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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 남북전쟁- 잭슨의 계곡 전투 2. 퀸스타운 전투

구름위 2012. 10. 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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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이 잭슨의 진격로이며, 퀸스타운 바로 위가 윈체스터이다.

 

  불런 전투가 끝난 뒤, 잭슨은 세넌도어 계곡의 윈체스터에서 자신의 여단과 현지 주둔군과 합세하였다. 병력은 2월 28일 현재 4,300명의 보병에 369명의 포병, 그리고 601명의 기병대로 총 5,267명에 불과했지만, 이 병력으로 북군 전초기지인 룸니 지역으로 원정을 가서 주둔군을 후퇴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하들의 탄원으로 인해 부대를 다시 윈체스터로 돌려보냈다.


   이무렵, 북군은 1861년 12월경, 이미 22만의 군과 5백문의 대포를 가진 대군을 편성한다. 맥도웰의 후임으로 동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된 맥클레란은 휘하 병력 15만 5천 중에, 4만 남짓을 워싱턴에 남기고 12만 2천의 병력으로 매너시스의 존스턴 병력을 우회하여 수도 옆의 반도에 상륙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맥클레란의 어배나 계획으로, 자신이 생각하기에 ‘강력한’ 남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수도를 공략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남군은 불과 6만 남짓이었다. 맥클레란은 12만의 군에 4만의 맥도웰의 군이 증원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럴 경우 남군의 3배나 되는 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16만의 군으로 남군의 수도를 함락할 생각이었다.

   맥도웰의 군과 함께 증원이 예정된 군대는 계곡에 위치한 뱅크스의 군이었다. 병력은 18,000명으로, 잭슨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숫자였다. 뱅크스는 계곡 지역의 잭슨을 정리한 뒤, 리치먼드 방향으로 진격하여 맥클레란의 어배나 계획을 돕기로 되어 있었다.

 

  선두인 쉴즈 사단의 9,000명이 윈체스터로 진격해 오자, 잭슨은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862년 3월 12일, 쉴즈는 윈체스터를 점령했다. 잭슨의 행방을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뱅크스는 잭슨을 계곡에서 몰아냈다고 생각했다. 이제 뱅크스는 자신의 임무를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쉴즈 사단을 남기고 남은 부대를 반도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뱅크스는 72킬로 남쪽의 마운트 잭슨에 숨어있는 상태였다. 즉 완전히 계곡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북군이 나눠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뱅크스의 군이 계곡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잭슨은 즉시 쉴즈 사단을 공격하게 하였다. 윈체스터 남쪽 퀸스타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쉴즈의 병력은 9천명으로 잭슨의 병력의 2배에 가까웠다. 잭슨 군 좌익에 대한 북군의 공격 2번을 격퇴한 뒤, 북군은 정면의 스톤웰 여단을 향해 공격하였다. 당시 스톤웰 여단의 지휘관은 가네트 여단장으로, 북군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잭슨에게 자신들이 2배가 넘는 북군과 대적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잭슨은 “그러라고 여기 있는 거네.”라고 답변하였다. 북군 쉴즈 사단장은 부상을 입은 속에서도 6개 연대를 좌측에서 차출하여 중앙으로 보냈다. 2시간을 버티고 탄약이 떨어져갔다. 가네트는 잭슨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탄약이 완전히 떨어지자 후퇴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잭슨은 버지니아 5연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가다가, 부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잭슨은 5연대에게 후퇴를 엄호하게 하고, 5연대는 마지막 부상자가 떠날 때까지 북군을 저지했다.

  

   퀸스타운 전투는 잭슨의 전무후무한 패전이며, 쉴즈 장군은 잭슨을 패배시킨 유일한 북군 장군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 전투에서 남군의 사상자는 718명이고, 북군은 590명이었다. 잭슨은 자신의 명령없이 후퇴한 가네트에게 불명예와 불복종의 혐의로 기소하였다. 비록 첩보가 잘못되고, 탄약이 떨어진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잭슨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군대가 패배하여서 북군이 계곡을 떠나 맥클레란에게 가게됬다며 분을 참지 못했다.

  

  실제로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잭슨의 퀸스타운 공격은 계곡에서 남군이 없다고 생각한 북군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계곡의 북단이 워싱턴에서 2~3일 행군거리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링컨 행정부는 즉시 수도의 안전을 우려하게 되었다. 반도에 보내기로 했던 맥도웰의 4만 병력을 매너시스 지역에 고정시켜 수도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리고 뱅크스의 남은 군대도 전부 계곡으로 보내기로 하였고, 맥클레란의 군 중 1만의 블랭커 사단을 계곡의 서쪽인 프레몬트의 군에 증원하기로 하였다. 즉 잭슨의 5천명 남짓의 군대가 북군 7만명이 맥클레란에게 증원되는 것을 막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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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퀸스타운 전투 비극의 주인공 가네트 장군.

                                      이 전투에서 불가피하게 후퇴하였지만, 잭슨은 그를 '불명예'로 기소했다.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ja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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