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이야기/요트 세계일주

요트 이삭호 항로 따라가 보기 7

구름위 2013. 4. 23. 11:44
728x90

이삭 소식 제 9 호

안녕 들 하시지요.  구정을 잘 보내셨는지요.  나는 Sulu해에서 보냈습니다.


예정대로 2월 10일(일요일) 오전 9시 마닐라 요트장 주유소 앞으로 배를 옮겨 디젤 180리터를 보급 받았습니다(토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13.88페소/리터, 약 380원/리터 비용으로 사전 티켓을 받아놨음).   

 

마닐라 요트클럽은 1927년 창립되어(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주요 메니져들은 현재도 외국인들이며, 시설은 오래 되어 화려한 멋은 없지만 오랜 전통이 베어 있으며,  방문객은 처음 1주일은 무료로 계류를 시켜 주며 샤워시설을 포함한 편의시설의 사용을 허락합니다.  

 

아주 좋은 체제로 우리 수영만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계류비 내용을 적으면 : Manila Yacht Club Fee Schedule(Jan. 2000)

  J. Visiting Yacht-(For Non-members)
     1st week                      :    Free
     Next 3 - week period    :   US $ 1.50 per liner ft/week
     2nd 4 - week period     :   US $ 2.00 per liner ft/week
     3rd 4 - week period      :   YS $ 2.50 per liner ft/week

 

마닐라만은 대체로 뒷바람을 받으며 무난히 빠져 나왔습니다.  
 중간에 어부가 쳐놓은 그물을 타고 넘었지만 이삭호가 훌-킬 정으로 그 장점을 십분 발휘했습니다.   

 

'민도로' 섬을 중간쯤 지날 때 배 옆에 뭔가 시커먼 게 있어 처음에는 고무보트 인줄 알았는데 큰고래이지 않겠습니까 ?   정신이 버쩍 들며 예전에 영국인 요트부부(헤일리 부부로 기억됨)가 고래에 받혀 배가 침몰한 후 오랜 기간 표류 생활하다 한국 배에 구조 됐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앞을 살펴보니 30미터쯤 전방에 큰고래 2마리가(우리 배 길이보다 큼) 나란히 붙어 배 앞길을 막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급히 배를 옆으로 돌리며 제발 우리한테 돌진해오지 말라하며 다가가자, 배가 가까워지자 물 속으로 쑤욱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숨을 죽이고 어디로 떠오르나 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배 우측의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참치 떼들이 물 밖으로 막 튀어 오르고 난리를 칩디다.   아마 고래가 잡아먹으려 했는지 고래에 놀랐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정말 고래의 주름살까지 아주 선명히 보았어요.   


그 날 저녁(2월 11 일) '민도로' 섬과 '파나이' 섬 사이를 통과하게 됐는데 달도 없이 깜깜한 밤에 바람이 점점 강해져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섬 옆을 지날 때는 일반적으로 뒷바람-옆바람을 받게 되는데 섬 사이의 골바람은 옆바람에서 약간 비켜 앞바람 쪽으로 돌아가며 풍속이 급작히 강해 짐).  




그런 고전 상태로 다음날 낮까지 계속 꼴랑거리는 파도와 싸우며 남으로 내려갔습니다(이삭은 배 길이가 짧아 파도가 오면 뱃머리가 파도에 자꾸 좌우로 돌아가 틸러를 잡고 있기가 매우 힘 듦).  

 

어쨌든 2 월 13일 들어 '니그로스' 섬 북단에 진입하여 다시 서쪽 연안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남은 거리로 계산해 보면 야간에 목적지인 '본보논' 앞에 도착할거 같아 오히려 쎄일을 내리고 엔진으로 천천히 연안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2 월 14 일 새벽 동이 트며 예정대로 니그로스 섬을 돌아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역시 예상했던 앞바람이 강하게 불어 닥쳤습니다.    


