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 1598년 9월 20일 ※
맑다. 오전 8시에 묘도(여수시 묘도동)에 이르니 명나라 장수 유정 제독이 벌써 진군하였다. 적을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크게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조 · 명 수륙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난중일기》 1598년 9월 ※
21일.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종일 싸웠으나 물이 너무 얕아서 진격할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가볍고 빠른 배를 타고 들어와 정탐하려 할 때, 허사인 등이 추격하였더니 적들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배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도독(진린)에게 바쳤다.
22일.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서로 싸우다가 유격이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사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고 지세포 만호도 탄환에 맞았다.
24일. 맑다. 충청병사 이시언의 군관 김정현이 왔다 남해 사람 김덕유 등 다섯 사람이 나와서 그 고을 적의 상황을 전하였다. 진대강(유정 제독의 연락관)이 돌아갔다.
25일. 맑다. 진대강이 다시 돌아와서 유 제독의 편지를 가져와 전하였다. 이날 육군은 비록 공격을 하려고 했으나 군사 장비가 완전하지 못했다. 김정현이 와서 보았다.
유정 제독의 연락관 진대강이 작전 협의서를 가지고 왔다.
※ 《난중일기》 1598년 9월 ※
26일. 맑다. 육군의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저녁에 정응룡이 와서 북도의 일을 말하였다.
27일. 아침에 잠시 비가 뿌리고 서풍이 크게 불었다. 형개 군문이 글을 보내어 수군이 신속히 진군한 것을 가상히 여긴다고 하였다. 식후에 진 도독을 보고 조용히 의논하였다. 종일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저녁에 신호의가 와서 보고 잤다.
28일. 맑다. 서풍이 세게 불어 크고 작은 배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30일. 맑다. 이날 저녁에 왕 유격, 복 유격, 이 파총이 전선 1백여 척을 거느리고 진에 왔다. 불빛이 휘황하여 적도들의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명나라 함대가 증강되고 있다.
‘4로군 전략’ 은 명 황제와 조선 임금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 《난중일기》 1598년 10월 1일 ※
맑다. 진 도독이 새벽에 유 제독에게로 가서 잠깐 서로 이야기하였다.
진린과 유정 제독 간에도 작전협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 《난중일기》 1598년 10월 2일 ※
맑다. 오전 6시경에 진군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건너가 정오까지 싸워서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황세득)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도 죽고, 제포 만호 주의수와 사량 만호 김성옥, 해남 현감 유형, 진도 군수 선의경, 강진 현감 송상보는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정오까지 싸웠다’ 는 기록으로 보면 종전의 속공전과는 달리 해전 시간이 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니시 군이 ‘왜성+방파제에 의한 수비전’ 을 펼쳤기 때문이다.
황세득(이순신의 사촌 자형)과 핵심 군관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전투가 점차 격렬하고 비장해져 가는 모습이다. 노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8년 10월 3일 ※
맑다. 진 도독이 유 제독의 비밀 서신을 받고 초저녁에 나가 싸워 자정에 이르기까지 적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중형선인) 사선 19척, (대형선인) 호선 20여 척이 불탔다. 도독이 엎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안골 만호 우수도 탄환에 맞았다.
오늘날의 우리는 유정 제독이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고니시를 놓아 주었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때까지는 유정과 진린은 수 · 륙으로 연합해 싸웠고, 이순신은 진린 도독 측의 피해와 진린의 독전 상황을 증언해 두었다. 그 내용을 해석하자면 ‘도독이 분전하며 애썼던 일은 이루 형언할 길이 없다’ 이다.
※ 《난중일기》 1598년 10월 ※
4일. 아침에 배를 출발하여 적을 공격하며 종일 싸웠다. 적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5일. 맑다. 서풍이 세게 불어 배들이 간신히 정박하고 있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6일. 맑다. 서풍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 “유 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 고 하였다. 통분, 통분할 일이다.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권율과 이순신 등은 조정으로부터 “물러가는 왜군의 수레 한 개라도 돌려보내지 말고 응징하라” 는 엄명을 받고 있었는데, 명의 육군이 퇴각하려 한다는 소식이 왔다. 이순신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명군과의 수륙 합동작전을 학수고대해 왔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명군은 2~3일 정도 함께 싸우는 듯하더니 이내 퇴각하려고 했기에 통분했다.
