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징비록 - 자서(自序)|

구름위 2013. 5. 1. 13:24
728x90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 임진왜란 전의 일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구명하기 위해서다.

 

아아! 임진년의 전화(戰禍)는 참혹했다. 수십일(俠旬=우리말 사전에는 열흘 동안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수십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서울 · 개성 · 평양이 함락되기까지는 60여 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동안에 삼도(서울 · 개성 · 평양)를 지키지 못했고, 팔방(조선의 행정 구역인 팔도를 지칭한 것)이 산산이 무너져서 임금께서 수도를 떠나 피란(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함)했는데, 그러고서도 우리나라에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또한 선대 여러 임금님들*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백성들 속에 굳게 결합되어, 백성들의 조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임금께서 중국(명나라)을 섬기는 정성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켜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여러 차례 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 대게 공이 있는 임금은 조(祖)로, 덕이 있는 임금은 종(宗)으로 일컫는데, 조선왕조에서는, 태조 · 세조 · 선조 · 인조는 공이 있는 임금으로 조라고 일컫고, 그 밖의 임금은 모두 종으로 일컬었다. 후대의 영조 · 정조 · 순조는 처음에는 종으로 일컬었으나, 뒤에 와서 추존하여 조로 고쳐 일컬었다.

 

《시경(詩經)》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 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목숨을 부쳐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우신 은전이 아니겠는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날의 일을 생각하니 그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용신(容身)할 수가 없다.

 

이에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 임진년(壬辰年=선조25년, 1592)부터 무술년(戊戌年=선조31년, 1598)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대강 기술하니 이것이 얼마 가량 되었고, 또 장(戕) · 계(啓)· 소(疏) · 차자(箚刺) · 문이(文移)와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했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모두 그 당시의 사적(事蹟)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또 어리석은 신하(유성룡)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