 

목적지까지는 약 15마일 정도 남았는데 앞바람에 전진하지 못하고 거의 제자리를 택킹으로 왔다 갔다만 하고 있는 겁니다.   하는 수 없어 또 다시 연안에 바짝 붙기로 했습니다(그 당시 이삭호의 수심계 및 어탐기 모두 작동치 않는 상태이었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오전 10시경 드디어 '본보논' 만의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420마일을 만 4일만에 왔음.  이삭호로는 좀 무리한 속도의 항해였음)  



이제부터는 수월히 만 안으로 진입하니 앵커링 중인 여러 척의 요트들이 보였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여건이 황폐한 상태에서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그간 어렵고 긴 시간을 낑낑대며 인내하며 기다리다 드디어 1차 목적지인 '본보논'까지 오긴 왔구나하며 눈물이 납디다.

 

집사람도 옆에서 감개무량한지 말이 없이 조용히 앞만 바라보고 있더라구요.   아주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어요. 


 

만 안으로 쑥 들어가자 카타마란인 UFO가 보이며 그곳에 같이 있던 '오바다'상과 '노보루'상이 깜짝 놀라며 텐더 보트를 시동 걸어 쫓아와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삭호가 암만 빨리 와도 내일이나 올 것이다 하고 오늘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앵커를 내려놓고 배 정리를 대강 해 놓으니 그 동안 못 잤던 잠이 쏟아지려 했습니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저녁에 샤워 후, 만 우안(만의 오른쪽 안)에 있는 식당에서 '노보루'상이 환영파티를 해 주었습니다.  '노보루' 부인인 '마사꼬'상과 집사람이 얼싸안고 좋아서들 어쩔 줄 모르고, 남자들은 신나게 럼주 한 병을 다 비워 버렸습니다.

 

이곳은 나름대로 일부 요트인들 사이에는 소문이 나 있지만 Sulu해를 통과하여 이곳에 오기가 그리 쉬운 코스는 아니어서 내가 도착해 보니 이곳 방문자 명단을 적어 놓은 나무 간판에 80번째로 이름이 오르게 됐습니다.  

 

또 항해중 부서진 배 조각, 식탁, 비품, 깃발 등에 기록을 적어 남겨 놓고 떠나는 멋있는 전통이 있어 그 동안 달고 다녔던 조그만 태극기(다 낡고 떨어졌지만)를 자랑스럽게 걸어 붙여씁니다.

 

'본보논' 입항 정보 : '니그로스' 섬 남동쪽에 위치한 '본보논' 만은 폭이 약 30 - 60 이며 길이가 약 500미터된  S자 형 만으로 만 안쪽에 폭이 약 100미터 되는 묘박지가 있으며 수심은 6-7미터 정도이고 저질은 모래 섞인 뻘 밭으로 댄훠스, CQR 종류 앵커가 효과가 있음.  만 입구가 S자 형으로 좁고 길게 되어 있어 Typhoon Hole로 필리핀에서 몇 안 되는 태풍에 안전한 장소임.   


만 입구 입항시 좌측의 얕은 모래밭을 조심하여 우측으로 최대한 붙어 입항해야하며, 남쪽 외해에서 09-02-40 N,  123-07-00 E까지 오면 만 입구의 해저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됨.  

 

묘박지는 만 내의 09-03-40 N, 123-07-45 E 위치이며,  입항이 주저스러우면 VHF 68번 채널로 도움을 요청하면 됨(이곳 정박중인 모든 요트와 근처 식당 등에서 공통으로 68번 채널을 사용하고 있음).
이리하여 드디어 이삭호의 항해기는 끝나게 됐습니다.


하여간 그간 배 제작 과정에서부터 수영만에 거의 7년간을 상주하며 뭇 사람의 따가운 눈총도 받았고, 황무지 같은 여건에서 그래도 몇몇 좋은 친구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으며 보낸 시간들,  전 형부부, 제너럴 리 부부, 박 근옹씨(학교생활에 보람이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인내호 박 형곤씨(요즘 항해준비에 바쁘겠네요.  