명군은 그렇다 치고, 이 무렵 조선 육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제2차 울산 왜성 공격 때 조선군은 약 5천 명이 동원되었고, 사천 왜성 공격 때에는 정기룡 경상병마사의 2천2백 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그러면 순천 왜교성 전투에 동원된 조선 육군의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약 5천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아무튼 독자적으로는 왜교성 하나도 공격할 수 없었을 만큼 초라해진 조선 육군이었다. 이순신의 ‘통분’ 에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한 개탄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 《난중일기》 1598년 10월 ※
7일. 맑다. 유 제독이 보낸 군관이 도독부에 와서 보고하기를, 육군은 잠깐 순천으로 퇴각하여 다시 정비한 후에 나아가 싸우려 한다고 하였다. 아침에 송한련이 군량 4섬, 조 1섬, 기름 5되, 꿀 3 되를 바치고 김태정이 쌀 2섬 1말을 바쳤다.
9일. 맑다. 육군이 이미 철수하였으므로 도독과 함께 배를 거느리고 떠나 바닷가 정자에 이르렀다.
명의 육군이 퇴각하자 조 · 명의 수군도 물러 나오고 있다.
10월 13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기록이 없다. 기록이 있는 날도 몇 글자 정도이다. 내용을 보면 나로도 쪽으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는데, 고니시 군이 도주해 가지는 않는지 그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물러나는 모습이다.
고니시 군은 5백여 척의 대 선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요소요소에 첩보망을 깔아두면 대 선단의 기동은 사전에 포착해 낼 수 있다.
한편 고니시는 유정과 진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뇌물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11월 15일까지 부산에 집결하라” 는 철군 명령에 따라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 《난중일기》 1598년 11월 ※
8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고 어두워질 무렵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므로 곧 갔더니, 순천 왜교(승주군 해룡면 신성리)의 적들이 이달 초 10일 사이에 진을 철수하여 달아나려고 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통문으로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적들의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9일. 도독과 함께 일제히 행군하여 백서량(여천군 남면)에 이르러 진을 쳤다.
10일. 좌수영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
11일. 묘도(여수시 묘도동)에 이르러 진을 쳤다.
13일. 왜선 10여 척이 장도(광양군 골약면)에 나타났기에 곧 도독과 약속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추격하니, 왜선은 움츠러들어가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물러갔던 조 · 명 수군이 돌아와 장도 앞에 진을 치자 고니시는 대경실색했다. 1년 전 가토 군의 울산성이 포위되었을 때는 히데요시도 살아 있었고 철군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왜군 부대들이 구원해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히데요시도 죽었고 11월 15일까지 부산에 집결하라는 철수 명령도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귀국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고니시는 자신의 군대만이 외톨이로 남아 최후를 맞게 될 것을 생각하자 두렵고 막막했다.
※ 《난중일기》 1598년 11월 14일 ※
왜선 2척이 강화(講和)를 논의하기 위한 일로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니 도독이 통역관을 시켜서 왜선을 마중해 오게 하였다. 그들로부터 붉은 기(旗)와 환도(環刀) 등의 물건을 받았다. 술시(오후 8시경)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쳤다고 한다.
다급해진 고니시가 진린을 상대로 뇌물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8년 11월 5일 ※
15일. 이른 아침에 도독에게 가서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왜선 2척이 강화를 논의하기 위한 일로 두 번 세 번 도독의 진중으로 드나들었다.
16일. 제독이 진문동을 왜군 진영으로 들여보냈더니, 조금 있다가 왜선 3척이 말과 창, 칼들을 가져와서 도독에게 바쳤다.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보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자 왜적은 바다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고 하였다.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다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조선 수군의 제해권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도 고니시를 불안하게 했을 것이다.
