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당시, 남북 양측은 서로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능한 장교도 부족했고, 훈련받은 병사도 부족한 상태였다. 양쪽 다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링컨의 말마따나 “어느 쪽 신병이 겁에 질리느냐”가 첫 전투를 결정짓는 요소였다.
북부의 사령관은 맥도웰과 패터슨로, 각각 3만 5천과 1만 8천의 병력을 갖고 찰스타운과 매너시스 역 근처 센터빌에 위치하였다. 작전 계획은 패터슨의 병력이 세넌도어 계곡을 타고 내려오고, 맥도웰이 센터빌에서 매너시스 방향으로 진격하여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접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남부는 찰스타운 남쪽 윈체스터에 존스턴의 1만 2천 병력을 배치하고, 매너시스 역에 뷰리가드의 2만 병력을 배치하였다. 양쪽다 열세인 병력으로 인해 고달픈 상황이었다.
어느 쪽에서도 우세를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맥도웰의 군대가 주공이고 패터슨은 단지 견제할 뿐이라는 첩보가 도착했다. 이에 남부는 서쪽의 패터슨의 군대는 기병대로 교란시키고, 1만 2천의 존스턴의 군대를 철도를 이용해 동부의 뷰리가드의 군대와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철도를 이용한 병력이동으로, 80킬로를 도보로 이동하여 열차를 탄 뒤, 73킬로를 철도로 이동하였다. 존스턴은 이를 3일만에 해냈다. 놀랍게도 적을 교란시키라는 임무를 준 스튜어트의 기병대도 임무를 완수한 뒤 150킬로를 주야로 행군하여 전투 당일날 매너시스 역에 합류했다. 이외에도 수도의 병력이 일부 증원을 왔다.
존스턴의 매너시스 이동로
- 녹색이 도보로 이동한 구간, 청색이 철도를 이용한 구간.
당초 뷰리가드의 계획은 남군의 우익으로 적의 좌익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명령서의 착오로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북군 맥도웰도 같은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적군이 남군의 좌익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배치된 남군은 에반스 여단으로, 900명 남짓의 병력으로 적의 3개 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뷰리가드는 계획을 바꾸고 좌익에 증원군을 보내야 했다.
매너시스역에 도착한 존스턴의 군대 중 선두는 토마스 잭슨의 여단이었다. 잭슨은 하차하자마자 상황을 간파하고 좌익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은 에반스 여단과 비, 바토우 여단의 혼성부대가 매튜고지에서 북군에게 밀려 후퇴하는 시점이었다. 잭슨은 매튜고지의 뒤에 위치한 헨리고지라는 거점에 올라갔다. 대부분의 장군들이 고지 정상에 배치한 것과는 다르게, 잭슨의 자신의 부대를 정상 약간 아래에 배치하였다. 이는 적에게 부족한 병력을 노출시키지 않고, 정상에 올라온 적을 기습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투에서 남군의 사상자는 2천명 정도로 전체 병력의 6퍼센트도 안되지만, 잭슨 여단의 사상자는 484명으로 30%에 달했다. 남군 전체 사상자 중 4분의 1 정도가 한 개 여단에서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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