 

항해 전자장비는 꼭 마린용으로 구입하라고 하세요.  내 경우 마린용이 아닌 건 모두 절단 났음), 서 선생님(아직 담배를 계속 태우시겠지요 ?), 멋쟁이 권 사장, 정 병언(아들놈이 더 멋있어 졌겠지요),한 백철(배 장사가 좀 되는지 ?), 신국장(요즘도 자작정의 구상이 계속되고 있는지), 아그네스 안 사장(700년호의 최근 소식이 궁금합니다), 범주협회 조 사장 형제, 이 인환 씨, 파워마린, 우주마린, 오 종렬(범선대회 준비에 매우 바쁘겠네요) 그리고 그 외 그 동안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모든 것이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어쨌든 이곳 '본보논'이라는 곳에는 외국 요트가 한 20여척 정박 중입니다.  그 중 일본배가 UFO, Rah III를 포함하여 3척, 한국 배로는 우리가 처음이며 유일하고,  모두들 장기 체류하는 배입니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5년 이상씩 체류하고 있답니다.  



'본보논'이라는 곳은 왼 만한 지도에는 잘 나오지도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이 곳에서 버스가 다니는 국도까지는 오토바이(영업용)로 무려 50분을 간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한시간 정도 가여 좀 큰 마을인 '두마게티'라는 도시가 있을 정도의 말 그대로의 열대지방의 오지입니다(물론 전기, 전화, TV등의 문명시설은 없음).   


그래 아주 조용하고 평화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곳에서는 대도시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여유와 느긋함 그리고 게으름이 있을 뿐입니다.    만 우안에는 NE-AR-ME라는 대나무와 야자 잎으로 지운 수상 가옥 레스토랑(영화 속에서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정말 멋있습니다)에서 매주 금요일은 뷔페 파티가 있고, 만 좌안에는 미국인이 필리핀 여자와 살며 식당을 운영하는데 매주 일요일이면 바베큐 파티가 있습니다.  

 

이때는 모든 요트들이 모여 한잔하며 담소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합니다(영어가 시원스레 되지 않는 게 한입니다.  앞으로 요트 여행을 계획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요트 기술보다 먼저 어학공부를 하도록 가르쳐 주세요.  영어 실력이 딸리니 필요한 중요한 정보의 반에 반도 못 건지는 거 같아요).  비용은 크게 걱정 마세요.    

 

뷔페가 1인당 우리 돈으로 3천원이면 아주 다양하고 맛있는 필리핀 요리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요.   술도 필리핀산 브랜디나 럼주 큰 병이 우리 돈으로 1500원 정도 합니다(소주 보다 싸요).   요즘 '노보루 카나다'상과 매일 럼주를 비우고 있어요.  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두마게티'에 가서 일박하고 필요한 생필품 구입하여 돌아온답니다(호텔비도 15000원 정도임).  


그러니 일주일이 절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그렇게 빠르지도 않으며 적당히 느리게 흥미롭게 지나 갈 것 같습니다.   나의 하루해야 될 일은 아침에 물 한 통 길어 오는 겁니다.   그리고 나면 아주 게으르며 느릿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요.   

 

서울에서는 무슨 게이트다 뭐다 하여 악다구니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딱한 사람들이에요. 하여간 그간 힘든 일도 많았고 어려운 때도 많았었지만, 나는 내가 찾고자 했고 바랐던 평화로운 삶을 조금이나마 찾은 거 같습니다.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이곳에 와 있는 요트맨들도 모두 이구동성 동감입니다.  이전에 살아 왔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 살고 있어요.(이런 삶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1차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이곳에 당분간 장기 체류할 생각으로 게으른 생활 외의 특별한 소식을 전 할거도 없을 걸로 생각되어, 앞으로의 장문의 소식은 이번 소식을 마지막으로 끝내려 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된 것은 많은 주위 분들의 도움이었으며, 그 점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02 년  2 월  16 일   필리핀  니그로스  본보논에서                                                       이   삭   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