대 선단을 거느리고도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조 · 명 연합 함대의 봉쇄망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고니시는 부랴부랴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니시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시마즈는 난감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이순신을 상대로 한 구원작전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인근의 아군을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은 무사도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또한 시마즈 군이 부산으로 이동해 가려면 노량을 거쳐야 남해로 나갈 수 있었다. 만약 조 · 명 함대가 노량을 지킨다면 이는 곧 자기 부대에 대한 공격이기에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고니시는 서쪽으로 진출한 왜군 총사령관 격이자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원을 결심한 시마즈는 철수 준비에 여념이 없던 부산 · 김해 일대의 왜군들에게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3백여 척 규모의 구원 선단이 편성되었다.
● 노량에 별이 떨어지다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어떤 인물을 부를 때 ‘성(聖)’ 자를 붙이는 경우는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두 분뿐이다. 예로부터 유교권에서는 성학인 대학(大學) 경전 8조목인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濟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 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에 한해 ‘성자(聖者)’ 라 부른다. 이것이 유교권에서 말하는 ‘성(聖)’ 에 대한 개념이며, 따라서 종교권에서 말하는 ‘성(聖)’ 에 대한 개념과는 다르다.
조선시대 때에도 임금이나 공자, 맹자 들의 성현들을 제외하고는 ‘성자(聖者)’ 라 칭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성자라고 불리게 된 것은 20세기 초 단채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등 ‘성(聖)’ 자가 내포하는 의미를 알았던 서당 출신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때문에 ‘성웅(聖雄) 이순신’ 이라는 공칭(公稱)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처럼 신격화나 우상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성자(聖者)로서의 면모를 십분 보여준 해전이었다.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밝은 빛을 발하듯이, 이순신은 스러져가는 심신을 일으켜 살신성인(殺身成仁)했고, 7년 전쟁을 갈무리한 이 해전에서 곡절 많았던 생을 마쳤다.
※ 《이충무공행록》 ※
11월 18일. 유시(저녁 6시경)에 적선들이 남해로부터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공은 도독과 약속하고 이날 밤 10시쯤에 같이 출발하여 새벽 2시쯤에 노량에 이르러 적선 5백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
이날 밤 자정에 공은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이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때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11월 18일 저녁, 왜성성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조 · 명 연합 함대에 ‘사천의 왜군들이 노량으로 이동했으며, 적선단의 규모가 수백 척에 달한다’ 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미 고니시의 탈출 계획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왜교성 앞에 복병 함대를 남겨 두고는 즉시 진린 함대와 같이 노량으로 향했다.
연합 함대의 규모는 250여 척에 병력은 약 2만 1천 명(조선군 8천 명, 명군 1만 3천 명). 함대는 진린의 본함대를 중심으로 좌선봉에는 등자룡 함대, 우선종에는 이순신 함대로 편성되었다.
11월 19일 새벽 4시경, 연합 함대는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결전에 임하는 조선 수군의 전의는 비장했다. 이들은 지난해 칠천량에서 수중고혼이 된 병사들의 유족이며, 정유재란 때 코 베이고 목숨을 잃은 백성들의 가족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비장했다.
연합 함대로서는 노량의 왜군들을 최대한 빨리 격파하거나 쫓아낸 후 고니시 군을 무찔러야 했다. 때문에 전투는 초전부터 총력전으로 시작되었다.
해전이 시작되자 조 · 명 연합 함대는 서양식 대포와 동양식 화약무기, 명나라의 최신식 화약무기뿐만 아니라 장작불에 불을 붙여서 던지는 근접전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한 총력공세로 왜군들을 몰아붙였다.
야간에 치러진 전투였던 관계로 해전은 초전부터 대혼전으로 접어들었다. 이 같은 야간 혼전 속에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속 선단이 야음을 틈타 진린의 본함대로 접근, 기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명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자 뒤로 밀렸고, 밀려나다보니 그만 뒤가 막힌 관음포구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야밤인 탓에 그곳이 포구임을 몰랐던 것이다.
