才幹)은 있어도 명운(命運)이 없어서 가졌던 재간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애석한 일이다.”

 

이순신을 천거, 등용시켜 임진 국난을 함께 극복한 유성룡이 그의 재간을 알아주고 그의 장렬한 순국(殉國)을 슬퍼한 충정(衷情)을 이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