진린의 함대는 곧장 관음포로 추격해 들어가 왜선단을 공격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왜선단이 사령관 시마즈를 구하기 위해 다가와 진린 함대를 포위하자 진린 함대는 역으로 포위되는 위기에 처해졌다. 이에 진린은 “나를 구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조 · 명 연합 함대의 단위 함대들은 즉각 진린의 기함을 구하기 위해 관음포로 향했다.
조선 함대로서는 응당 진린을 구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 무렵 명나라의 모든 장수들은 귀국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지만 진린만은 조선 조정과 이순신의 간청을 받고 끝까지 분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으로서는 군령을 떠나 의리와 도의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진린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명나라 좌선봉장 등자룡이 전사했기 때문에 진린마저 전사하고 이순신만 산다면, 훗날 명나라와의 정치 · 외교적 문제도 일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진린의 명령이 있은 직후 전 함대에 “진린 도독을 구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가 오전 7시경이었고, 음력 11월 19일이었으므로 날이 샐 무렵이었다. 그 무렵 왜군들은 진린의 함대와 접전을 펼치고 있던 관음포의 왜선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순신 역시 진린을 구하기 위해 관음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 순간 왜군들의 시야에 3도수군통제사의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이순신의 기함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 안까지 접근해 들어오자 왜군 진영에는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다.
이윽고 전 조총수들에게 이순신의 기함을 향해 사격을 명령하는 왜장들의 고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 마지막 유언
왜군들로서는 7년간을 기다려온 회심의 순간이었다. 때문에 생과 사의 기로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왜군 조총수들은 이순신의 기함 장대(함교)를 목표로 밀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수백, 수천 발의 조총탄이 탄막을 형성하며 이순신의 기함 장대로 쏟아졌다. 그 중 한 발이 2중 3중으로 쳐놓은 방패와 방패 사이를 헤치고 유탄처럼 날아들어 북을 치며 독전하던 이순신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어 가슴 부위에 박혔다.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아군에게나 적군에게나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의 말처럼 싸움은 한창이었다. 더구나 관음포 안에 포위되어 있는 진린의 함대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위급한 때에 자신의 죽음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조 · 명 연합 함대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고, 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만약 왜교성의 고니시 군이 협공해 온다면 그것은 연합 함대의 파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비극적 사태(예컨대 왜국의 재침)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자살설’ 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충무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는 말은 그때가 죽을 시점이 아닌 위기의 시점임을 강조한 것임을 명확히 해 두고자 한다.
때문에 ‘자살설’ 은 충무공이 ‘눈앞의 위기를 외면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는 주장이므로, 위기관리와 리더십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충무공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망발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전사(戰史)들을 보면, 전투(전쟁) 중에 지휘관이 죽는 경우 사망 사실은 철저한 보안에 부쳐져서 사망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엄중히 단속하였다.
바다 건너 히데요시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는 “나의 죽음을 아무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죽음을 앞둔 지휘관이 자신의 죽음이 전쟁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병책임과 동시에 마지막 명령인 것이다.
이순신 역시 그 같은 점을 고려해서 마지막 명령(유언)을 내렸고, 이순신의 임종을 지켜본 아들 회와 조카 완은 명령에 따라 북을 치고 독전기를 휘날리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지휘체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결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긴박하고도 충격적인 상황 하에서도 회와 완이 안정된 지휘체계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이러한 상황(수뇌진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평소부터 주지시켜 온 ‘비상 지휘체계 시스템’ 이 별탈 없이 가동되었기 때문이다.
노량해전은 진린을 구하려고 자신이 대신 전사한 살신성인의 해전사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곡절 많은 생을 마감하고 성자(聖者)가 되어 승천(昇天)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고금도 월송대에 가묘(假墓) 상태로 안치되었다.
이순신이 숨을 거둔 그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량해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허겁지겁 여수와 남해도 사이를 지나 부산→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고향땅을 밟은 고니시 군은 빈주먹에 초췌한 패잔군의 모습이었다. 고니시 군에 앞서 귀향한 왜군 부대들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고니시를 비롯해서 히데요시를 지지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등은 조선 출정으로 인한 전력 손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던 세력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가신 그룹의 몰락과 더불어 히데요시 정권과 히데요시 가문도 문을 닫았고,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려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후의 패자(覇者)가 되어 도쿠가와 막부 260년의 시대를 열었다.
구스도 요시아키가 쓴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천하재패 경영》이란 책에서는 도쿠가와 260년의 시대를 창출한 세키가하라 전투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 《천하제패 경영》 ※
세키가하라 전투-그때까지 쌓아올린 이에야스의 노력의 결과가 단숨에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은 7만4천 명, 여기에 비해 미쓰나리의 서군은 8만2천 명이었다.
숫자상으로는 서군이 유리한 싸움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네마와시(나무를 옮겨심기 1, 2년 전에 그 주위를 파서 큰 뿌리와 큰 줄기만 남겨놓고 잔가지들을 쳐서 옮겨심기 쉽도록 해놓는 일로서,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안배를 해 두는 일을 말함)로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어도 꿈쩍하지 않는 서군 세력이 속출했다. 영주들 가운데에는 센 쪽에 붙으려고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는 이도 있었다.
…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서군의 참가 병력은 3만 5천에 지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전투가 끝나고 보니 동군은 10만 4천으로 늘어나 있었다. 결국 천하 쟁취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문관으로 종군했고, 전쟁이 끝난 후 4촌(이순신의 아들 회, 조카 완) 등의 도움으로 이순신의 일대기인 《이충무공행록》을 출간(1609년)했다.
정조대왕이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을 당시 편집의 순서는 임금이 내린 교지, 거북선 관련 기록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이분의 《이충무공행록》, 그 밖의 후세인들이 남긴 잡록 등의 순서로 엮었을 만큼 《이충무공행록》의 권위는 중시되었다.
※ 《이충무공행록》 ※
19일 새벽에 공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공은 이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때 공의 맏아들 회(35세)와 조카 완(20세)이 활을 쥐고 곁에 서 있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말하기를,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곧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등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평소 신임을 받았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하였다. 이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대로 기를 휘두르며 독전하였다.
적이 도독의 배를 에워싸서 도독의 배가 거의 함몰당하게 되었을 때, 여러 장수들이 공의 배에서 지휘 독전하는 것을 보고 서로 다투어 달려들어 포위 속에서 (진린을) 구해 내었다.
옛날에는 싸움에서 장수가 죽으면 이기고 있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어 전투는 장수를 잃은 쪽의 패전으로 끝나는 경우가 흔하였다.
노량해전에서 만약 이순신의 전사가 외부로 알려졌다면 연합 함대는 파탄을 맞았을 것이며, 이순신을 비롯한 연합 함대 수뇌진의 시신마저도 빼앗겼을 것이다.
이순신은 이 같은 점을 우려해서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고 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말을 통해서 이순신은 그때가 ‘죽을 시점이 아닌 위기의 시점’ 임을 증언해 둔 것이다.
회와 완은 이 유언에 따라 울음을 참았고, 종 김이로 하여금 시신을 방 안(철판으로 장갑한 곳)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완은 계속 독전기를 휘둘렀으며, 회는 아버지가 잡고 있던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렸다. 그러는 중에 부상으로 실신했다가 깨어난 장대 책임군관 송희립이 들어와서 북채를 인계받았다.
이들 장대 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오전 10시까지 했고, 결국 진린 도독을 구해냈으며, 왜군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도주했다.
조 · 명 연합 함대로서는 몰살당할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독전(督戰)을 지속한 기함 측근들의 침착한 지휘와 독전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순신은 평소 이 같은 위기 상황을 대비해서 이들 측근들에게 많은 얘기(약속)를 했을 것이며, 지속적인 위기대처 능력을 배양했을 것이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위기관리 리더십이 빛을 발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필승의 신념을 접지 않고 야전의 지휘관에게 주어진 최고의 소명이자 가치라 할 수 있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명 전사(戰史)였다.
※ 《이충무공행록》 ※
전쟁이 끝난 뒤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 가까이 와서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속히 나오시오!” 하고 외쳤다.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면서 “숙부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고 하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며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공은 죽은 뒤에도 나를 구원해 주셨소!” 하고는 다시금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다.
도독의 군사들까지도 모두 다 고기를 내어 던지고 먹지 않았다.
위기에서 벗어난 진린은 승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순신의 기함으로 다가가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라고 외치며 이순신을 불렀다. 그러나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순신의 기함으로 건너와서 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였고 전사하게 된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넘어지고 주저앉기를 세 번이나 했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자신이 죽기 전 자신의 모습을 닮은 목상을 깎아두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죽지 않은 것처럼 곡도 하지 말고 목상을 앞세우고 서촉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나라 대장 사마중달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낌새를 알아채고는 제갈량의 군대를 추격했지만, 제갈량(목상)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추격을 단념하고 퇴각해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쫓아버렸다’ 는 고사가 생겼는데, 진린 도독은 이순신의 시신을 끌어안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면서 “공은 죽은 뒤에도 나를 구했구려!” 라고 했던 것은 이 같은 고사와 연관지어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순간의 장면이 이순신의 ‘은둔설’ 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진린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다 죽은 이순신의 시신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도 않고 통곡만 하고 물러간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방식에 어긋나는 일로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이충무공행록》 ※
영구(靈柩)는 고금도에서 떠나 아산으로 돌아왔다. 연로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통곡하며 뒤를 따랐다. 선비들은 제물을 차리고 제문을 지어 곡하며 마치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였다.
영구는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그해 12월, 아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매장되었으며, 그로부터 16년 후 지금의 장소(충남 아산시 음봉면)로 이장되었다.
※ 《이충무공행록》 ※
도독과 여러 장수들도 모두 만장을 지어 슬퍼하였으며 마지막 군사들을 철거하여 돌아갈 때에도 도독이 제사 지내려고 오겠다는 뜻을 미리 알려왔다. 그러나 마침 명나라 본국에서 귀국을 재촉하였기 때문에 아산 자택에는 가보지 못하고 백금 수백 냥만 보냈으며, 아산현에 도착해서는 공의 아들들을 만나 보았다.
회가 나가서 길에서 도독을 만나 말에서 내려 인사하니, 도독은 손을 맞잡고 통곡하며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회가 “선친의 장례도 미처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벼슬할 때가 아닙니다” 고 하였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초상 중에 있어도 공로와 상을 내리는 법전은 폐하지 않는데 그대 나라에서는 무척 더디다. 내가 상감께 말씀을 올리지!” 하였다.
위(임금)에서도 예관을 보내어 제사하고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진린이 벼슬을 추천하겠다고 하자, 회는 “선친의 장례(3년상)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이 말에는 ‘아버지께서는 할머니의 3년상을 치르지 못해 한이 많으셨는데, 저라도 아버지의 3년상을 모시고, 또 남편을 잃으시고 막내아들을 잃으신 어머니께 효를 다하며 살겠습니다’ 는 뜻이 담겨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회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회는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린은 귀국 후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지재” 라고 보고했는데, 이 말은 주나라의 강태공, 한나라의 장자방, 촉나라의 제갈량에게만 붙여졌던 인물평이다.
명 황제는 이 보고를 듣고 이순신에게 명나라 도독 벼슬과 8사품(도독인, 영패, 독전기 등 총 8가지)을 내렸다.
만약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유성룡이 전후 초야에 묻혀서 《징비록》을 남겼던 것처럼, 이순신도 자신의 문집인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를 바탕으로 《왜적토벌기(倭賊討伐記)》를 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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